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닫은 나
우리는 둘 다 너무 무겁다. 가벼우려면 한없이 가벼울 수도 있지만 농담이 그렇게 경쾌한 웃음을 타고 오고 가려면 진짜 가벼운 마음이 필요하다. 나는 요즘 경쾌할 자신이 없어 어두워 보일까 오히려 과장되게 웃었다가 또 가장 만만한 아이 얘기로 덮고 만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 나쁘게 특별하지 않아 평온한 일상.
아무리 이런 나라도 몇 없는 친한 이들에겐 줄곧 내 얘기를 잘 나눠왔는데. 친구끼리 얼굴만 봐도 무슨 일 있는 줄 알아채고, 끝내 말해야만 얼굴을 풀 수 있던 20대였다. (초반, 심리상태는 10대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모양.) 각자의 생활과 짐을 지고 살아가는 지금은 굳이, 네게도 말 못 할 일들이 있겠거니 하고 묻어두는 삶의 먹먹함을 조금 깨쳤다. 함께 사는 이도 낮 시간은 다른 관계로 저마다 버티는 것이 다르겠거니 하고 만다. 그렇다고 지금은 가장 가까울 너와 소원한 것도 아니건만.
언젠가 쌓이고 쌓여 한 번씩 쏟아져 나오면 그제야 별 것 아니었던 듯, 그땐 그랬어- 태연한 척을 한다. 미주알고주알 하던 때보다 견딜 것은, 기분 상할 것은 훨씬 더 많다. 그래서 일일이 다 얘기할 수도, 얘기해선 삶을 유지할 수도 없고, 주변에 나쁜 기운만 퍼뜨리고 다니게 됨을 알지만..
누군가 나의 바위같이 다문 입을 알아줄 때면 참은 것이 눈물로 비어져 나올지도 모른다. 어른이라는 조금의 체면에, 자존심에, 이런저런 이유로 담아만 두었지만 상처마저 무딘 건 아니었기에.
술 취한 너는 더 유쾌하고, 함께였던 과거의 감정을 떠올리고, 종종 기억을 잊고, 애정을 표한다. 평소라면 유쾌함을 조금 같이 즐기다가, 여기부턴 기억되지 않을 영역-이라고 신호가 오면 슬슬 치덕거림이 귀찮기도, 의미 없어 싫기도 했지만.
술 취한 네가 고픈 건 무겁지 않아서다. 지금은 그런 게 필요하다. 차라리 듣고 잊어줬으면 하는 것, 가볍게 듣고 넘어가줬으면 하는 것, 해결하려 들지도 않고 성가시게 느껴지지도 않았으면 하는 것. 무겁고 무거울수록 덜어낼 곳은 필요했지만 내게 무거운 만큼 누군가의 짐으로 느껴지는 건 싫었으므로. 경쾌한 농담으로 웃고 넘어갔으면.
나에겐 널 향해 가진 마음의 부담도, 서로의 가족 관계에서 오는 부채의식도 있다. 뭔지 몰라도 무거운 걸 가졌단 걸 알면 우리는 도리어 서로에게 점점 과묵해진다. 온전한 이해를 기대할 수도, 괜한 걱정만 끼치게 될 수도 있단 걸 알았으니. 기회가 되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고 싶어지면 얘기해 주겠지. 이런 생각도 아이가 생기고 이해의 여유가 덜 한 동안에는 그다지 넉넉지 못했다. 꾹 다물기만 한 입이 결과적으로 좋기만 한 게 아닌 걸 안다. 혼자만 묵혀둔 생각은 가끔 엉뚱한 길을 타고 흐르기도 한다.
가벼운 널 찾는 건 순전히 나 때문이다. 내가 하지 못한 말이 답답했다가, 미안했다가, 부끄럽기도, 대책 없기도 해서 결국은 꺼내지 못했다. 하지 못할 땐 부부란 뭘까, 생각하다가도 서로 마음이 여전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더 크면 이건 지나가는 거겠지, 이런 모습의 한 쌍도 있는 거겠지 생각한다.
지나가고 있는 날 묵묵히 눈치채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일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