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사계절
우리는 완전한 사계절을 함께 보냈다. 데일 듯 뜨겁고, 언제나 유효할 것만 같았던 겨울이 지나자, 어느새 익숙한 연인의 형태가 되어 있었다. 새벽까지 술을 마신 날에도 늘 택시를 타고 돌아가던 너는, 봄부터 자연스럽게 내 집에 머물렀다. 주말 새벽, 나를 데리러 와 40분을 달려 너의 집으로 향하던 비효율적인 데이트도 끝이 났다. 우리는 자연스레 내 공간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함께 영화를 보고, 뜨겁게 몸을 나누고, 서로의 농담에 웃으며 하루를 채워갔다. 아직 모든 걸 벗는 게 조심스러웠지만, 천천히 알아갔다. 신기해하고, 설레고, 때론 실망하면서도. 그렇게 보통의 연인들처럼 지냈다. 고요한 일상 속, 언제나 함께였던 우리의 첫 번째 봄은 그렇게 흘러갔다. 모든 게 새로운 세상이었던 그 봄에, 우리의 다음 봄은 서로가 없는 형태일 수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까.
여름. 함께 있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계절이었다. 서로의 단점과 고치기 어려운 결들이 부딪혔고, 마음보다 몸이 먼저 익숙해진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반복했다. 둘만 아는 추억들이 쌓여가고, 말도 안 되는 감정이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기도 했다. 서로를 죽일 듯 비난하며 눈물을 쏟고, 감정의 극을 오가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붙어 있었다. 내가 토라지면, 넌 몰래 찾아와 마음을 무너뜨리곤 했다. 아직 그런 힘이 남아 있었겠지. 살아 있었겠지. 그렇게 우리는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느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들여다보려 하기보단, 파도에 휩쓸리듯 흘러갔다. 아직은 지치지 않았고, 뜨겁게 싸우고 서운해하면서도 서로를 놓는 상상은 할 수 없었다.
가을이 오고 바람이 선선해지자 관계의 끝이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제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아는 사이였지만, 사소한 다툼이 잦아졌다. 너는 지쳐갔고, 나는 그런 너를 붙잡으며 무너졌다. 넌 나의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버거워했고, 나는 네가 사랑에 빠졌을 때의 모습만 그리워했다. 이해되지 않는 것 투성이었지만, 막상 이별의 문턱 앞에 서니 모든 건 사소해졌다. 너 없는 나를 도무지 상상할 수 없었기에. 무덤덤했던 한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잘못하고, 자책하고, 미안해하고 애원하며, 가을은 그렇게 지나갔다. 우리도 서서히 선선해지고 있었다.
두 번째 겨울. 우리가 사랑했던 겨울. 생일과 모든 기념일이 있던 계절. 나는 네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너도 우리 부모님과 가까워졌다.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들을 처음 꺼낸 밤들이 잦아졌다. 서로의 세계를 공유해 갔다. 그러나 외부적으로 가까워질수록 내부적으로는 곪아갔다. 서로는 점점 지쳐갔지만, 우리는 결혼을 준비하는 평범한 연인이 되었다. 항상 함께였던 우리는 언제부턴가 의무감으로 엮여 있었다. 누구도 시킨 적 없는데, 마치 그래야만 할 것처럼. 지금의 문제를 마주하기보단 도망치듯 미래를 설계했다. 예비 신혼부부 자격으로 함께 살 집의 청약을 넣고, 부동산과 재테크를 이야기하며 미래를 그렸다. 겉으로는 잘 맞는 듯했다. 여행 취향도, 인생 목표도. 하지만 마음은 매번 어긋났다.
우리는 계획을 짜며 다투는 연인이 아니라, 서로의 결핍을 찌르며 상처 내는 연인이었다. 비슷한 대화와 목표가 있었지만, ‘우리’가 되려는 순간마다 사소한 감정들이 날카롭게 충돌했다. 감정의 기반은 점점 희미해졌다. 나는 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아쉬워 결혼을 꿈꿨고, 그런 이유가 너와 같기를 바랐다. 함께여야만 기대되는 미래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너는 안정되고 싶던 사람이었다. 우리가 어떻게 다투지 않을 수 있었을까.
붙잡고 싶은 마음은 서운함이라는 모양으로만 말이 됐다.
“오빠, 어차피 결혼하고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될 거야. 나, 그렇게 될 수 있어. 하지만 지금은 연애잖아. 보고 싶고, 떨어져 있는 게 아쉬운 그 마음이 주가 되고 싶어. 오빠도 나한테 흔들리는 마음을 보여줬으면 좋겠어. 우리 지금, 사랑하고 있는 거잖아.”
때로는 사랑만이 필요할 때가 있다. 불안하고 위태로워도, 그 감정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하찮고 사소한 감정이 있어야만 완성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너는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건 사랑이 아니야?”
서로 주고 싶은 사랑만 주고, 받고 싶은 사랑은 끝내 받지 못했다. 결국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지 못했다. 너는 쌓아가며 나아가는 걸 중요하게 여겼고, 의연함을 가진 어른 여자를 원했다. 힘이 되는 사람.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그럴 때마다 끝까지 가보자고 다짐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빠진 미래를 준비하면서. 돌이켜보면, 완벽한 사계절이 아니라 서로를 조금씩 소모해 가던 계절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직, 그 시절의 너를 기억한다. 모든 순간 속에서 너는 내게 가장 선명한 환기였다. 나는 그런 사랑을 했었다. 그리고 너도, 나를 사랑했을 거다. 쉽게 오지 않았던 순간들, 동시에 우리에게 찾아왔던 시간들이 나는 기적이었다고 믿고 싶다.
뜨겁기만 하다고 여름이 아니듯, 우리의 여름은 어쩌면 그 어떤 계절보다 뜨거웠던 겨울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에게도 가장 설렜던 봄이 있었지만, 어떤 봄은 결국 우리를 놓아버렸다. 뜨거웠던 날들이 무색하게 손을 놓아야 했던 끝이 있는 계절보다는, 선선하고 따뜻한 가을을 기다리고 싶다. 조금 심심해도, 화려하게 피는 꽃이 없어도 여전히 손을 잡고 걸을 수 있는 계절을 기다리고 싶다. 하지만 그 계절 옆에 있는 사람이 더 이상 네가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네 옆에도 내가 없을 거라는 게 아직은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괜찮아지려 한다. 우리의 기억이 같은 온도로 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제는 더 이상 반추하지 않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