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해방>
나는 동물의 이빨에 공포를 느낀다. 크든 작든 나에게 적의와 이빨을 드러낸 동물은 무섭다. (물론 내가 그들에게 어떤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겠지만.) 그런데 어쩌다 흘러 흘러 동물실험을 하고 있었다. 동물을 살리기 위한 곳들 사이, 그렇게 많은 실험동물들이 왔다가 '동물'이란 이름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전에는 실험동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없었다.
동물복지에 대한 인식이 조금 급격히 퍼져나가며 동물실험에 대한 일반의 인식은 부정적으로 바뀌었고 학술활동이나 연구를 위한 동물실험도 갈수록 허가 문제나 제재가 생기고 있다지만, 아직은 추적만 할 수 있는 정도, 적극적으로 관리되는 것도 아니니 결과적으로 실험의 양이 줄었는지는 의문이다. 이전의 극히 일부 비인도적이던 실험 행태만큼에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 믿고 싶다.
모든 것은 개인의 시각 안에서만 보이기 마련이다. 아직은 낯설던 때, 주로 바이러스를 공격접종하거나, 항체 및 면역분자 유도여부를 혈액과 장기에서 확인하는 실험을 경험한 나는 딱 그만큼의 동물실험만 상상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독성 물질이나 약물을 주입하는 것, 변이가 유도된 동물이나 어린 실험동물을 쓰는 것, 혈액을 치환하는 실험들도 동물에게 큰 고통이기는 매한가지이나 예상했던 실험의 범주였고, 특정 자극을 활용하는 등의 행동실험이나 뇌에 물질을 주입하는 것, 근육자극과 골절 시험, 배아 및 발생 실험, 화장품 테스트 등의 악명 높은, 세상에는 상상치 못한 인간의 민낯을 보게 하는 실험들도 많았다.
마우스는 생체전환이 빠르고 유지와 컨트롤이 쉬운 데다 인간과 비슷한 면이 많아 가장 대표적인 실험동물로 사용된다. 수로 경중을 따지기도 어려운 것이지만, 한 번의 실험에 통계학적 의미와 제한된 조건의 실험을 동시에 하려면 어쨌거나 수십 마리의 마우스가 필요하다. 수십이라는 수는 크기가 작은 마우스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죽음으로 결론지어지는 실험이든 아니든, 인위적으로 조작된 실험동물은 인간과는 함께 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그 끝은 결국은 도태다.
그렇게 이용하고도 인간의 입장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종의 차이도 있어서 실험은 더 큰 동물들에게까지 미친다. 그나마 영장류에 대한 실험은 훨씬 더 제한되고 있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컨트롤되지 않은 야생의 동물조차 실험에 활용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는 곤충은, 미생물은, 식물은 괜찮은 걸까. 한 마디로 선 긋기 어려운 문제다.
실험 자체의 고통으로 끝은 아니다. 극히 제한적인 이동과 사육환경, 수없이 계속 생산되고 있는 실험동물도, 인간의 육식과 부산물 이용을 위한 사육도 동물의 복지를 놓고 보면 그 규모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광범위하다. 수송 중 체중감소와 스트레스, 뿔과 이표와 거세라는 이름의 관리, 육우와 송아지 그리고 육계 및 돼지의 사육환경, 젖소의 운명, 마지막 도축. 아무리 예전의 전기식 도축보다 나아진 환경이라 해도 그 후에 수백의 맨살이 드러난 개체들이 걸려 운반되는 모습에서도 동물의 산 모습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 것이기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 것을 소비하고 사는지 새삼 깨닫게 한다.
채식과 동물복지도 정말 동물의 입장이 먼저였는지, 인간에 대한 염려가 먼저였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 삶에 이미 너무 당연한 것이라 보이지 않으면 또 눈감고 만다. 동물과 더불어 환경도 우리가 지켜야 할 존재라면, 마이클 셸런버거의 <지구를 위한다는착각>에서 언급하는 - 채식이 환경에 기여하는 바는 생각보다 크지 않으며, 오히려 환경과 야생의 보존에는 잘 관리된 집약형 축산이 나을지 모른다는 견해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중심 잡아야 할까.
동물실험에서 잠시 손을 떼게 되면서 피터싱어의 <동물해방>을 읽었었다. 저변에 당연하게 깔려있는 인간의 종 차별주의를 놓고 동물의 고통을 외면하면서 인간이 어디까지 가 닿았는지 그 행태를 신랄하게 보여준다. 저자의 시각이 어떻든 사실에 기반한 그 내용들은 드러내놓고 마주하기 불편하지만 이제는 마주해야 한다. 뭐 하러 그렇게까지 복잡하게 생각해야 하는지, 정반대의 시각을 가진 사람도 여전히 있다. 내가 실험동물을 다루던 입장에서 많은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이미 그것을 일상적으로 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성적인 생각으로나마 그것이 잘못된 일이며 축소될 필요가 있다는 걸 지속적으로 깨닫게 하는 기회도 필요하다.
불변의 진리로, 우리가 이만큼의 생물학적 이해와 의료적 혜택을 보며 건강을 추구할 수 있게 된 것도 외면하고 싶지만 과거부터 수많은 동물의 해부, 그리고 다양한 약물과 항생제, 백신과 장기이식 등의 실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인정해야 할 부분도 분명히 있고 무턱대고 No라고 할 수만도 없는 일, 그러나 '필요'라는 말에 대해서는 이젠 조금 더 고민해야 한다. 우리는 분명 '필요' 이상의 동물을 실험과 육식의 수단으로 '소비'하고 있다.
내가 있던 곳에서는 주기적으로 실험동물 위령제를 지냈다. 실험동물을 다루는 곳이라면 정해진 형태 없이도 대체로 그렇게라도 실험동물의 의미와 무거움을 되새기려 한다. 그것 또한 누군가에겐 지나가는 형식일 뿐일지라도, 고마움과 미안함의 감정은 오로지 개인의 몫이라도, 개선을 위한 사회적 약속과 지속적 논의는 분명 언젠가는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