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건 너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습기.

by 서온

비는 하루 종일 내렸다. 책방의

유리창에 습기가 자욱하게 내려앉아

바깥 풍경을 흐리게 만들었다. 골목 끝의

개 짖는 소리, 간헐적으로 둘리는 자전거 벨 소리, 누군가가 저은 신발을

털며 들어오는 기척-

흐릿하게 존재 했다.


나는 책방의 구석, 습기가 덜한 코너에 앉아 있었다. 내 앞엔 두권의

책이 펼쳐져 있었다. 손끝엔 커피의 미지근한 온기가 아직 남아있었다.

어느 쪽도 집중할 수 없었다.

문장의 끝에서 눈이 흐려졌다. 알 수 없는 피로와 무게가 내 어깨를 끌어

당겼다.


그러다 나는 처음, 연우를 보았다.


그녀는 조용히 다가와 책상 앞에 멈췄다. 젖은 듯 무거운 검은 머리카락,

가느다란 실루엣이 마치 물속에서 걸어나온 사람 같아서, 나의 시선을

끌었다.

손엔 한 권의 낡은 책이 들려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서서 책을 펼쳤다.

마치 오랫동안 찾던 구절을 꺼내보는 사람처럼, 무언가에 이끌린 듯이.


나는그녀를 향해 말하지 않았다. 말할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안심이 되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그녀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 형사님은 만났어?"


처음으로 입을 연 건 그녀였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나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대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아주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그 살인마를, 마지막으로 봤다는 사람 있잖아. 너 꼭 찾겠다고 했잖아."


이상했다. 그러면서 익숙한 질문들.

그런데 왜-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책을 다시 덮고, 손끝으로 책등을

쓰다듬더니 이내 천천히 책방을 나갔다.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였다.


그녀가 그렇게 내 눈앞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는 몇 분, 아니 몇 시간 동안 그 자리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집에는 어떻게 간 걸까.

무언가에 홀린 듯 일어나 보니, 내 방

침대였다.

꿈도, 현실도 아닌 사이. 머릿속이

희뿌에졌다.


그리고, 정신나간 사람처럼

다시 택시를 타고 그 책방으로 향했다.

그 책을 다시 찾아야 했다.

그녀가 들여다보던 책. 오래된 범죄

사건들을 다룬 논픽션.

책갈피처럼 끼워진 메모지가 하나 있었다.

누군가 흘린 듯한 메모지엔, 흐릿한 연필로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그는 늘 비 오는 날에만 나타나."


나는 손끝이 떨렸다.

그 문장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어딘가 익숙했다.

꿈속에서 봤나? 오래전 잊힌 누군가가 속삭인 듯 문장.

나는 메모지를 조심스럽게 접어 주머니에 넣고, 책의 표지를

살폈다.

<사라진 기억의 기록>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본 적이 있었는지, 언제 부터 이 책이, 이 책방에

있었는지조차.. 모르겠다..


책방은 아직 조용했다.

밖은 여전히 흐리고, 빗방울은 쉼 없이

떨어졌다.

나는 책방 문을 닫고, 천천히 안쪽 문을 잠갔다.

그리고 손전등을 들고 책방 뒤편, 출입이

금지된 지하 보관실로 내려갔다.




지하는 축축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엔 오래된

먼지가 가득했고, 발걸음마다

삐걱이는 소리가 무겁게 메아리쳤다.

공팡이 냄새. 젖은 종이의 부스러진 흔적.

낡은 선반과 금속 서랍장 위엔,

손때와 기억이 겹쳐 있었다.

구석의 철제 서랍장 위에 놓인 검은 노트 한 권.


나는 노트를 들었다.


표지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지만,

첫 페이지를 넘기자 그곳엔, 또렷하게 한 문장이 적혀 있었다.


"넌 이제, 질문을 시작해야 해."


그리고 나는 노트를 덮었다.

그리고 천천히, 아주 오래 전 꾼 꿈 하나를 떠올렸다.

비 내리는 날, 검은 코트를 입은 사내가 책방에 들어왔던 꿈.

그는 나에게 단 한 문장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넌 대답하지 말고, 질문만 해. 그리고 나를 찾아."


질문은 안개처럼 시작된다.

그리고 안개는, 진실의 가장자리를 감싼다.


나는 다시 연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연우의 눈동자. 이미 모든 걸 알고 있는 듯한 그 눈빛.

그 애는 누구일까.


아니, 연우는 지금 어디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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