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막, 어린이집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는 카톡이 왔다. 다들 일단 자가 키트 해보라는 내용과 함께 제발 부모님들 증상 있으면 아이들 등원 멈춰주시고 남의 아이도 내 아이처럼 소중하게 생각해 달라는 내용의 장문의 카톡이었다. 원장 선생님의 당황스러움이 느껴지는 글이었다.
아직 두 살 세 살인 아이들이 코로나에 확진된다는 건 부모로서도 엄청나게 당황스럽고 속상할 일이고 부모가 아니어도 대단히 안타까울 일이다. 하지만 이미 이렇게까지 확산된 이상, 확진자가 나왔다고 한들 어린이집 탓을 할 수도 없는 거고, 걸린 아이의 부모 탓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은 질병이란 걸리고 싶어서 걸리는 것도 아니고, 조심한다고 해서 언제나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 후의 대처방식이, 단지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어서 일부러 어린이집을 보냈거나, 본인의 할 일을 모두 하고 다녔다면 손가락질받아 마땅한 일이긴 하지만, 그 또한 악의가 있었다기보다는 그저 본인은 아닐 거라는 막연하고 안일한 기대, 뒷일을 조금도 예측하지 못하는 빈곤한 상상력,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보통 수준의 이기심과 뛰어날 것 없는 지적 수준이 합쳐지면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우리 회사에도 확진자가 폭증했고 남편회사에서는 확진자가 폭발했다. 확진되면 일주일간 격리이기 때문에 그 일주일간은 남은 사람들이 모든 업무를 해내야 하는 상황이다. 이쯤 되면 남은 사람들 입장에서는 코로나에 걸리는 편이 더 나은 게 아닐까 하는 타당한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자 이 상황에서 우리는 평소에 몰랐던 사람들의 면모를 확인하게 된다. 확진되기까지의 과정과 사후 대처능력으로 보여주는 도덕성과, 남은 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누구의 탓을 하는가로 보여주는 인내심과 인격을 확인할 수 있다. 이쯤 해서 우리가 한 번쯤 생각해 봐야 할 것은, 도덕성도 인간성도 다 뇌에서 처리하는 일이고 사회적 감수성 또한 마찬가지일 터 , 뇌에서 처리하는 모든 일은 그 인간의 지적능력이라는 점이다. 도덕성도 인내심도 인간성도 지능이다. 굳이 내가 머저리라는 것을 남들에게 광고할 필요도 없지만, 나와 함께 일해야 하는 타인이 머저리라는 사실을 아는 것도 장기적으로 봤을 때 썩 기쁜 일은 아니다. 이디오 크러쉬라는 영화가 있다. 어째서 인류는 점점 머저리가 되어가는가에 대한 영화였던 것 같은데 요즘 같은 전염병과, 환경오염과 심지어 전쟁의 시기에 종종 떠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