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닥 거창할 것도 없는 계획이였는데

by 기묘염

소중한 휴일이 저물어간다.

오늘의 계획은 영화도 보고, 카페에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신문을 보고 책도 보고,또 .. 뭐 여튼 알차디 알찬 계획이였으나, 계획은 계획일 뿐. .

어깃장이 나니까 계획이지.


일단은, 아침에 눈을 뜨는 시간부터가 맘처럼 될리가 없다. 허둥지둥 일어나서 쫓아내 듯 유치원에 보냈다.밥을 더달라는 아이의 요구를 냉정하게 무찔렀다. 대충먹자 소크라테스여.

등원 후엔 집에와서, 전쟁터같은 식탁을 정리하고(우리집 소크라테스는 요란하게 먹는 편이다.) , 설거지를 하고, 산더미같은 빨래를 돌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해도 티도 안나지만 안하면 난장판인 집구석을 대충 치웠다.

나는 완전 기계치지만, 전후 베이비부머세대인 엄마아빠에겐 거의 빌게이츠이므로, 아이패드를 초기화해달라는 무리한 요구를 붙들고 씨름하다보니 반나절이 후딱 같다 . 급히 영화 시간을 찾아보았으나 아이의 하원시간에 맞출 수가 없어 천년만에 영화보기는 포기했다. 대학교땐 하루에 두 편 세 편씩 영화를 보느라 밤을꼴딱 세웠었는데, 나이가 들 수록 영화를 보는게 어려워진다. 아마도 한정된 시간동안 포기해야하는 수많은 기회비용들을 따지다보면, 영화의 러닝타임이 너무나 길게만 느껴지기 때문일거다. 특정 연령층에 어떤 문화를 향유한다는 것은, 진정 계급의 문제다. 누구에게나 총 시간은 똑같이 주어지지만, 생계를 위해 시간을 팔아야 하는 노동자들에게 문화란 단순히 입장료의 문제가 아니다.

첫번째 계획인 영화보기가 틀어졌지만 나에겐 오후가 있다. 신상 카페에 가서 갓구운 베이글에 아메를마시며 우아하게, 책도 읽고 일기도 쓰려고 노트북을 야무지게 챙겨서 나갔다. 내가 간과한게 있다면, 첨단의 주차난이다. 카페 주변을 세바퀴를 돌고 돌아 간신히 주차를 하고 카페로 들어갔다. 평일 오후에 베이글에 커피를 마시며 우아하게 수다떠는 사람이 그렇게 많은 줄 몰랐다. 웨이팅도 웨이팅이지만, 카페에 자리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거 포장해서 근처에 아는 언니 일하는데 베이글 좀 갖다 주자! 긴 웨이팅끝에 마침내 쇼핑백을 두개로 나눠들고, 언니의 일터로 갔는데 맞다 첨단의 주차난을 또 간과했다. 주차하는데 이십분이 또 걸렸다. 빵을 사서 전해주고 왔떠니 벌써 네시가 넘었다. 나는 아침에 치운 식탁위에 베이글을 펼쳐놓고, 이제야 노트북을 켜고 일기를 쓴다. 내가 스스로 타먹는 커피는 어쩐지 향이 덜해서, 조금 덜 우아하게 느껴진다. 아이의 하원시간이 .. 음.. 30분 남았다.


지금 이순간 일기를 쓰며 내가 하는 생각은 이런거다. '아 , 그래도 양심적으로 집에서 하루 쉬었는데 저녁밥은 내가 준비를 해놔야하나?! 안그래도 어제 냉장고에서 얼음 찾다가 집에서 살림이라곤 손을 안대니 얼음이 있는지 없는 지도 모른다고 한소리 들었는데. 아닌가, 준비한다고 난리치다가 주방만 어지럽혔다고 더 소리듣진 않을까. 그냥 오늘도 사먹는편이?! ' 모르겠다. 그냥 하루 쉰다고 쉬었을 뿐인데 왜 부채감이 드는 걸까. 심지어 하고 싶은 건 하나도 못햇는데. 이 한몸 온전히 맘 편하게 쉴 수 있는 환경이 안된다. 우리의 풍요는 정말로 풍요일까. 자유로운 현대인은 대체 무엇으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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