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 서른둘

술 먹고 전화하는 뻔한 남자였다면

by 유은


30대 중반을 앞둔 너의 첫인상은 멀끔한 성인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호감을 살 얼굴과 말투, 부담스럽지 않은 태도. 나는 조금 더 극단적인 쪽이었다. 누군가를 단번에 빠져들게도, 또 누군가에게는 쉽게 오해를 사기도 하는 그런 사람. 양극단의 감정을 건드리는 기질. 하지만 그 기질들이 사랑 안에서 잠잠해졌을 때, 우리의 시간이 시작되었다.


“아, 아쉽다. 오늘 꼭 일 가야 하는 거죠? 다음에 꼭 같이 한잔해요. 정말 아쉽네.”


넌 항상 나를 아쉬워하던 사람이었다. 헤어지기 전, 내가 그토록 바랐던 너의 모습은 사랑에 빠진 남자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눈이 많이 오던 12월에 만나 1월에 연인이 되었다. 크리스마스이브엔 새벽 다섯 시가 넘도록 위스키, 부속고기와 소주, 해장국을 먹었고, 그날도 어김없이 눈이 왔다. 크리스마스엔 삼겹살을 먹고 야경을 보러 올라갔다. 해가 바뀌는 걸 함께 했고, 가장 뜨거웠던 시기엔 서로의 생일을 챙겼으며, 매일 차는 시계를 내 손목에 채워주기도 했다. 네가 가진 가장 비싼 거라며, 술에 취해 진심 어린 말투로 주절거리던 너였다. 떠난 자리에서는 늘 서로를 원하고, 보고 싶어 했다. 분명 마냥 좋기만 했던 때가 있었다. 서로에게 조심했고, 새로운 것에 대한 불확실함이 오히려 관계를 건강하게 만들었다. 연애는 관심 없다며 방어했던 나에게, 단 한 번도 상처받은 적 없는 것처럼 나를 연인으로 대했다. 넌 좀처럼 쉽게 흔들리지 않던 사람이었다. 그렇게 맑은 모습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나, 이런 애칭 얘기 해본 적 없었는데... 이제 자기, 여보라고 불러도 되는 건가? 너무 좋다. 내가 정말 잘할게.”


정말이냐는 너의 셀 수 없이 많은 물음과 함께, 택시에서 술에 취해 걸려온 너의 전화를 언제쯤 조금 더 담담하게 떠올릴 수 있을까. 괜찮다가도, 그때의 우리가 떠오르면 여전히 마음이 울렁거린다. 확신할 수 있는 건, 우리의 한 달은 어떤 기억으로라도 덮이지 않을 거라는 것. 그때 너의 눈엔 진짜 애정이 가득했으니까.


이별의 순간들을 글로 옮기다 보니, 우리가 너무 형편없는 사랑을 한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정말 그랬을까? 우리는 ‘아닌 사랑’을 했던 걸까. 너는 누구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꺼내본 적이 있을까. 진심이 드물었던 우리에게, 그 순간만큼은 마지막 낭만처럼 미친 듯이 사랑했던 날들이 있었다. 감정이라는 게 이렇게 클 수 있다는 걸, 함께 놀라워하기도 했었다. 우리는 많은 결이 닮아 있었다. 사람들의 유형을 나눌 때 “그냥 나지.”라고 말하곤 했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너를 만나기 전엔 내 집도, 회사도, 가족도 누군가에게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냥 나 자체만 남고 싶었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관계만 두고 싶었다. 한편으론 전부를 껴안을 수 있다는 의지와 허상을 깨줄 진지한 관계를 원하고 있던 반골이기도 했다. 그렇게 스물다섯의 끝자락, 네가 찾아왔다. 존중했고, 배려했고, 모든 방어기제를 허물고 맨몸을 드러냈다. 다양한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다던 너는, 날 만나 처음으로 감정의 한계를 느끼고 표현해 봤다고 했다. 하지만 그 표현들이 결국 우리를 집어삼켰다. 겉으로는 많은 것이 닮았지만, 안에 있던 아이들은 서로를 품지 못했다.


나는 끊었던 전자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항우울제를 먹고, 술은 거의 마시지 않는다. 아, 너 때문은 아니다. 세로토닌 조절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꾸준히 먹어보려 한다. 한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했던 건 식욕이었는데, 이젠 딱히 먹고 싶은 게 없다. 너와 헤어진 뒤로 회도, 얼큰한 탕에 소주도 생각나지 않는다.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몸이 받질 못한다. 혼자 마시는 위스키 한 잔도 역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게 정상인 거야, 유은.” 네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별은 생각보다 훨씬 힘이 셌고, 넌 내게 유독 강력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자주 마셨던 레드와인도, 혼자선 더 이상 마시지 않는다.


아침엔 따뜻한 물과 영양제를 챙겨 먹고, 전자담배를 문다. 커피를 내리고, 좋아하는 유튜버들의 잡담과 음악을 흘려보낸다. 책상에 앉아 글을 쓰고, 힘들면 책을 읽고, 배가 고프면 삶은 계란 두 개에 연두부를 먹는다. 그리고 다시 글을 쓴다. 가끔은 분짜를 시켜 먹고, 저녁엔 영화를 본다. 일주일에 두 번은 땀이 나는 운동을 하고, 주 5일은 만 보 이상 걷는다. 지금의 나는 너를 만나기 전, 스물다섯의 나와 가장 많이 닮아 있다. 하지만 확실히 다른 점은, 훨씬 더 편안해졌다는 것. 네가 말했던 “너무 힘주지 말고 살자”는 말을 이제야 정확하게 알 것 같다.


...실은 자랑하고 싶다. 너에게 전화를 걸어 투정 부리고 싶다. “나, 너 없어도 잘하지? 잘 지내지? 잘해 먹지? 글은 어때? 혹시 우리가 너무 과장됐을까?” 수화기 너머의 네가 웃으며 ‘잘하고 있다’라고 할 것 같다.
너는 어땠을까. 내가 남긴 짐들, 정말 다 버렸을까. 그 생각을 하면 쓰라린 마음이 든다. 고생했겠지. 남은 것도 많았을 텐데. 내가 준 옷을 입을 때 넌 내 생각을 하지 않겠지. 우리가 쓴 술값도, 그저 지나간 소비일 뿐이겠지. 너는 그런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촌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네가 내게 그런 촌스러운 사람이길 바랐다. 술에 취해 우리 집 앞 골목에 서 있다거나, 짐을 핑계로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자고 한다거나, 한 번도 주지 않았던 편지를 보내온다거나...


내가 너의 과거 여자친구 흔적을 보고 왜 그렇게나 마음이 찢어졌는지 이제 알겠다며, 우리의 대화가 네 사과로 끝났던 적이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고. 한 번쯤은 그렇게 와서, 조금이나마 덜어주고 싶어서 왔다고. 나에게 죄책감만 준 것 같아 미안하다고. 고마웠다고. 처음의 너 모습 그대로, 그렇게 말해주길 바랐던 것 같다.


...이게 네가 말하는 ‘망상’이겠지. 우리의 마지막이 찰나의 한순간이었더라도, 더는 내가 너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끝도 없는 의심을 멈추려 한다. 더 이상 궁금하지 않겠지만, 나에게 너란 존재는 이랬다.


“내가 그 사람보다 너랑 먼저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셋쯤 낳았다고 해도, 그 사람이 왔으면.. 나는 또 이렇게 가슴이 내려앉았을 거야.”
― 사랑 후에 오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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