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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세상에 솟아날 구멍

by 기묘염

약국에서 산 위장약을 일주일 가까이 먹었더니 이제야 옆구리의 통증이 가라앉았다. 통증이 가라앉기 무섭게 과한 식사를 했다. 아무리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지만 이 정도면 그냥 동물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들었다. 망각이라기보단 유턴과 함께 기억을 상실하는 금붕어 대가리에 더 가까운 속도가 아닌가. 반사 신경보다 기민한 식욕이라니. 구석기 시대에나 좀 봐줄 만한 재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집 앞에 새로 생긴 샤브샤브집에 자주 간다. 미나리를 살짝 데쳐서 초장에 찍어 먹으면 이성을 잃는다. 뭐랄까 죄책감을 상쇄하는 진한 야채의 향. 산더미처럼 쌓아와도 끓는 물에 들어가면 한 줌 으로 변하는 덧없는 부피감에 나도 모르게 몇 바구니를 정신없이 먹다 보면 식탁에 앉을 땐 인간이었으나 일어날 땐 코끼리로 변해 만족감에 귀를 늘어뜨린 채 네발로 걸어 나가게 된다.

미나리를 열 번 정도 리필해오면서 엄마가 말했다.

"샤브샤브가 엄청 몸에 좋대. 야채를 데쳐서 먹으니까."

샤브샤브에 고기를 몇 번 추가했는지는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다만 샤브샤브를 먹다 배 터져 죽은 귀신이 있다면 그런 말을 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뭐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죽은 귀신은 피부에서 광이 날 수도 있고.



주말이고 해서 간만에 문화의 전당에 갔다. 아침에 갈 때 어떤 커다란 전광판 달린 차가 거리를 막고 무대 같은 걸 준비하고 있었고 소수의 경찰이 나와서 거리를 통제하고 있었다. 집회를 하나 싶었는데 집회라기엔 그런 분위기나 규모가 아니어서 이상하다 개인 방송 같은 건가라고 생각하면서 지나갔는데 집에 돌아가는 길에 보니 한 줌의.. 한 줌이라기엔 좀 더 많고, 여튼 애매한 인원이 모여서 집회를 하고 있었다. 신호등을 기다리면서 얼핏 그들이 들고 있는 피켓을 봤는데 no china라고 적혀있었다. 뭐 한국어로 중국인 아웃이라고도 적혀있고 해서 저게 도대체 무슨 시위지 정체를 모르겠네 하고 전광판을 봤더니 탄핵 반대 시위였다.

지역이 지역이니 만큼 전일빌딩과 구도청이 눈앞에 보이는 거리에서 이게 무슨 조상님 묘 헤집는 일인가 싶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고 다양한 의견이 있으니 집회야 얼마든지 한다쳐도 탄핵 반대와 중국인 아웃이 대체 무슨 상관인지 나의 작디작은 뇌는 도저히 저걸 연결할 만한 시냅스를 갖추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뿐만 아니라 그들이 들고 있는 손팻말들이 하나같이 나한테는 좀 생소했다. 팻말들 사이에 전혀 개연성이 없어 보였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의 손 팻말을 이해하고 있을까? 혐오와 혐오는 통한다고 결이 같으니 그냥 한자리에 앉아서 다른 얘기를 하고 있나? 내가 잘 모르는 끈끈한 감정 교류의 세계가 있는 모양이다. 다들 자기 하늘 보고 사는 거라지만 무너지는 하늘에 솟아날 구멍은 있는가.라는 아주 비관적인 의문이 들었다.


아이는 집에서 나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유치원 친구들에 대한 얘기를 늘어놓는다. 누구는 이랬어 누구는 이러더라 하면서 나름대로 분석과 평가를 하곤 한다. 가끔씩은 아주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이렇다.

"엄마 여자 친구들은 여자 친구들끼리만 놀고 남자친구들이랑 잘 안 놀아줘"

"그래? 같이 놀자고 해봤어?"

"응 같이 놀자고 하면 놀아주긴 하는데 평소에는 여자친구들끼리 거의 놀아"

"왜? 여자친구들하고 남자친구들하고 노는 게 좀 달라?"

"응 여자친구들은 말을 잘 들어줘. 근데 남자 친구들은 말을 해도 아무도 안 들어."

"왜 말을 안 들어주는데?"

"다들 큰 소리로 서로 얘기해서 들어주고 기다려줘도 차례가 안 와."

오.. 엄마는 그거 취업하고 나서야 알았는데 너는 진짜 지니어스..

"그러면 너도 친구들 말을 잘 들어주면 여자친구들도 같이 놀자고 하지 않을까?"

"맞아. 그리고 여자친구들은 더 똑똑해. 그리고 특히 지연이는 나보다 똑똑하고 귀여워. 베스트 프렌드 하고 싶어."

오.... 오호라.


세상이 이상하게 느껴질 때마다,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는 팻말을 든 사람들이 5.18 항쟁지인 총알구멍 선명한 건물 앞에서 거리를 점거한다거나 하는 상상도 못했던 일을 목격하게 되는 이런 날이면 나는 절로 내 앞에 있는 작고 귀여운 존재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똑똑한 여자친구들과 베스트 프렌드 하고 싶다는 6세 남자아이가 언제부터 여성의 똑똑함에 적개심을 갖게 되는지. 사회적 약자를 인정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약자의 자리에 놓고 자기 연민에 빠져 허덕이게 되는 인간들이 어떤 손팻말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되는 건지. 아이가 맞게 될 미래에 정치적 올바름이란 어떤 의미가 될 것이며 어떤 방향을 향해 나아갈지, 그 안에서 인간이 망가지거나 뒤틀리지 않고 인간성을 적절하게 유지할 수 있을 것인지. 무너지는 세상에 솟아날 구멍이 있을 것인지. 세상이 무너지는데 솟아나는 게 무슨 의미나 있는지. 이 와중에 출생률을 늘려야 한다는 구호가 얼마나 공허한 울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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