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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이 Nov 17. 2023

대한민국의 교육은 잘못되었다.

어제가 수능이었다. 이제 막 성인이 된 고3 수험생들이 그동안의 배워온 교육과정을 심사받고, 성취정도에 따라 1등급부터 9등급까지 나눠지게 된다. 이렇게 나눠진 등급으로 이제 SKY 같은 상위 대학에서 질 좋은 교육을 받고 인맥도 쌓고 사회에 진출해서 졸업하게 되면, 이후 고소득 직장을 취득하기 유용해진다. 표면적으로는 교육기회의 평등과 민주적인 절차를 거쳐 선별된 공정한 시스템처럼 포장해 놓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기득권의 특권유지, 세습이 보인다. 교육사회의 문헌을 읽어보면 아동의 교육성취는 가정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그다음으로 교우관계 그리고 마지막이 교사의 능력이다. 부모의 경제력, 사회성 그리고 지능등 여러 가지 요건들이 높으면 높을수록 자식 또한 학업의 성취능력이 높아지는 상관관계가 증명되었다. 이로서 출발선이 공평하지 않음이 증명되었다. 물론,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또래보다 빠르게 성장해 사회 증진에 기여한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 하지만 부모에게 물려받는 유전자는 아버지로부터 50%, 어머니로부터 50%로서 태어날 아이는 랜덤으로 결정된다. 그렇기에 부모가 능력이 있고 사회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사회증진에 기여를 했다고 하더라도 자식은 그렇지 않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이는 사회에서 자수성가한 비율만 보아도 얼마나 극 소수의 사람들만 가능한 영역인지 알 수 있다. The bell curve(벨 커브)를 보아도 유능한 인재는 대다수가 아닌 극 소수이다. 마치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착각하게 될 정도로 어느 정도의 운과 요건이 충족되게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반대로 부모가 여러 가지 요건들이 미달 혹은 평균보다 낮은 가정에서도, 사회에 큰 기여를 하게 될 천재가 태어난다. 그만큼 물려받을 유전자가 섞이는 과정이 랜덤 하기에 우리는 다음세대에 아이가 어떻게 태어날지 알 수 없다. 이로서 필자가 말하고 싶은 건, 가정환경이 좋다고 해서 무능한 아이에게 양질의 자원을 투입하는 어리석음은 멈춰야 하고, 반대로 가정환경이 불우하다고 해서 유능한 아이에게 양질의 자원을 투입하지 아니하는 것 또한 멈춰야 한다. 그렇다면 이 확률의 신에게 선택받았다고 믿어질 만한 인적자원의 아이를 어떻게 하면 발굴할 수 있는가? 가 교육과정에 초점이 되어야 한다. 이는 hierarchy of competence (능력의 계층)를 주장하는 피터슨 교수의 사상에도 등장한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한정된 자원으로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낼 수 있을까? 그건 바로 능력의 계층을 이용하는 것이다. 가정환경이 불우하던, 피부, 인종과는 상관없이 사회증진에 기여할 만한 인적자원을 선별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적자원을 과연 대한민국이 잘 선별하고 있을까? 필자는 아직까지 미흡하고 개선의 여지가 다분하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공평한 것은 실현 불가능하고, 실현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인적자원은 밑바진 독에 물 붙기 식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양질의 자원을 투입한다고 해도 능력이 없는 자에게서 리턴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마치 다리가 없이 태어난 사람보고 올림픽에 나가 뛰라고 하는 것과 같은 잔인함?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모두가 평등한 기회를 가져서는 안 된다. 오히려 능력에 따른 차별을 두어야 하고, 그 능력을 평가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할지 또한 기득권의 특권이 아닌, 민주주의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할 사항이다. 그리고 민주주의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할 사항이란, 국민의 인지 수준이 높아야 함을 전재하고 있기에 어느 정도 불가능에 가까운 개선방안 이라고도 생각된다. 결국 trial and error (시도와 오류)를 반복함으로써 정보를 수집하고 그에 근거하여 조금 더 발전과 개선을 노려 볼 수 있겠다. 이것 또한 우수한 인적자원이 있다면, 그 정보처리 과정에서 유용한 정보를 골라내어 시간을 절약하고 보다 빠르게 좋은 결과를 도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만, 이 또한 확률에 의존해야 하기에 어찌 보면 출산율이 받쳐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성의 사회진출과 출산율의 상관관계를 입증하여 중국정부처럼 강압적이더라도 강경하게 출산율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며, 그로 인해서 반등하는 출산율로 많은 아이들이 태어나, 그중 한 명이라도 우수한 인적자원이 태어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주식에 비교하자면 seed money 가 많을수록 투자하고 수익내기 유리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100%를 기여하고 있기에 더 많은 인간이 태어나고, 그중에서 우수계체가 태어날 확률을 높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라 생각한다.


이로서 대한민국은 교육과정은 기본부터 이미 망가 저버린 과거의 오산물이고, 완전히 쳐부수고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 할 정도로 뒤틀린 교육과정을 이어나가고 있다고 본다. 그로 인해서 젊은 청년들과 대한민국의 노동자들은 그 괴리에서 오는 불합리함을 몸소 체험하고 있으며, 개선의 여지조차 논의하지 못할 만큼 현재 교육시스템에 동화되어, 비판적인 사고방식과 도덕적인 관념이 기득권과 동조화되어가고 있다. 기득권의 특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자율성과 사회의 민주주의가 훼손되더라도 그리고 개인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도덕성도 버리는, 알맹이는 없고 사상의 동조를 위해 주입되어 가는 지식을 토해내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특권층이 이 글을 읽는다면 필자는 묻고 싶다.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부으면 과연 얼마나 유지가 가능할까? 결국 사회가 붕괴되면 가장 많은 것을 잃는 것은,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자이다. 인과응보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에 딱 들어맞는 용어라 생각된다. 결국 기득권의 세습과 과거 유능했던 자신과 대비되는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의 그릇에 과분할 정도의 물을 부어 자식과 사회를 망가트리는 행위는 멈춰야 한다. 오히려 비범한 인적자원은 자신과 같이 특별한 가정환경이 아닌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는 The bell curve에서 증명하듯이 평범하기 때문이다. 결국 가진 자가 사회에 더 많이 환원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원은 공정하게 선별된 인적자원에 투자되어야 하며, 그 외에 평범한 시민들은 그저 참여만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야 한다. 굳이 기회균등의 원칙이니, 의무교육이니 하면서 겉으로만 좋게 포장해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보이는 낭비를 줄이고, 오히려 능력이 되는 아이에게 민주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기득권을 넘겨주어야 한다. 사람은 언젠가 늙어 죽는다. 그렇다면 선행을 해야 할지 악행을 해야 할지 본인의 선택이지만, 필자는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무지의 악행보다는 선행을 베풀어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인류의 존속을 위해 대를 이루고 떠나 주는 것이 행복과 평온을 누릴 수 있는 길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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