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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기묘염 Mar 02. 2022

방구석 공리주의자

남편은 티브이를 좋아한다.  좋은 건 나누는 다정한 성품 덕에  나도 이제 회사에 가면 어제 본 드라마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합류할 수 있게 되었다.

결혼 전엔, 티브이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땐 뭘 하면서 저녁시간을 보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지금은 아이를 재우고 나면 티브이 앞 소파가 내 아이맥스 지정석이다.  아이가 태어나고부터는 우리는 늘 시간이 부족하다.  새로운 드라마는 점점 많아지고 다양한 플랫폼에 나가는 정기구독료도 늘어나는데 또 꼴에 보는 눈들은 까다로워서 진입장벽을 넘지 못하고 일화만 보고 만 드라마들이 수두룩하다.  그 소중한 시간에 어떤 것도 포기하지 못해서  남편은 드라마를 보면서 한 손엔 휴대폰을 들고 유튜브를 동시에 보고,  나는 휴대폰으로 그날의 이슈들을 찾아본다.  동시에 입으로는 그날 있었던 일들을 끊임없이 말한다. 각자의 직장동료 이야기를 하고 ,  오늘 목격한 이상한 사람들을 소개하고, 아이가 오늘 뭘 했는지를 이야기한다.  

만약 아이를 재우고 나서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자기 세계에 빠진다면, 우리는 말 그대로 육아공동체가 될 것만 같다.  단지 한 공간에서 지낸다는 것만으로 가족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어쨌든 서로의 시간을 나누고,  생각을 나눌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산만한 이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기 전에 침대에 누우면 머릿속이 전혀 정리되지 않는다. 아까 본 드라마,  핸드폰으로 읽었던 기사,  서로가 나눈 대화가 섞여  아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무것이 된다.  자고 일어나면 감사하게도 또 아침이다.  나는 뭐가 뭔지 모른 채로, 아이를 준비시키고 나도 준비하고 회사에 나가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보낸다. 뭣도 아닌 채 잠이 들고 뭔지 모른 채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씹지도 않고 꿀떡꿀떡 삼키는 이 시기가  지나가면 언젠가 좀 더 평화롭고 여유로운 시간이 찾아오긴 하는 걸까?  이게 과연 시간 때문 이긴 한 걸까?  좀 무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요즘 내가 보고 있는 드라마는,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 과  소년법정이다.  

하루는 유영철 사건을 봤다가 하루는 초등생 살인 사건을 보고 동시에 휴대폰으로 우크라이나 전쟁 기사를 클릭했더니  마음이 피폐해진다.  연쇄살인을 하고도 하등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과, 여덟 살짜리 아이를 살해한 미성년자와,  자기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도 수만 명을 전쟁 속으로 빠트려 죽일 수 있는 늙은이 중 누가 가장 역겨운 지  잠깐 고민해 봤다. 잘 모르겠다. 세명이 모두 같은 조건 같은 위치 라면 셋다 똑같은 짓거리를 했을 거 같긴 하다. 누가 더 역겨운지는 잘 모르겠는데,  지금 한 명을 없앨 수 있다면 한 명을 선택할 거 같다.   어쨌든 저것들이 쓰나미라고 한다면 범위가 좁을수록 피해가 적지 않겠나. 아, 인간의 목숨을 놓고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내가 싫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니 그딴 게 고통받는 개인에게 무슨 위로가 된다고. 앞으로 이딴 저열한 비교는 안 해야겠다. 실제로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우크라이나의 전쟁난민들을 대하는 유럽의 태도는 좀 놀랍다. 처음엔 인류애가 충전된다고만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목숨도 값이 매겨져 있다는 것이 씁쓸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헝가리에서 우크라이나의 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이고 있지만, 우크라이나에서 일하던 외국들이나 다른 인종들은 일단 보류라고 한다. 어떤 재난도 모두에게나 같은 재난은 아니다. 어떤 전쟁도 같은 전쟁은 아니다. 심심하면 팔레스타인에 폭탄을 퍼붓는 이스라엘에게 세상은 어마나 관대한가. 세상은 팔레스타인에게 아프간인들에게 시리아의 전쟁난민들에게 똑같은 관대함을 보여주지 않는다. 식민지였던 조선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던 것처럼, 사람의 목숨 값은 동등하지 않다. 살인자의 피해자들에게 공리주의적 관점을 들이댄 나의 저열함만큼이나 세상의 잣대 역시 언제나 냉정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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