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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상종자의 평범한 하루

by 기묘염

간만에 통목욕을 하던 아이가 거품 속에서 해맑게 물었다.

"엄마 지구에는 중력이 있잖아. 근데 왜 물에서는 몸이 뜨지?" 아무 생각 없이 "그야 부력 땜에.." 하다가 문득, 이건 기념비적인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섯 살 아이들의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작은 머리통 속에 들어있는 지성의 씨앗들이 어떤 순간 어느 지점에서 다 밟혀버리는 걸까. 궁금한 것이라곤 달력 위에 표시된 공휴일 숫자밖에 없는 나 같은 어른으로 자라지 않게 하려면 어느 지점에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까 하는 고민이 되는 순간이었다.


아이를 키우면서 경이를 느끼는 순간은 고등 생물로의 도약을 느끼게 하는 지적 활동의 징후를 포착할 때다. 미숙한 농담을 던지고 기쁨을 표현할 때 느껴지는 유머감각, 실수로 발을 밟자마자 앗 미안! 하고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사과, 밥 먹고 과일을 건네주면 무심하게 고마워라고 말하고 받아들 때, 모르는 단어를 물어보고 다음번엔 그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는 모습, 소소한 질문에 과학이나 철학의 싹이 깃들어 있을 때, 성장하는 작은 인간을 통해 우주의 작업을 확인하는 듯한 신비를 느낄 때가 있다.

물론 이런 기적을 거처 그렇고 그런 평범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 뿐이라 할지라도 누구나 날 때부터 구제불능은 아니었다는 소소한 증거로 여긴다면, 내 인생을 피곤하게 만드는 지겨운 인간들에 대해서도 약간은 관대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도 나를 그 정도로 여겨주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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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종일 아이랑 놀고 함께 있었는데, 머릿속으로는 단 한순간도 집중하지 않았다. 온갖 다른 생각들로 꽉 차 있는데 대부분은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니다. 실제로 일어났었던 일을 기반으로 한 이런저런 상상?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 하는 공상? 전엔 이런 게 인간의 머릿속에서 당연하게 일어나는 일이고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은 줄 알았는데, 엠비티아이 신봉자인 어린 직장 동료가 사람을 유형별로 구분하는 걸 듣고 나서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엠비티아이가 인프피인데, 그게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으나 대충 들려주는 얘기를 종합해 보니 한마디로 망상 종자라는 뜻이었다. 근데 그 망상 종자가 내 머릿속을 설명하는 너무나 정확한 용어여서 요새는 타인의 마음을 유추하는 일이 전보다 어렵다. 예전에는 인간이 다 똑같지 뭐. 다들 비슷한 생각 비슷한 감정으로 살겠지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은, 나는 망상 종자지만, 저자는 육체와 영혼이 발붙인 땅에 혼연일체 되어있는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라서 나와는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써놓고 보니 마치 세상에서 나만 내면을 가지고 있는 인간처럼 말한 거 같다. 내 말은 그냥, 나랑 저 사람의 생각이 다르고 정말로 유형별로 인간이 너무나 상반된다면 도대체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일이 애당초 가능하기는 한가하는 쓸데없는 고민이 든다는 거다.

아 이런 게 바로 망상 같은데....

엠비티아이바꾸는 방법 같은 건 없나??

모르겠다. 머릿속에 한번 밟히는 일이 있으면 무슨 인셉션처럼 수백 번 들락 거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팽이가 계속 돌아가고 나비가 난지 내가 나비인지. 현실인지 꿈인지 망상인지 구분하느라 인생을 몽땅 허비하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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