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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직남 Jan 07. 2024

빨간 달력

단편소설집

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뭔가? 사장은 호탕한 목소리로 말했다. 떡락했던 주식이 올랐을 때나 볼 수 있던 표정이었다.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다. 연말이고, 연말에는 달력이 소위 달력 돋친 듯 팔리기 때문이다. 아무리 디지털 시대라도, 조류 독감이랑 비슷한 어감의 인공지능 어쩌고 저쩌고 해도 사람들은 종이로 된 달력을 구매했던 것이다. 탁상 위에 고이 올려둔 달력의 힘은 여전히 건재했다. 그는 이 건실한 일을 이 자리에서 자그마치 26년 동안 해왔던 것이다. 디지털? 엿 먹으라고 하지! 반면, 직원은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그가 쭈뼛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큰 실수를 하나 했습니다...

어떤 실수? 


지금 이 기분이라면 웬만한 실수는 용서해 줄 수 있다. 가뿐하게.  


내년 12월 달력을 죄다 빨갛게 만들었어요... 

잉? 사장은 화들짝 놀라 등을 곧추 세웠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갑자기 커진 사장의 목소리에 직원의 어깨는 안 그래도 좁은데 더 움츠러 들어 앙상한 사시나무를 연상시켰다. 겁에 질린 직원이 아까 전부터 겨드랑이에 고이 고정시킨 직사각형의 달력을 에스칼리버를 뽑아내듯 힘겹게 빼내 사장에게 내밀었다. 사장은 종이 달력을 받아 들고는 한 장, 한 장 천천히 넘기기 시작했다. 설악산의 겨울이 등장하고, 벚꽃나무가 도로 양옆으로 만개한 장면, 부산 해수욕장에서 테닝을 하고 있는 비키니를 입은 여성, 제주도의 푸른 밤 등등 아름다운 사진들이(전부 그와 직원이 인스타그램에서 유명하다는 스폿 이곳저곳을 누비며 직접 촬영한 것들이었다) 2mm 이상 오차 범위 없이 거의 완벽하게 직사각형에 들어차 있었다, 쓱쓱 흡족해하며 11월을 뒤로 넘겼을 때 그의 표정은 잔뜩 주름지고 말았다. 분명히 여섯 개만 있어야 할 빨간색의 숫자들이 웬걸? 서른한 개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12월 한 달이 온통 빨간날이었던 것이다. 


직접적으로 얘기하면 매일이 크리스마스였고,

간접적으로 얘기하자면 매일이 일요일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이렇게 될 수 있지? 


사장은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이런 건 작정하지 않는 이상, 장난을 치려 하지 않는 이상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무서운 얼굴로(일자로 곧게 뻗은 짙은 눈썹은 늘 위협적이었다) 직원을 째려보았다. 함께 한 세월이 5년이다. 감각적인 디자인, 뛰어난 촬영 능력. 무엇보다, 편집 실력 하나만큼은 경쟁사(그래봤자 세 개였지만) 나부랭이들이 절대 따라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베테랑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실수를 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 그냥 장난으로 만들어 본 거였어요... 


사장은 그의 말에 약간 안도했다. 그렇지, 일부로 하지 않는 이상 이럴 수 없지.  


주변 친구들한테 이벤트 삼아 주려고 만들어봤어요... 재밌잖아요? 12월이 온통 빨간 날이면.  


직원이 다시 말해도 재밌는지 자신도 모르게 키득됐다. 반면, 사장은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결론만 말하게! 쓸데없는 부연설명 하지 말고! 

아... 네.. 실수로 친구들에게 보내야 할 택배를, 거래처 고객 명단과 혼동하는 바람에(양 쪽으로 분산된 리스트에는 동명이인이 있었고 뻔한 얘기지만 그는 헷갈렸다) 잘못 발송하게 됐습니다.. 

사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철 장사인데 지금 자신의 베테랑 직원이 실수를 했던 것이다. 그것도 일부러.  


총 몇 갠가?

아마, 열 개 정도...

회수했나? 


직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장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최악의 고객 서비스였다.  

이미, 발송 됐고 12월 한 달만 그렇게 돼 있어서요. 설마, 그걸 보고 진짜 쉬는 날인 줄 알고 오해하겠어요? 

그는 그냥 귀찮았던 것이다. 사장은 모르지만 그는 이미 퇴사를 마음먹고 있었다.  

음... 어쩔 수 없군. 두번 다시 이런 실수하지 말게. 우리 회사 이미지가 있는데... 

네. 죄송합니다. 

직원이 고개를 숙여 깊은 사과를 전했다. 얼마나 깊었는지 반으로 접힌 허리는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는 웃고 있었다. 우리 회사 이미지? ㅋㅋㅋ 고작 사장이랑 직원인 자기, 두 명으로 운영되는 회사다. 그가 애써 웃음을 삼키고는 순식간에 표정을 대역죄인의 가면으로 바꾸고는 고개를 들었다. 해프닝이 일단락되자(달라진 건 없었지만) 사장은 사장자리에, 직원은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사장은 주식 그래프를 보고, 직원은 데이팅 앱에 접속해 아무 연락도 오지 않을 여자들에게 추파를 던졌다.  


그들은 다시 내년을 위한 장사를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그날까지 지루한 1년이 남아있었다.    


그게, 벌써 일 년 전의 일이었다.  






***

현재 라이터스짐에서 관원을 모집 중입니다. 우리 같이 글근육을 키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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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직남 인스타그램 @9_zig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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