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네가 결혼할까 봐 두려워
관계의 무게를 아는 사람에게 냉정하게 마지막을 통보받는다는 건, 그 순간부터 더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완전한 무력함을 선고받는 일이다. 동시에, 그 사람에게 영원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남게 되는 판결이 내려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가장 두려웠던 건, 네가 내 옆에 없다는 사실보다 내가 너에게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걸 인정하는 일이었다.
이제 나는 그저 지나간 사람일 뿐이겠지. 네가 예전 사랑을 대하던 무심한 태도에 내가 괜히 예민했던 것도, 그때부터 우리의 마지막 모습을 예감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유별나게 혼자를 택해온 나와 달리, 흘러가는 대로 관계를 두던 너에게 나는 왠지 모를 초조함을 안고 지냈던 것 같다. 물론, 그건 내 몫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 감정을 네가 조금이라도 알아차려주길 바랐다. 내가 느끼는 불안의 내면을 들여다봐주길 바랐던 거다. 네가 말한 이별의 이유들은 충분히 타당했다. 나는 마지막까지도 지독하게 이기적이었다. 그래, 넌 떠날 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다른 사람의 인생을 선택하는 순간, 나는 너의 세계에서 완전히 지워질까 봐 겁이 난다. 이미 오래전부터 너의 세계에 내가 없었다는 걸 알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한 나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는 데 그 재능을 써왔다. 너도 알잖아, 내가 얼마나 쓸데없는 상상을 잘하는지. 근데 이번엔 진짜라는, 근거 없는 확신이 든다. 가끔은 그런 근거 없음이 모든 걸 이길 때가 있듯이. 문득, 너의 결혼을 상상할 때가 있다. 어울리는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누군가의 손을 잡은 네가 자꾸 흐릿하게 재생된다. 절대 내 눈에 담기진 않겠지만, 너의 새로운 모습들이 시작될 세계를 상상할 때마다 나는 중요한 무언가가 서서히 소멸되는 기분이다. 나는 이제 너의 행복을 빌 수 있다. 하지만 그 행복 속에 내가 없다는 사실은, 언제쯤 완전히 익숙해질까. 우리가 함께 만들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이제는 아예 사라졌다는 건 너무 명백한데, 아직은 조금 버거운 것 같다. 그리고 넌, 이 모든 걸 다시 돌아보지 않는데, 나 혼자 엉켜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게 찝찝하다.
우리가 함께 살 미래를 그리며 브런치에서 인테리어 글을 보여줬던 게 생각난다. 혹시라도 이 글이 너에게 닿는다면, 이건 미련이 아니라 하나의 후일담이다. 하나의 관계가 끝난 뒤, 남겨진 사람의 후기 같은 것.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극단을 오간다. 어떤 날은 괜찮고, 너에게 고맙기까지 하다 또, 감정 없는 사람이라며 욕하고 눈물 쏟으며 끝도 없이 비난한다. 괜찮은 영화 한 편에도 너를 대입해 울컥하고, 쓸데없는 생각들이 머릿속 대부분을 차지한다. 차라리 네가 금방 다른 여자와 빠르게 결혼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본다. 그래야 우리의 이야기는 그저 한낮의 실수였던 것처럼, 흔한 ‘개새끼’ 같은 단어들로 정리될 수 있을 것 같아서. 왠지, 지금 어딘가에서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 것 같다. 그러다 네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평생 혼자 살게.”
관계 속 수많은 약속들은 모두 지켜지지 않았으니, 그 말 하나만큼은 꼭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생각도 하게 된다. 가볍게 만난 여자에게서 문득 내가 떠올랐으면 좋겠고, 그 여자의 평범함이 네 마음을 무너지게 했으면 좋겠다. 결국 그 사람의 따분함이 나를 불러냈으면. 우습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나조차 설득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로 우리가 얼마나 오래 버텼더라.
이제는, 그 자체를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사람. 같은 온도를 나눌 수 있는 사람만을 마음에 들이고 싶다. 나를 품을 수 없는 사람을 너무나 한순간에 마음에 들여놓았던 과거는, 다신 반복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끝났다. 이별에 익숙했고, 냉정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 너와, 영원히 그 자리에 있어주는 배경만 믿고 살아왔던 내가 어떻게 어렵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 널 들인 나는, 정말 많이 무너졌다. 너를 사랑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 결심이, 나에겐 정말 큰 용기였다. 물론, 너도 쉽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어떠한 마음의 무게를 짊어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으니까.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살아오던 익숙한 세계를 벗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받아들이기로 한 나에게, 끝내 단 한 번도 내 이름을 다시 불러주지 않고 떠난 너의 뒷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붕괴였다. 어쩌면 당연한 결말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 나는 네 탓을 하고 싶다. 우리는 그냥, 딱 이 정도였던 거다. 버틴 쪽은 너였고, 외로운 쪽은 나였다.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버티기엔 사랑은 너무 컸고, 현실은 너무 무거웠다. 언젠가 다시 올지도 모를, 아직은 흐릿한 날을 위해 이제는 나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려 한다.
너의 형 결혼은 잘 되었을까. 만나던 사람과 정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행복하길 바란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 나는 두려웠다. 혹시 너도 그렇게 갑자기, 다른 여자와 웨딩 사진을 찍게 될까 봐. 그 사진 속 너의 환한 웃음에서, 내가 반했던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될까 봐. 마음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이렇게나 둥둥 떠다닌다. 그래도 어떻게든, 남은 너의 흔적들이 내 안에 찬란한 폐허로 남아 있길 바란다. 분명 좋았던 순간이 있었으니까. 네가 마지막에 말했던 것처럼.
“좋았던 건 그냥 두자.”
하지만, 아무리 빛났던 순간이 있어도 뭐 하나. 어차피 너는 떠났고, 남겨진 사람은 나니까. 남겨진 사람이 그 찬란했던 시간을 어디까지 간직할 수 있을까. 계획들로 채운 미래를 꾸며놓고, 결국 외롭게 만들고, 끝까지 방치했던. 그런 너를 아직도 놓지 못하는 내가 한심하지만, 여기까지만은 정직하고 싶다.
사실, 네가 결혼할까 봐 두렵다.
아직도 다른 여자의 옆에 있는 너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무너진다. 넌, 이렇게 끝까지 나를 외롭게 만든다. 이건 그저, 관계의 마지막에 남겨진 사람의 정말, 최종, 마지막 발악이다. 절대 너를 공개적으로 미워하려는 얄팍한 합리화는 아니다. 내 인생에서 겨우 몇 번의 방지턱 같은 시련을 겪은 후 너를 만난 게 다행이다. 이 나이에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겪은 것도 다행이다. 내가 처음으로 상실을 느낀 사람이 너였다는 게 고맙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거나, 이미 상처 입은 상태에서 널 만났더라면 이렇게 순수하고 뜨겁게는 사랑하지 못했을 테니까. 네가 했던 ‘형태 없는’ 말들이 정말 아무 형태도 없었던 걸까. 그래서 지금 이 관계가 끝난 뒤, 공허함만이 남아 있는 걸까. 혼자의 힘으로 아무것도 채워본 적 없는 나에게, 이건 참 가혹하다. 그래도, 이 지독한 감정을 너무 늦지 않게 경험할 수 있어서 고마웠다. 결국, 너여서 고마웠다는 말을 남기고 싶었다. 내 모든 순수함이 너에게 잠시나마 닿았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시간은 꽤 괜찮았던 것 같다. 만약 이미 누군가를 만나고 있다면, 내게 줬던 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줬으면 좋겠다. 내 거는 영원히 따로 두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심으로, 너의 편이 되어줄 사람을 만나길 바란다. 내가 해주지 못한 것들을, 이기적일 만큼 너만 생각해 주는 사람에게서 모두 받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는,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자리에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다. 사랑은, 그 사람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하는데, 넌 어땠을까. 끝나고 나서야 정확히 알게 된 네 마음을 나는 이제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혼자서 마침표를 찍는다. 두렵다. 우리가 남긴 기억들을 내 진한 상상력이 언젠가 왜곡시킬까 봐. 진심마저 퇴색시켜 버릴까 봐. 조금은 덜 아프게 남고 싶다. 우리가 함께한 어떤 지점들만은 온전하고, 서로에게 열렬히 충실했던 순간으로 기억되길. 나눴던 수많은 문장들이 어쩌면 가장 귀한 것이었다는 걸 두고두고 떠올릴 수 있기를. 앞으로의 시간은 서로 다른 자리에 놓이겠지만, 가끔 문득 서로를 떠올리며, 지독했지만 지겨운 사랑은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기를. 그리고 서로의 마음이 서로가 상상한 그대로 잘 남아 있기를.
나의 글들이 영원히 너에게 닿지 않기를. 다만, 너를 지나온 나에게는 오래도록 남기를.
바라면서.
"나 너 때문에 고생깨나 했지만 사실 너 아니었음 내 인생 공허했다."
— 헤어질 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