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시스템에 불이 났다고 한다.
뭐.. 대목인데 월요일날 민원폭주하겠구만,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 좋은 주말에 단체카톡이라는 것이 와서, 무슨 백프로 수기접수를 한다는 둥, 예전 전산서버를 쓴다는 둥 , 그걸시험해 보기 위해 내일! 일요일에 테스트해봐야하니 출근을 해아한다는 청천병력같은 소식이 쏟아졌다.
일이란 무엇인가. 학창시절엔 일이 자아의 반영이자 꿈의 실현이라고 교육받았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한다는 환상, 생계유지와 자아실현의 합체가 진정 의미있는 일이라는 직업관. 사농공상의 신분이 분명하던 시절에는 하지않았을 고민에 사로잡혀 낭비한 청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패하고야 마는 그 이상적 직업관은, 낙타가 대가리를 집어넣는 바늘구멍이자 현대인이 쫓는 거대한 신기루이자 거짓말이다.
일은 일이다. 인간은 일을 통해 자아실현같은 걸 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니다. 애초에 자아실현이라는 추상적인 충만감은 비물리적인거고 , 일은 근원적으로 물리적이다. 아예 속성 자체가 다르다. 무슨 가내 수공업으로 자급자족해서 자기 손으로 만들어서 자기 입으로 들어가는 시대라면 오히려 자아실현에 가까울 수 있으나, 피고용인이 누군가의 목적에 고용되어 어떤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 아닌가? 고용인이 피고용인에게 주말에 나오세요 라고 했을 때 "아! 오늘도 내 자아가 더 고양될 기회다! 충만하다! 시발 너무 좋아 책임감을 느끼는 성숙한 나!!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미친놈이 세상에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보통의 인간 노예들은 대부분 이런 생각을 한다 ."ㅅㅂ 좆까 진짜..."
자아실현이란 일부 창조적인 직업을 가진 자유인들에게나 꿔볼 수 있는 꿈일 뿐, 대다수의 사람에게 일은 뭐랄까 등뒤에 매달린 십자가같은 거다. 자기가 잘 집을 온몸에 지고 다니는 달팽이처럼, 무거운데 내팽개칠 수 없는 숙명. 혹은 조상님들 말대로 목구멍이 그냥 포도청인거다.
책임감. 우리가 갖는 직업적 책임감이 인간고유의 미덕인지, 모범적 근로자를 양성해 내기 위한 교육의 소산인지 나는 모르겠다. 태초의 인간이 뭘 얼마나 어디까지 책임졌는지는 모르겠으나, 예로부터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놈들이 있었던 건 확실하다. 내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없는 재앙에 뭐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교육의 힘이란 무서워서, 혹은 목구멍은 그 자체로 권력기관이라서 뭔지도 모를 책임을 분담하는 심정으로 꾸역꾸역 욕하면서도 주말에 기어나가겠지. 지금 이순간에도 충혈된 눈으로 자기 잘못이 아닌 것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는 일깃장에 이렇게 벼락처럼 날아든 책임의 무게에 욕을 휘갈기고 있고, 또 누군가는 피해자가 되어 잠못이루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삶은 보이지 않는 연결회로로 낯선 이들의 접점을 만들고, 우리는 각자 다른 곳에서 다른 삶을 살다가 어느 한 지점에서 삶의 교차점을 지날 것이다. 생은 드라마틱한 사건들로 구성된 잘 짜여진 하나의 스토리가 아니다. 무수한 집합들로 이루어진 복잡하고 무의미한 겹침의 연속일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인과관계를 가진 하나의 이야기로 여기고 싶은 인간적인 충동을 느끼겠지만, 어느날 문득 뻥 하고 터지며 발산된 우연의 파편들만이 생의 본질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