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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인셋 Jun 14. 2023

생산은 끝났다

호르몬, 네가 뭔데 날 이렇게


아이 엄마가 된 또래 친구와 주변인들이 많으니, 이젠 이런 농담도 심심찮게 접할 수 있다. 이제 생산도 끝난 것 같은데, 제 역할 다 끝낸 것 같은데, 내 생에 도움 한 번 된 적 없는 그 녀석과는 작별하고 싶다고. 하지만 이런 농담은 아이 낳는 것이야 어찌 되든 말든, '출산' 이전에도 있었다. 그만큼 호르몬에 좌지우지되는 삶이 싫었던 거다. 이제는 평균적으로 0~2번 정도의 출산을 위해 평생 감내해야 할 것이 너무 큰 탓이다.


생각해 보면 엄마, 할머니들은 그렇지 않았는데 왜 우리들은 그 역시 내 몸인 자궁을 인정하지 못하고 유난히 미워하며 못 견뎌할까. 그만큼 더 활동적이고 주체적이게 된 때문일까. 사회활동도, 운동도, 여행도 해야 하는데 제약과 조심해야 할 것도 싫고, 여성이라는 주체성에 집착하지도 않는다. 가끔은 줄 수 있다면 어디 갖다 줘버리고 싶다고 할 사람이 있을 지도. 그렇게 우리는 본능이라고 하는 생산은 뒤로 하고 활동하며, 매 순간 내 몸하고까지 싸워야 하니 삶이 피곤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엄마들 앞에서 자궁 따위 없어져버렸으면 좋겠다는 등의 소릴 했다가는 불호령을 듣기 쉽다. 좀 더 어릴 때만 해도 누가 자궁을 들어냈다는 얘길 크나큰 결함이 있는 비밀 얘기인 양, 쉬쉬하며 말했었다. 여성에게 자궁경부암의 확률은 여성암 10위권 이내로 꽤 높고, 근종 등의 '위험'만으로도 절제나 적출술을 감행하는 경우는 생각보다 훨씬 더 흔하다. 때로 호르몬을 복용해야 하는 불편한 일이긴 해도 그렇다고 해서 여성이 아니게 되는 것도 아니건만, 그 시절의 여자들에게는 그렇게 '여성의 상징'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여자로 사는 게 지긋지긋했다면서도.




'그날'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하다. 그 기간은 하루가 아닌 일주일이고, 지금의 나에겐 일상의 1/4이다. 평생에서 그날만 9년쯤. 출산 후인 지금도 생리 인생은 반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몇 달 후의 스케줄을 짤 때에도 달력과 계산을 요하며 전전긍긍하는 것, 신체적 활동과 가는 장소와 입는 옷에 제약이 생기는 것, 가는 곳마다 내 뒤와 앉은자리를 신경 써야 하는 것, 기술이 좋지 않던 예전엔 잠조차 편히 들지 못할 것, 규칙적이지 않다면 어디서나 위험과 불안을 감수해야 하는 것, 호르몬 주기마다 통증과 피부트러블 등의 신체변화를 수반하는 것, 가끔은 식욕과 내 기분마저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아무리 변화가 적은 사람이라도 이런 대부분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익숙해질 뿐이고, 정도가 너무 심해서 출근처럼 평생을 익숙해지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간단하게 약의 도움이라. 그것도 개인차와 부작용이 큰 내분비계에서 인위성의 위험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그런 약은 장기 복용해서도 안 되고, 복용 이후 온전히 내 주기로 돌아오기까지의 고통까지 포함하는 일이다. 그렇게 작별도 말처럼 쉬운 거라면. 




안타깝게도 자궁은 여성호르몬이 온전하기 위한 한 세트처럼 작용할 때가 많다. 작별이란 건 호르몬을 너무 쉽게 보고 하는 말이다. 여성호르몬과 작별하는 순간, 우리의 노화는 본격적이게 될 것이다. 뼈는 헐거워지고, 아름다움과 근육과 순환계의 건강과도 멀어질 것이다. 출산을 겪거나 겪지 않아서 생기는 제각각의 문제들은 어느 쪽에 더 유리하게 작용할까. 생물을 공부하며 인체의 정교함에 늘 감탄하지만, 여자의 입장에서만큼은 예외다. 이렇게 소모적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나. (사실은 다음 세대의 한 생명을 만들어내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님을 안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신체적으로는 언제든 아이를 가질 수 있게 '유지'해야 하므로 잦은 변화를 위한 에너지를 쓰는 셈이고, 여성은 출산과 육아에서 감수해야 할 위험이 큰 만큼 선택에 신중을 기하게 된다는 사회진화학적 관점도 이해가 간다. 그와는 별도로 환경에 의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성 호르몬도, 마치 성 호르몬인 양 작동하는 물질들도, 가진 것을 사회적 이유로 쓰지 못하는 현상까지 포함하면 건강과, 여성과, 인구의 문제는 크나큰 한 덩어리가 되고 만다.


자연과 사회 사이, 여성은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우리는 진화와 도태의 그 어딘가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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