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붙잡아 쓰기까지
글을 계속 쓰기 위해서는 소재가 필요하다. 외부의 자극과 새로운 사건이 그다지 발생하지 않는 지금 내 삶에서는 주로 과거를 꺼내어 쓴다. 거의 매일 글쓰기를 해 온 올해부터는 떠오를 때마다 휴대폰에 메모를 적는데, 일부러 지우지 않고 내용을 쌓아두어서 제텔카스텐처럼 쓰고 싶은 생각이 있어서다.
수시로 그 메모들을 들여다보면, 체계적 분류는 없지만 뒤죽박죽 머릿속에서 섞이다가 하나로 묶여 다른 글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하는데도 하나의 큰 장애물은 기억력이다.
매일 머릿속을 주로 차지하고 있는 건 해야 할 일, 미래의 일, 지금 나의 본능 같은 것이 주된 것이라 그 집중 사이사이 솟아났다 사라지는 색다른 것을 붙잡아야만 하는데 문제는 너무, 빨리, 사라진다.
메모는 주로 문장으로, 되도록 구체적으로 적어야 했다. 단어만으로는 그것에 대한 어떤 생각인지 나중에 보면 도통 떠오르지 않을 때가 많다. 한 번 잃은 기억은 어지간해서는 금방 다시 찾아와 주지 않는데, 어제 같은 경우는 두 가지 생각을 동시에 하다가 메모!! 하고 앱을 켜는 동안 둘 다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생각은 이렇게 휘발성이 강하다. 저녁 내내 그 생각에 발을 동동 구르느라 분통이 터졌다.
메모를 적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 게, 조금이라도 반짝이는 생각이 자주 찾아오지도 않건만 그 순간 메모를 해야지 하고 떠올리는, 그 두 박자기 맞아야만 기록에 남겨지기 때문이다. 몸이 반응하는 지경이 되어야 하는데 아직도 영 그렇질 못하다.
3초를 기억을 못 한다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얘기고 아마 조금은 공감해 줄 여기서나 하는 소리지만, 사실 아이와 함께 기억력을 낳아버린 게 아닐까도 생각한다. 물건을 두고 나가거나 잃어버리지도 못하는, 남이 떠올리지 못해 끙끙대는 단어를 늘 꺼내주는 나였는데, 이젠 제법 꺼내 쓰는 능력이 떨어진 모양이다. 아이의 빠른 변화에 맞춰 새로 입력해야 할 정보와 생활방식이 너무 많은 탓인지. 엄마들의 기억 세탁과 미화가 가끔 이해되는 대목이다.
한편으론 짤막해도 하나의 문장으로 적어둔 것들만 있으면 글이 하나 뚝딱 나오는 것도 신기한 일이다. (내가 쓰는 건 긴 글은 못 되지만.) 적어둔 여러 개의 문장 중 무언가가 선택될 때는 꺼내어질 준비가 된 것이다. 보면, 그냥 이제 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오며 가며 보는 몇 번동안, 생각이 익어가나 보다. 그러기 전까지 어떤 문장은 반년이 되도록 그냥 적혀만 있기도 한다. 아직 생각이 다 채워지지 않았거나, 서로 묶일만한 것을 찾지 못해서 그렇다.
한동안은 생각은 그다지 없는데 메모에만 열중해서 시답잖은 주제들이 그곳에 많이 적혔고, 그중 몇 개는 지워지거나 소모되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있다. 그러니까, 생각나무 같다고 해야 할까. 요즘은 메모에도 시큰둥 해진 게 양분은 주지 않고 수확만 해서인지, 열매로 색다른 게 만들어지지 않아서 조금 재미가 덜 해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자꾸 쓰는 게 능숙한 정원사가 되는 유일한 길 같아서 스스로 만족도는 들쑥날쑥해도 계속 쓴다. 그러다가도 이리저리 방법을 바꿔봐야 할까 망설이고, 그렇게 아직도 초보 티를 낸다.
오늘 조용한 밤엔 다시 한번 영감이 찾아와 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