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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구실을 하겠다는 의지.

by 기묘염

연휴가 길다. 쉬는 날이 싫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쉬는 것이 아닌 것이 문제인 것 같다. 어린이날은 오늘이지만 어제도 그제도 오늘도 어린이날 같았다. 어버이날은 아직 며칠 남았지만 어제도 오늘도 어버이날 같았다. 내일도 모레도 어버이날 같을 것 같다. 어린이는 데리고 나갈 때마다 어린이날 타령을 하고, 쇼핑몰에는 어버이와 어린이와 뭐 삼대가 어우러져서 장난감가게에 우르르, 옷가게에 우르르, 식당에 우르르 쓸려 다니고 있다. 가족 간에도 오고 가는 선물 속에 돈독해지는 뭔가가 있나. 아니면 오고 가는 선물로라도 증명해야 하는 의심스러운 무언가가 있나. 소중한 것이 없는 시대에,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돈과 시간뿐이다. 내가 너에게 돈과 시간을 쓰고 있다는 사실로 기를 쓰고 보여줘야만 하는 마음 같은 것도 있는 법이다.


인간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라고 쳐도, 흔히들 말하는 사람 구실이란 거의 뭔가를 보여줘야만 하는 일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근근이 사람 노릇을 해내는 일이다. 지인의 경조사를 챙기는 일, 가까운 사람들의 생일이나 기념일에 마음 쓰는 일, 명절이면 어떤 역할의 시늉을 하는 일, 작년에 왔던 그날이 죽지도 않고 또 오더라도 바가지로 대가리를 깨지 않는 일. 안 기뻐도 기쁜 듯, 안 슬퍼도 슬픈 듯, 마음 쓰이지 않아도 마음 쓰이는 듯 주어진 역할극을 충실히 해내는 것으로 존재를, 뭐 대단히 인정받진 않아도 그저 나 여기 있음을 증명하는 일에 인생을 소모할 수 있다.

산다는 것은 결국 주어진 삶을 어떤 방식으로든 소모해내야만 하는 거고 ,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비교적 안전하고 공인된 방식의 적절한 소모임은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부모로서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을 증명해 내고 , 또 본보기가 되고자!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거지같은..(더 나은 표현을 생각해 낼 수가 없다) 날씨에, 꾸역꾸역 나가서 해남 공룡박물관에 다녀왔다. 전생보다 먼 세계에 존재했던 파충류뼈다귀를 보기 위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을 줄은 몰랐다. 부모들과 조부모들(은 대체 왜.. 어버이날을 맞아 공룡 뼈다귀를 보여주는 중년의 자식들이라니! )과 아이들이 애매한 비를 맞으며 길게 줄을 서 있었다. (닭꼬치 하나를 먹는데도 콜플 콘서트 여자화장실 앞만큼 줄을 서야 한다. 정작 여자화장실은 어땠을지 말을 말자. ) 직접 달고나 만들기 부스 앞에 줄을 서보았다. 달고나라는 것이 하나 만드는데 한 사람 앞에 오분은 걸리므로, 열명만 서있어도 오십 분이다. 이 부스 누가 기획했나.. 이십 분 만에 포기하고 줄과 줄 사이를 헤매다가 만만하고 회전율 좋은 토머스 기차만 하나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뭐 워낙 공룡을 좋아하는 전형적이고 개성 없는 아이를 둔 덕에, 그저 박물관에서 뼈다귀 몇 개를 본 것만으로도 만족한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돌아와서는 시어머니 ( 어제 그제 이틀은 우리 엄빠였다.)를 만나서, 구색 맞춘( 대충 가격보고 적정한선에서 골랐단 얘기다) 선물을 전달하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대충 연휴가 끝나간다. 지난한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무사히 보내고, 줄줄 새는 구멍을 막으러 다시 출근할 수 있는 삶이 한편으론 다행스럽다. 아주 조금만 삐끗해도, 그것이 나의 실수나 잘못이든 혹은 불가항력이나 우연이든 간에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쉽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인지 생각하면 식은땀이 날 것만 같다.

구시렁거리고 불평하면서도, 실은 이것이 삶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것임을 모르지 않는다. 매사에 감사할 수 있는 인간은 못되지만 때론 다행이라는 생각은 할 줄 아는 인간이다.


돌아오는 주말에는, 꿈나무 슛돌이? 꿈돌이 축구부? 뭐드라 슛돌이 축구? 여튼 유치부 축구교실에 가고, 일요일엔 과학관에 갈 예정이다. 어린이날이 지났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우리 집 어린이가 호락호락하게 먹고 떨어지는 스타일도 아니고, 어린이날은 지나도 육아는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다 틈틈이 엄마 아빠랑 같이 밥도 먹고 차도 마시고 운전도 열심히 해서 여기저기 다니는 것 역시 나의 몫이다. 어버이날이 지났다고 해서, 자식을 바라보고 있는 부모가 갑자기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지도 않을뿐더러, 어버이날은 지나도 나는 계속 그들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나는 근근이 사람노릇을 하는 것으로 내 인생을 소모할 생각이다. 나를 위해 살라, 주체적인 삶을 살아라, 내 마음의 소리에 어쩌고 하는 격언들이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소비할 때 격언을 따르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늘 마이너스다. 더 이상 격언을 따를 여력이 없을뿐더러, 나는 안전지향적인 사람이다.

사실 그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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