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이 내려온다.

님하 그 산에 머물러 주오

by 기묘염

연말을 맞아 청장님이 우리 국으로 방문하신다는 공지가 내려왔다. 정확히 오신다는 날짜의 4일 전에 공지가 내려왔고, 공지가 내려온 이후 4일은 그 전 4일과 같지 않았다. '청장' 혹은 뭐 기관장, 회장, 두목 , 대장 , 높은 사람, 권력자, 감사원 등등 얼추 비슷한 이 범주의 이름들을 단 하나의 단어로 포괄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

'일거리'다.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거리" "쓸데는 없으나 신경 써야 하는 일거리" "굳이 안 해도 되는데 만들어진 일거리" "지속 가능하지 않고 일시적인 보여주기 식의 일거리" 정도로 나뉠 것 같다. 그러니까 우리는 안 그래도 바쁜 연말에 4일 후 일거리가 온다는 공지를 받았고, 4일간 그 일거리가 끈질기게 우리를 따라다녔다. 일거리가 방문한다는 바로 그날에는 아침부터 문제의 '주변정리'가 핵심 키워드가 됐는데, 출근하는 그 순간부터 '아아, 오늘은 청장님이 오시는 날입니다. 4시쯤 오신다고 하니 모두들 자기 주변을 정리해 주세요'라는 단체 카톡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나의 상사들 사이에 감도는 이상한 흥분과 긴장감의 이유를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찰나의 순간 잘 보여서 승진을 해보겠다는 건가? 아니면 찰나의 순간 찍혀서 출세길이 막히기라도 한다는 건가? 글쎄 나로서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초면의 청장님이 들어와서 어이 자네 책상과 서랍 사이에 있는 서류뭉치가 가지런하지 않군 자네 좌천! 한다거나, 반대로 어이 자네 쓰레기통과 책상 사이의 각 잡힌 각도가 너무나 마음에 드는군 자네 승진! 혹은 어이구 과장님 사무실에 먼지 한 톨 보이지 않는 것이 다 과장님의 세심한 관리감독 덕분이군요 저랑 같이 청에 들어와서 일해보시지 않겠습니까. 하는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질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과장과 실장급들은 이 추운 날씨에도 3 시 40분부터 칼바람이 부는 주차장 입구에 마중을 나가 있었다. 약속의 그 시간이 되고 비장함마저 감돌았으나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옳지 그래야지! 약속을 잘 지키면 권력이 아니지!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자기 힘의 우열을 알아보고 싶다면 그저 약속에 삼십 분쯤 늦어보면 알게 된다. ) 모인 사람들의 입술이 파랗게 변할 때쯤 마침내 그가 도착했다. 당일에는 왔으니 과연 듣던 대로 괜찮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파래진 입술로 화사하게 웃으며 그를 맞았다. 왜 늦었냐는 불평이나 늦어서 미안하다는 인사치레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야 당연하다 누가 이 날씨에 밖에 나와있으랬나 추우면 들어가면 그만이지.


범은 내려왔고, 작은 짐승들은 그들의 시간을 버텨냈다.


그는 회진을 도는 의대 교수처럼 수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우리 앞을 스쳐갔다. 우리의 주변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글쎄 그의 눈에 우리의 주변이 보였을지는 의문이다.


그는 영업과로 가서 들어오는 고객들에게 5분 정도 마스크를 나눠주고, 그 장면을 사진기로 수십 번 정도 찍은 뒤 만족할만한 사진이 나오자 돌아갔다. 우리가 그에게 보여줄 것은 정돈된 주변밖에 없었는데 , 그가 찍은 그 사진은 또 누구에게 보여줘야 하는 그의 '일거리'였을까? 순간, 어릴 때 과학책에서 본 먹이사슬의 가장 넓은 부분. 그 속의 플랑크톤이 되어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장학사가 오면 전교생이 엎드려 왁스칠을 하던 그 시절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나. 기어 다니며 다 같이 낄낄대던 그 시절은 이미 졸업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풍문으로 들었소의 한 장면처럼 무리 지어 런웨이를 한 바퀴 하는 동안 다들 자리에서 일어서서 공손한 인사를 바쳤다. 그의 시선도 닿지 않는 곳에서 공손한 인사를 올린 우리들은 서로의 시선에 닿지 않도록 눈을 내리깔았다. 우리 사이에 공유되는 그 부자연스러운 찜찜한 수치의 눈빛을 교환할 용기가 나에겐 없기 때문이다. 이상한 모멸감 속에 나는 나의 시간을 버텼다. 범은 돌아갔고 작은 짐승들은 살아남아 다시 자기의 시간을 살아간다.


어쨌든 저나 나나, 먹고살자고 하는 일 아닌가.


공교롭게도 새해는 호랑이 해라고 한다. 나는 이 연말에 이미 호랑이를 영접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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