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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 더러운 구원.

by 기묘염

여수를 다녀왔다. 토요일에 어린이와 하릴 없는 오전을 보내다가, 오후 세시쯤 남은 하루가 유난히 길고 지난하게 느껴져서 '에라, 지금 출발하면 그래도 운전하다보면 두시간은 때울 수 있어.' 라는 묘책이 떠올랐다.
나의 강점이자 약점은 충동적인 결정일수록 추진력이 강하다는 거다.
오분만에 숙소를 예약하고, 엄마아빠한테 전화를 걸어서 삼십분안에 짐을 챙기라고 통보한 후, 어린이와 나의 짐을 챙겼다. 여수? 라는 생각이 머리에 떠오르고 삼십분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갑작스레 떠나는 여행'은 일탈이나 낭만이 어울어진 단어의 조합같지만, 나는 안다. 그것은 충동과 자본의 합작품이며 도피의 다른말이다.
쉽게 말해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돈을 지불했다는 뜻이다.

돈을 쓰면 모든 것이 그럴싸해진다. 낯선 곳의 문을 열었을 때, 바다가 보이는 통창에 하얀 이불이 깔린 푹신한 침대가 놓여 있으면 충동은 계획이 되고 도피는 낭만이 된다. 엄마 아빠는 평범한 하루의 끝무렵에 갑자기 펼쳐진 낯선 풍경에 신났고, 아이는 창밑으로 보이는 수영장에 흥분했고 , 나는 흥분한 아이와 행복한 엄마아빠가 알아서 잘 노는동안 이불속으로 기어들어가 사람의 몸뚱이는 독립된 유기체로 홀로 , 따로, 각자, 존재함을 만끽했다.
운전대를 잡는 내내 아이와 공룡얘기를 하는 대신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숙소에선 잠깐 자유로웠다. 그게 다였다.

도착한지 삼십분만에 나는 늙어가는 부모의 보호자이자, 자라나는 아이의 책임자로서 저녁밥을 걱정하고, 맛집을 검색하고, 인솔했다. 한쪽은 식사를 대접하고, 다른 한쪽은 식사를 떠먹이며 다가올 밤을 대비했다. 씻기고 씻고, 재우고 , 이제는품을 떠난 부모의 낯선 코골이를 들으며 잠을 설쳤다. 오전엔 카페를 검색하고 인솔하고 비위를 맞추고 대접하고 먹였고, 점심땐 식사를 고민하고 검색하고 인솔하고 비위를 맞추고 대접하고 먹였다. 돌아가는 길, 괜찮은 주말을 보낸 세사람이 잠이 든 동안 음악을 들으며 운전하는 그 두 시간동안, 그래 이 맛에 여행오지.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짧은 자유를 느낀 것도 같다.

주말을 그렇게 보내고 나니 이번 한 주가 길다. 게다가 말일이라 업무도 폭발하고 있다. 피로에 피로가 누적되고, 갑작스레 더워진 날씨에 병든 닭처럼 시름시름 앓지만, 이런 일상이, 이 피로감이 나를 지탱하는 힘인 것을 안다. 매일 반복되는 이 루틴이 나를 구원하는 것을 안다. 충동도 추진력도 돌아갈 곳이 존재하기 때문에 힘을 얻는다. 시시때때로 삶이 나에게 악다구니를 쓰는 것 같지만, 그 비명에 잠식되지 않고, 때론 귀를 막고 다른 쪽을 돌아볼 수 있는 힘은 결국 반복되는 일상에 있다.
나는 다시 돌아왔고, 때론 다시 도망갈 것이다.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급하게 모든 것을 추진하고, 가서 후회하고 돌아와서 피곤하겠지만 짱짱한 고무줄에 묶인 추처럼, 늘 같은 곳을 뱅글뱅글 도는 것이 삶의 구원이라 믿는다.
생각없이 돈을 마구 쓰고 돌아와서 닥치고 일하면서 구멍을 매꿔가는 삶. 아 얼마나 다행스러운 삶인가.
존나 가끔 펑펑쓰는데 존나 매일 몸을 갈아 매꿔야 하는것이 가성비가 더럽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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