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집
잠깐, 시간과 타협해서 여분의 시간을 얻었어. 1월 0일이라는.
평화롭게 길을 가던 사람은 그 자리에 멈춰 서고, 타임스퀘어 앞사람들은 새해 10초 카운트 다운을 세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고, 누군가는 어느 평범한 하루처럼 가족과 편하게 티비를 보고, 또 누군가는 이별하거나, 또 누군가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고 있겠지. 오직 너와 나만이 우리가 익숙한 거리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 보고 있어.
12월 31일과 1월 1일 그 사이 어딘가에서 시간은 멈춰버렸고,
우리만 눈을 껌뻑이며 얼어붙은 세계 속에 놓여있으니까. 이 사실은 아무도 몰라. 아무도 알 수 없어. 너와 나의 비밀로 영원히 남겠지. 너는 놀라 하고 있어.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한지 싶었던 거야. 정말 미안하지만, 이게 무례한 건 알지만 이유는 묻지 말아 줘. 지금,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까. 그냥 이 여분의 시간을 얻기 위해 내가 시간의 지평선을 넘어 꽤나 힘겹게 구해왔다는 것만 알아줘. 쏟아낼 말들이 너무 많아서 두서가 없을지 몰라. 양해 부탁할게.
기나긴 1년이었어. 나는 늘 불안했고, 스스로를 묵직한 체인으로 옥좼지. 지금 이 순간처럼 난 이상과 현실 그 어딘가에서 늘 배회하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지금과 달리 모두가 열심히 움직이고 나만 덩그러니 얼어붙어 있는 기분이었어. 내 꿈을 위해 뭔가를 하고 있는데, 주변 요인에 심하게 흔들렸으니까. 자신이 없었던 거야. 확신이 없었던 거야. 나는 더욱 더 위축됐지. 도대체 ,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무너지려는 순간이었어. 그때, 똑똑. 하고 너는 두드리며 말했어.
어이, 도로 위에서 지금 뭐하는 짓이야? 어서 엉덩이를 움직이라고.
너는 내 손을 잡아 끌어주었고, 따뜻했어. 얼음이 흥건히 녹아내릴 만큼.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고 처음으로 지속적인 월급이라는 걸 받아봤어. 고놈 참 쏠쏠하더라고. 사랑스럽고. 하지만 일을 하면서도 알 수 없는 갈증이 다시 차올랐고 나는 언제나 그랬듯 주섬주섬 다시 도망갈 준비를 했어. 너는 흔쾌히 공모자가 되어주었지. 그게 얼마나 큰 힘이 됐는지 몰라. 이건 진심이야. 한예종에 지원했고 서류전형을 통과했지. 그리고, 면접이 있던 날.
나는 가지 않았어.
항상 우리를 망설이게 하는 건, 시간과 그 시간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야. 시간은 야속하게도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앞으로 달려가고 있고(지금, 이 시간은 불평 없이 따른 보상일지도 몰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예측 불가능한 사건 앞에서 곧장 선택을 내리는 건 쉽지 않으니까. 충분한 시간을 갖고 고민하면 좋겠지만 세상은 결코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 않으니까. 나이를 먹어간다는 건 그런 선택에 있어 최대한 내 안전과 시간을 확보하는 걸지도 몰라. 어른이 되어간다는 거겠지. 그러면서도 나는, 건전한 야망을 잃지 않으려 해. 여전히 이상과 현실 그 사이에서 맴돌고 있음을 느껴. 아마, 앞으로도 그럴 거 같아. 그래도 차이점을 찾자면 지금은 다른 사람들과 발을 맞추며 함께 나아갈 수 있다는 것? 그 균형을 잡는데 한 달이라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시간이 썩 즐겁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이제 진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저쪽에서 시간이라는 녀석이 감독관처럼 손목에 찬 시계를 톡톡 두드리며 나를 보채고 있어. 너는 그저 무심히 나를 바라보고 있어. 언제든 이야기가 다 배출되길 기다려 줄 거처럼. 음... 그러니까, 내가 진짜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은...
너는 씨익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려주었어. 나는 그 속으로 뛰어들었고. 오래간만에 따뜻한 온기가 내 세포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어. 나도 알아. 이 온기가 곧 사라질 거라는 걸. 순식간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말이야.
너무 내 얘기만 했는지 몰라. 어쩔 수 없어. 다음에, 너도 시간이랑 타협을 해서 약간의 여분을 얻어낸다면 나를 찾아와 줘. 그때는 내가 다 들어줄게. 앞으로 또 1년은 어떤 일이 생길까. 뭐든 간에 더 성장하는 우리가 되길 바라.
안녕. 즐거웠어. 잘가.
땡. 땡. 땡.
다시, 일시정지 버튼을 해제하고 플레이 버튼을 누른 게임 속 장면처럼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길을 걷던 사람을 걸어가고, 전광판 카운트 다운은 시작되고, 티브이를 보던 사람은 티비를 보고 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다. 2024년이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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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라이터스짐에서 관원을 모집 중입니다. 우리 같이 글근육을 키워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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