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
눈을 떠보니, 낡은 장롱 앞에 쓰러져 있었다.
몸은 무겁고, 머릿속은 차갑게
얼어붙은 듯 텅 비어 있었다.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는 낮선 장면들이
내 눈앞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장롱 사이에 걸린 철봉 하나,
그 위에 묵은 밧줄이 늘어져 있었다.
밧줄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마치 오래된 고통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이게 뭐지..."
나는 떨리는 솥긑으로 밧줄을 더듬었다.
그 순간, 차갑고 어두운 기억 조각들이
한꺼번에 내 안에서 뒤섞이며 몸을
짓눌렀다.
이른 아침,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굴까 싶어 액정을 들여다본 순간, 그토록 증오하며 살아온 이름이 떠올랐다.
"엄마"
내 증오의 시작이자, 불온의 끝.
그게 바로 그 여자다.
받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뭐라고 말하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결국 통화를 눌렀다.
"엄마"
입에서 튀어나온 그 말. 그 뒤에 붙은 건 "왜? 무슨 일 있어?"
우리는 이제, 무슨 일이 있어야먄 전화를 거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 사실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밀려왔다.
그리고 그여자와 나의 통화는 언제나처럼 파국이었다.
엄마는 소리쳤다.
"너 저번 달에 집에 와서 엄마 냄비 버렸더라? 니 할머니가 봤단다. 그게 어떤 냄비인지 알고 버린거니? 그거, 니 아빠한테 맞아가면서 산 냄비야. 내가 얼마나 아껴 쓴 건데! 니가 아무리 날 싫어도 그렇지, 어떻게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걸 버릴 수 있어? 그거 나한텐 소중한 거야! 맞아가면서 샀기 때문에... 10년 넘게 써온 냄비라고!!"
그리고 나는 - 소리쳤다.
늘 그랬다.
우리는 시한폭탄이었다.
누군가 먼저 불을 붙이면, 상대는 더 큰 불꽃으로 응수해야만 했다.
사랑이나 이해 같은 단어는 우리 통화 속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그 냄비가 뭐라고, 그 냄비 볼 때마다 아빠한테 맞은 기억이 떠오르면 그걸 버리는 게 정상 아니야? 시발."
엄마도 멈추지 않았다.
"너, 지금 욕했니? 너 진짜.. 사람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말했다.
"응, 엄마한테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적, 단 한 번도 없어. 엄마한테만큼은 사람이 아니어도 돼. 인간말종이어도 괜찮아. 내가 사랑하라는 사람만 나를 그렇게 보지 않으면 돼."
그렇게 엄마는 수화기 넘어로 자기의 분노를 계속 쏘아댔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엄마의 소음에 환멸을 느끼고 바로 끊어버렸다.
엄마와의 전화는 늘 나에게 큰 공허를 안겨준다.
전화를 끊자마자 나도 모르게
"재수없어" 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나는 밧줄 아래에 있는데, 내 목이 조여오는
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