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마트에서 계산을 하다가 계산대 옆에 쟁여진 야채호빵을 봤다. 다분히 의도를 가진 진열 방식임을 알지만 나의 충동은 자본주의의 의도에 잘 순종하는 편이므로, 별다른 저항 없이 호빵을 샀다. 애를 재워놓고 열시 반에 호빵을 쩌먹었다. 먹는 내내 나는 사실 야채호빵을 좋아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되새김질하며 여물 먹듯 질겅질겅 호빵을 씹었다. 차라리 만두나 먹을 걸 과 그냥 먹지 말걸 사이의 어디쯤에서 호빵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누가 언제 무엇을 어떻게 왜 ?! 내가 오늘 밤 야채호빵을 맛없게 왜?! 먹었을까. 제 입으로 들어가는 손바닥만 한 밀가루 덩어리 하나도 억제하지 못하는 게 인간인데, 나는 평소 인간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특히나 나 자신에게. 스스로를 너무 과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후회와 자괴감이 공복도 아닌 위장 틈을 비집고 들어가고 있다. 이 더부룩함의 정체가 호빵인지 감정인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아이가 독감에 걸렸었다. 엄마 아빠도 걸렸고 애도 걸렸고 남편도 감기에 걸렸는데 나만 안 걸리다니. 내 면역력이 드디어 일을 하는구나 싶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기분이 더럽길래 직감했다. 내 면역력이 일을 할리가 있나. 해열제를 먹었는데도 열이 삼십팔 도를 넘어가고 있다. 뜨거워진 호빵이 갈 길을 잃고 들어갔던 곳으로 다시 나올 것 같다.. 역시 먹을까 말까 할 때는 안 먹는 게 맞다.
나는 요즘 심리적으로 좀 힘들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인데 언어가 모자라기보다는 설명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굳이 설명을 하고 나를 납득 시키고 감정에 정의를 내리고 다듬어서 곱씹는 것보다는 그저 아 기분이 더럽고 별로고 힘드네 하고 대충 구겨 넣고 지나가버리는 편이 살아가는데 더 수월한 길임을 아는 나이다. 머릿속에 직관적으로 ㅆㅂ 이 떠오르면 그건 들여다봐야 할 심연인 경우보다 피해서 돌아가야 할 돌부리인 경우가 확률적으로 더 많다. 왜냐면 나의 얄팍한 마음에 심연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인간이 서른다섯이 넘어가면 그때부턴 자의식 과잉을 조심해야 한다. 나는 우연히 태어났고 아직 안 죽었으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안에서 삶의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는 거야 고맙게 여기고 기꺼이 누릴 일이지만 내 삶에 굳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나 자신을 실재보다 과대평가해서 가벼운 영혼에 걸맞지 않은 우아한 가치를 매겨 스스로와 타인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너무 희망적인 언어로 설날을 맞이하고 있지 싶다. 특별히 부정적인 사람은 아닌데 긍정적인 사람도 아니라서 그렇다. 그럼에도 막상 일상을 살아갈 때는 의외로 긍정적이고 무던한 부분이 있어서, 일이 잘 되면 되는대로 아니면 아닌 대로 그닥 개의치 않고 그럭저럭 잘 산다. 그런 긍정적인 부분들이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일도 있지만 사람이 면면히 긍정적이기만 하거나 부정적이기만 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새해라고 딱히 별거 있나. 그냥 피할 건 피하고, 맞설 건 맞서면서, 되는대로 그럭저럭 잘 지나가는 게 내 목표다. 생은 이겨내고 나아감의 문제가 아니다. 견뎌내고 받아들임의 문제다. 극복의 문제가 아니라 체념의 문제이며 한걸음 내닫는 것이 아닌 한 발짝 물러남의 문제다. 그럼에도 물러나듯 견디다 보면 어느 날 문득 한 두 걸음쯤 앞으로 나아가져 있는 것이 생이 주는 선물이 아닌가 싶다. 오, 이게 내가 오늘 이끌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긍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