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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건 뭐다?

by 기묘염

잊을만하면 위염이 찾아온다. 보통은 그냥 속이 좀 쓰리거나 메스껍다가 한 일주일 정도 약국에서 약을 사다 먹으면 괜찮았는데 갈수록 기간이 길어지고 증상이 심해진다. 이번에는 평소처럼 가벼운 위염으로 시작해서 위 전체가 불타는 것처럼 뜨겁더니 왼쪽 옆구리에 통증이 있다. 숨을 쉬면 갈비뼈가 배를 뚫고 나올 것 같아서 참다못해 회사 앞 내과에 갔는데 수요일 오후는 문을 닫는단다. 상가 건물 일층에 있는 약국은 병원 따라 문을 닫았다.

다시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큰맘 먹고 다른 약국까지 걸어갔다. 사무실 슬리퍼 사이로 눈 덩어리들이 들어왔다. 왼쪽 손으로는 과장된 티브이 광고처럼 옆구리를 부여잡고, 질척거리는 슬리퍼에서 튄 흙탕물이 종아리에 범벅이 된 채 한 블록 건너의 약국 문을 여는데 뭐랄까 문명이 나를 짓누르는 느낌이랄까. 위통에 시달리는 현대 직장인이 지을 법한 가장 무기력한 표정을 지으며 내 증상을 설명했다. 예의 바르고 형식적인 증상 설명이었지만 얼굴에는 당장 뒈지지 않을 정도면 얼마나 아프든 일하러 들어가는 건 마찬가지니까 대충 견딜만한 약, 알죠?라고 써두었다. 물론 현대인을 상대하는 약사 선생님다운 노련함으로 커피 밀가루 등 노동자가 감당하고 누릴 수 있을 법한 얼마 안 되는 낙은 모두 포기해라라는 내용의 주의 사항을 설명해 주셨지만 얼굴에는 어차피 먹지 말라고 하는 거만 골라서 처먹을 거 다 아니까 약이나 제때 챙겨 먹어라 하는 체념이 깃들어 있었다.


어딜 가나 어떤 거대한 무기력함이 우리를 잠식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모두 알면서 속고 속아주는 거대한 사회적 연극을 수행하는 것만이 서로의 존재를 존중해 주는 유일한 증거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나는 낯선 사람들에게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고 노력하는 편인데 때론 친절이란 내용보다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결국 우리는 모두에게 진심일 수 없고, 서로에게 지옥이 되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형식을 지키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다.


뭔가를 쓰고 있는 지금도 배가 아프다. 옆구리에 핫팩을 대고 손바닥만 한 온기에 의존하고 있자니 나약하고 외로운 기분이 든다. 약효가 아직 나타나지 않는 건지, 아니면 오늘 종일 홀짝거린 거대한 커피 강의 급류에 약이 휩쓸려 떠내려가 버린 건지 모르겠다. 왜 먹지 말라면 더 먹고 싶나. 뒤돌아보면 돌 된다고 하면 뒤돌아보는 게 인간이다. 돌이 되는 것보다는 먹지 말라는 거 먹는 게 쉬워서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먹지 말라는 열매 좀 따먹었다고 몇천 년간 온갖 욕을 먹은 xx 염색체는 커피를 참는 게 쉽지 않다. 그 언니는 선악과도 먹었는데 커피가 대수야?


눈이 계속 내려서 요새 출퇴근이 어렵다. 아침에 눈 뜰 때마다 커튼을 열고 밖에 쌓여있는 눈을 보면서 생각한다. 아.. 너무 늦게 일어났네.

좀 일찍 일어나서 눈 상태를 보고 일찍 나가야 되는데 일어나는 시간은 똑같으면서 굳이 창문 보고 눈이 많이 왔네 어쩌나라고 말하면 마음이 좀 편해지는 거냐고 남편이 물었다.

이래서 사람은 몇 년을 같이 살아도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어려운 건가 보다.

마음이 불편했던 적이 없는데 편해질 리가 있나. 그냥 형식상 눈을 인지하는 것뿐이다. 중요한 건 내용보다 형식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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