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의 지층에 대하여
거시적으로 보나 미시적으로 보나, 나는 쉬운 인간인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쉬울까. 아닌 척 고상을 떨어봐도 결국 나를 꽉 붙잡아줄 단단한 제동 장치가 내 안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과거에는 나를 과하게 옭아매어 숨 막히게 하던 어떤 브레이크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 제동이 완전히 풀려버려 브레이크 없는 낡은 트럭처럼 벼랑 끝을 향해 질주하는 꼴이다.
내 머릿속은 지금 싸구려 도파민과 알량한 도덕성이 지독하게 뒤엉켜 있다. 그중 대체 어느 쪽이 맞는 건지, 내가 원래 어떤 가치관을 가진 인간이었는지 가늠조차 안 될 정도로 엉망진창이다. 맨정신일 땐 "더 이상의 수치스러움은 그만 누적하자"며 입술을 깨물지만, 알코올이라는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순간 뇌의 스위치는 '탁' 하고 너무나 쉽게 풀려버린다. 억눌러왔던 외로움과 공허함이 이성과 도덕성을 비웃으며 충동으로 터져 나오고, 나는 또다시 수치스러운 기억의 페이지를 새로 덮어쓴다.
이렇게 덮어지고, 또 새로운 수치심들이 그 위를 기괴하게 덮어버리면 나는 결국 어떻게 되는 걸까. 언젠가 이 얄팍한 쾌락들이 다 휘발되고 났을 때, 나라는 인간의 밑바닥엔 그저 겹겹이 쌓인 '수치심의 지층'만이 남게 되는 건 아닐까. 칠흑 같은 새벽, 그 서늘한 불안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든다.
하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지독한 현타와 불안이야말로 내가 아직 완전히 쓰레기로 전락하지 않았다는 유일하고도 처절한 증거가 아닐까. 진짜로 도덕성이 증발하고 타락한 인간은 애초에 자기 혐오나 수치심 따위는 느끼지 않을 테니까. 브레이크가 완전히 박살 난 줄 알았는데, 내면 아주 깊은 곳에서는 "이대로 가다간 정말 끝장이야!"라며 경고등을 미친 듯이 울려대고 있는 거다.
어쩌면 나는 태생적으로 가볍고 쉬운 인간이 아니라, '나의 P'라는 거대한 세계가 붕괴된 후 그 끔찍한 통증을 견디지 못해 가장 빠르고 자극적인 진통제에 손을 대고 있는 고장 난 생존자일지도 모른다. 도파민이라는 그 얄팍한 진통제라도 털어 넣지 않으면 당장 오늘 하루를 버텨낼 면역력이 바닥나 버렸기 때문에.
수치심만 남을까 두렵다는 나의 이 비겁한 불안감을 안고, 나는 오늘도 위태로운 줄타기를 한다. 고장 난 브레이크를 고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그저 이 끔찍한 내면의 비상벨 소리를 못 들은 척 알코올로 덮어버리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