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열 살은 무슨 고민을 하나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by 포인셋


열 살 즈음의 아이에겐 무엇이 가장 큰 고민이었을까. 이사를 간다고 들었을 땐 (아파트는 좀 좋았지만) 걱정이 태산이었다. 고작 4년이 그렇게 오래 산 것처럼 느껴졌던 건 내가 그 사이 뭘 잘 모르던 보호받던 어린아이에서, 혼자 몸을 건사할 줄 아는 좀 큰 아이가 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학년은 7살보다 나을 것 같지만, 내 자아가 생겨난 내 기억의 전부 같던 그곳을 떠나 새로운 곳에 적응해야 한다는 건, 이젠 좀 내적 판단의 경계나 내적 낯가림이 훨씬 심해진 내겐 7살 때보다 훨씬 큰 장애물 같았다. 그냥 엄마아빠를 따라가기만 하면 되던 7살 때와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스스로 감당해야 할 게 꽤 많았다.


집, 유치원, 학교, 그리고는 동네가 전부이던 때. 많은 친구와 친한 것도 아니었고, 요란하게 전학 간다며 작별인사나 파티를 연 것도 아닌 나는 걱정에 휩싸여 친한 친구 하나하나와 거의 한 달을 동네 여기저기, 괜스레 일찍이 가보지 못했던 빵집이나 예쁜 것들을 파는 데 들르며 마지막까지 눈에 담고, 편지를 약속하고, 모든 게 끝인 것처럼 실컷 유난스럽게 아쉬워했다.


그렇게 모든 계획이 있어야 하고, 익히 아는 환경에서나 쉬이 돌아다닐 수 있던, 새로운 곳은 잘 못 가던 나는 역시나. 오래된 주택가의 학교가 아닌 새로운 대규모 단지의 새 학교에 뚝 떨어진 나는 그다지 학교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높은 아파트 사이 잘 길을 잃곤 해서 평소 귀찮아만 하던 둘째의 손을 붙잡고 높은 건물의 그늘에 적응해야 했다. 급작스레 난이도가 높아진 교과과정과, 온통 전학생이던 그곳에서 개인마다 신경 써주지는 않던 선생님에게조차 끝내 적응하지 못하고 나는 성적표에 우르르 양, 가를 맞고, 코피를 쏟고, 두드러기로 병원 응급실에 들락거리곤 했다.


그런 신체적 증상도 그때 스트레스받아서 그랬구나-하고 뒤늦게서야 짐작했을 뿐이었고, 그저 스스로도 얼른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좀 이상한가 생각하고 말 일이었다. 그나마 6학년이 되어서야 특별활동에 열성이시던 선생님을 만나 틈날 때마다 합창대회, 주말에도 칼라믹스 만들기 같은 것을 하고, 친한 친구 몇이 생겨 그 또래 여자애들이 그렇듯 서랍 몇 개를 가득 채우도록 쪽지를 정성스레 쓰고, 주고받고 하며 겨우 미로동 골목을 잊은 채 안정을 찾아간 나였다. (거기서도 왜 그런 걸 따지는지 모를 어떤 친구들에 의해 아파트 단지마다의 묘한 편 가르기가 있었지만.)


처음부터 어린이 같진 않던 한결같은 취향을 가진 나는 이사 전이나 후나, 집에서 혼자 노는 데 익숙하고, 다른 활동이란 책을 보는 게 전부라 고만고만 비슷한 성향의 친구들하고나 서로 집에 드나들 정도까지 친해질 수 있었다. 가끔 유난히 예쁘장하고 인기도 많은 친구들이 먼저 다가와 친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흔히들 열광하던 아이돌이나, 외모를 치장하는 데에도 난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객관적으로도 '흥미는 가지만 그다지 큰 재미는 없는 애' 정도의 포지션이었을 것 같다.






이 글에서의 어린 나는 유독 엄마의 기분을 많이 살핀 것 같은 정황들이 드러나는데, 이는 우리가 좀 크고 아빠는 더 나은 수입을 위해 전국 곳곳을 돌며 공사현장을 찾아다니느라 집에 계시지 못한 때가 많아서였을 것이다. 그렇잖아도 좁은 생활 반경 속 내 세상은 부모님이, 그중에서도 엄마가 전부였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서로 많이 의지하는 사이였고, 어린 내게도 엄마의 힘듦은 고스란히 와닿기도 했기에 난 일찍 애늙은이가 됐고, 동생은 둘에, 아빠도 자주 없는 독박육아의 현장을 떠올리기가 쉬웠다. 아이를 키우는 지금의 내 상황을 빗대 '엄마 고생했겠다'가 아닌, '엄마가 이러니 짜증 나는 게 당연했지' 하는 부정적인 측면의 공감을 하게 되기도 한다.


성향이든 취향이든 자라면서 만들어질 것도 많을 것이었다. 다 커서 좀 더 많은 친구들과 어울리며 '내가 제법 우스갯소리도 잘하는 애였군, 나서는 것도 좀 할 줄 아는 애였군' 하는 생각이 들거나 애정이 많은데 티를 못 내는 거라는 말을 듣기도 했을 땐, 이미 성인이 다 되어버린 내가 그제야 '난 원래 어떻게 생긴 애였던 거지, 말수가 없이 고분고분 지낸 건 당시 좀 더 혈기 있고 힘들었을 부모님이 그땐 무턱대고 엄하게 해서, 그저 가정환경이 그랬을 뿐이었나' 하는 생각을 뒤늦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춘기에 못한 말들을 그제야 조금 내뱉고, 그땐 되려 부모님도 얘기를 더 들어줄, 이해해 줄 여유가 생겨서 더 사이가 나아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골목을 벗어난 후, 내겐 그냥 순응하고 사는 이 성격 때문에 이루지 못한 꿈같은 것과, 너무 열심히 하는 것도 그다지 허락되지 않던 형편이, 부모님에게는 갈수록 버겁던 아이들, 당신들의 삶은 없는 것 같으면서도 절대 쉽게 나아지지는 않던 상황들이, 아이 셋이 저 머리 컸다고 서로 다른 시기에 달려들 때마다 행복하지만은 않게 다가왔을 것이었고 실제로 지금까지도 남은 앙금이 되고 만 때도 많았다.


어쩌면 부모님의 고민에 비해 살면서 조금 당연해야 할 고생도 노동도 없어 자기 속만 보고 자란 우리가 나머지는 다 불만스러운 것으로 치부하고, 그다지 행복해 보이진 않던 희생 속 부모님 모습에서 우리 미래를 긍정적으로 꿈꾸지 못하게 된 건 나에게는 그 누구를 탓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저 그 세대마다 짊어진 다른 짐들이 있지만, 그걸 쉽게 가볍니-, 무겁니-하며 겪어보지 않은 이가 무시해선 안 될 것이었다.


골목골목의 정형적이지 않은 길과 집들은 세련되진 않았지만 정겨움이 묻어난다. 매끄럽거나 반듯하거나 예쁘게 칠해진 벽은 아니라도, 벽돌과 거친 아이보리색의 시멘트 표면도 꽤 통일성 있게 어우러졌다. 조금씩 구부러진 골목 끝, 자를 대고 긋지는 않은 얼기설기 바둑판같던 동네, 부르면 만날 수 있고 급하면 맡길 수 있던 믿음이나 여유 같은 건 보기 좋은 회색 칸칸이 가둬놓은 지금은.. 없다. 각박함은 사람인지, 돈인지, 건물이 먼저였는지는 모른다.


옥상에 오르면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집 옥상에서 보이는 만큼의 하늘은 그땐 내 하늘이었다. 옆집의 아이가 옆집 옥상에서 하늘을 본대도, 우리의 하늘이 겹친대도 싸울 일 없이 그건 내 하늘이었다. 집보다는 훨씬 넓었다. 간섭도 비교도 싫다면서 늘 외로움을 얘기하는 게 인간이다. 우리 삶엔 그렇게 자연광이, 좀 더 트인 시야가 (집값으로 겨우 보장될 수 있는 시야 말고), 신경 쓰이지 않게 공유할 공간이, 좋든 나쁘든 과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들이 늘 필요하다. 그래야 여유 있게 '이런' 나를 찾고 또 만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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