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과 의사들이 주장하길 과거를 생각하는 것도 미래를 상상하는 것도 다 건강하지 못하다고 한다. 가장 좋은 것은 현실에 충실하는 것이라는 거다. 생각은 최대한 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고, 매순간 그냥 살아가는 것이 건강한 삶이라고 한다. 누가 그랬던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뭐더라. 어쨋든 그 생각하면서 사는 것이 낫다고 했는데, 거 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자꾸 이렇게 말을 바꿔서야 쓰나.
내가 생각하기에 생각을 최대한 하지 않고 현실에 충실하다는 말은 그저 생존하라는 말이다. 하지만 인간이란 그저 생존하는 것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존재다. 인간은 개 풀뜯어 먹는 소리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목적이란 그저 생존과 번식일 지 모른다는 과학적 물증 앞에서도 신이 우리를 특별히 사랑해서 이 빈약한 몰골조차 그와 닮게 만들었다며 존재에 가치와 목적을 쥐어 짜내는 존재다. 어쩌면 건강한 정신으로 생각없이 하루를 영위하는 삶보다, 피폐한 정신으로 치열하게 고민하는 삶이 더 인간적일지도 모르겠다.
바야흐로 정신병자들의 시대가 아닌가.
그래서!
좀 도른자처럼 살고 있다. 가다오다 마주치는 인간들이 좀 돌아있어도 그러려니 한다. 존재를 치열하게 고민하다 돌았나보지.낯선이가 다소 무례해도, 그 무례가 내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는 선이라면 그저 저인간이 살고있는 머릿 속의 지옥을 언뜻 엿보았나보다 한다. 대민업무에 종사하는 자가 생존하기 위한 나름의 정신승리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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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치원을 옮긴 지 한달 조금 넘은 우리집 어린이가 친구의 괴롭힘을 호소했다. 특별히 몸에 상처가 난 것도 아니고 , 같은반 친구도 아니고 방과후 한시간 만나는 친구이기도 하고 , 또 우리집어린이의 배타적인 성향은 처음 보는데 넘 다가오는 친구에게 경계심을 느끼고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어서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런데 며칠 전에 하원할때 데릴러 갔는데 애 얼굴이 빨갛게 멍이들어 있었다.그 순간 배웅을 나온 담임선생님과 나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에게 정적이 흘렀다. 담임선생님이 나보다 더 기민하게 반응하셨다. 며칠후에 선생님께서 얘기하시길 본인이 씨씨티비를 살펴봤더니 그날 시후라는 아이가 우리집 어린이를 꼬집고 공격적인 정황이 있어 그 전날과 전전날과 며칠의 씨씨티비를 봤더니 지속적으로 매일 ! 공격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했다. 선생님께서 확인하시고 그 시후라는 아이 반 담임선생님에게도 얘기하고 그 아이의 부모님께도 전달했다고 하셨다. 그 아이를 데려와서 사과하게 했고, 미안하다는 사과를 받고 우리집 아이는 상투적인 "괜찮아~"라는 반응을 하며 마무리 되었다고 한다.
사실, 지속적으로 며칠이나 그랬다는 말을 들으니 분노가 역류하는 기분이였다.
하지만 상대는 일곱살. 나는 ... 불혹이다.
이미 선생님께서 할 수 있는 조치를 하셨고 그 아이반 담임선생님께도 얘기하고 부모에게도 얘기하고 아이가 사과도 했다고 하고, 또 우리 아이는 사과를 받아주었다.
그냥 앞으로 그러지 않는지 두고 보는 것 외에는 뭐 딱히 더 할 것도 말것도 없는 일이다.
내가 정말 화가 났던 것은,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한 내 자신이였다.
아이는 이미 몇 번이나 괴롭힘을 호소했는데도, 나는 내 나름의 판단으로 아이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내가 아이의 보호자임에도 불구하고 보호를 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오히려 아이의 예민함이나, 불편함 정도로 가볍게 치부했다. 나는 내 기준을 확고한 잣대로 삼아, 사실을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아이의 현실을 과소평가했다. 나는 내 성격의 무던함을 핑계삼아, 그 무던함 뒤에 숨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무던함과 외면, 혹은 무던함과 회피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내 자신이라고 믿는 것과, 절대로 내 자신이여서는 안된다고 믿는 것은 종이 한장 차이이거나 교묘한 말장난으로 감춰진 쌍둥이일지도 모르겠다.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가끔 내 자신을 다시 자각하고 나를 키워가는 일인 것만 같다. 그 과정에서 자꾸만 내자신을 발견하는일이 어쩐지 두려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