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선택지가 있다면 글을 쓰며 살고 싶어
글쓰기의 꿈 16
망설임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은가.
어떤 일에 시간을 쏟고 싶은가.
어떤 일을 할 때 가슴이 뛰는가.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동료들과 어떤 대화를 하며 어떤 직장에서 일하고 싶은가.
나는,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가.
비슷한 류의 질문을 끊임없이 던졌던 적이 있다. 똑같이 힘들다면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똑같이 얼마 안 되는 돈이라면 무슨 일을 하며 돈을 벌고 싶은지. 답은 진작에 나와 있었다. 수많은 질문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였다.
답은 나온 지 오래였음에도, 나는
자신이 없었다. (잘 해낼 자신이 없는 건지, 내 능력에 대한 불신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하고 있는 일이 있었다. (지난 몇 년 간 글쓰기를 두 번째로 미뤄온 관성 때문일까)
뭐라 설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누구를 왜 설득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가진 것을 놓을 수 없다. (가진 것의 무거움인가)
글로 최소한의 사회적 성취를 이루기까지 소요될 시간이 너무 길다 생각했다.
무엇보다 겁이 나서.
두렵기 때문에.
겁나는 것이 많았다. 걱정거리 투성이었다.
그저 잘하는 것을 칭찬받아도 기쁘다. 그 즐거움을 안다. 그러나 진심으로 원하는 것을 할 때, 정말 잘하고 싶을 때, 진실로 인정을 원할 때 만약 이뤄내지 못한다면 이를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단지 열심히 하는 것에 내가 만족할 수 있을까? 외부로부터의 반응을 욕심내지 않고, 불충분한 인정에 수긍할 수 있을까?
그동안 겪어 온 바, 내가 주어진 시간은 단 한순간이 아니었다. '지금'의 내 감정으로 내릴 결정과 그로 인한 변화를 긴 시간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사람이 계속 달릴 수만은 없다는 걸 알았고,
온전히 나를 던진 만큼 비례하여 돌아올 무거움과
멈추었을 때 나를 지탱할게 더는 남아 있지 않으리라는 공포, 그리고
불안함에 사로잡힌다면 그땐 내가 결코 글에 집중하지 못할 것을 알았다.
무엇이 날 머뭇거리게 하고 나아가지 못하게 잡아끌었냐 하면, 무엇이 그리 날 망설이게 했는지 묻는다면,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얻어낸 답에도 나를 머뭇거리게 한 것은 '확신'이었다. 누구도 주지 못할 확신을 나는 구했다.
100%는 없다
타고나길 소심한 성정과 현실을 우려하는 나의 특성을 고려하면 이런 망설임도 충분히 이해 가능한 영역에 있다.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마음먹었더라면'라는 식의 이뤄질 수 없는 가정을 하지 않아도,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했던 나를 이제는 이해한다. 눈에 확연히 보이는 길을 가려했던 건 탄탄대로를 걷겠다는 명예욕 때문만이 아니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안다. 작은 스트레스에도 취약하며, 본위의 안정감을 느껴야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한다.
발을 디딘 이 땅이 흔들림 없이 단단하길 바랐다. 작은 것 하나도 예상 안에서 움직이는 통제된 상황이 답답하기보다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되려 안정감을 느꼈다. 쉬이 흔들리기에 더 흔들리고 싶지 않았으니, 호오의 문제보다 생존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100% 확신하고 뛰어드는 일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과연 있기는 할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는 게 낫다고, 무턱대고 해보라는 막무가내식 권유를 감히 내가 하진 못한다. (솔직히 내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라서..)
'도전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없다'라는 다소 진취적인 사상까진 아니더라도 (우연히 얻는 것도 있을 수 있잖아?) 100%의 확신을 바란다면, 안전하다 못해 지나치게 안일한 결정밖에 남지 않는다. 몸을 사리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결과는 현상 유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경험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말이다.
비단 글만이 아닌 다른 어떤 일, 어떤 분야라도 그럴 것이다. 나를 망설이게 했던 대부분의 문제는 사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 즉 '글'의 문제라기보다 새로운 시작을 힘들어하는 '나'에게 있었다.
변수를 꺼리는 완벽주의적 성향(이제는 많이 마모됐다)과 불안을 쉬이 느끼는 내 기질이 이뤄낸 합작품이 아니었을까. (변수, 통제, 완벽주의, 스트레스, 불안, 안정감. 모든 게 하나로 이어진다!)
글로 돈 벌 자신이 없다고 했지만, 생각해 보면 돈 벌 자신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차피 힘들다면
여러 번 직장을 옮겼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힘들지 않고, 마음 쓰지 않는 곳이 없었다. (한 곳 정도는 있어도 좋으련만) 일은 한다는 건 원래 힘든 거라는 걸, 업무 외의 마음고생도 필히 따라온다는 걸 여러 차례 겪고 나서야 이 또한 돈을 버는데 주어진 기본값이라는 걸 알았다. (왜 누구도 말해주지 않은 걸까)
돈에 어떤 '의미'가 있다 생각했다. 물질적인 가치 외에도 돈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한 증명이라 그리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도 일정 부분은 동의한다. 그러나 내가 번 돈이 '타인에게 도움을 준 증명'이라는 그런 팔자 좋은 생각을 유지하기엔 당장 내가 힘이 들었다.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 이상으로, 사람을 움직이고 원하는 대로 조종하는 (돈이 가진) 힘의 논리 아래 내가 있었다. 타인이니 도움이니, 공자왈 맹자왈 책 속의 말을 일삼기엔 내 시간과 에너지가 그 와중에도 쪽쪽 빨려나가는 중이었다.
내가 그러는 것처럼 어딘가에서라도 누군가는 내가 편한 쪽으로 내 필요에 의해 움직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적절한 보상이 없다면 누군들 나를 위해 그리하겠냐만 말이다.
돈은 벌어야 했다. 그러나 고작 이 정도의 돈을 벌자고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쓰며, (견딜 순 있지만) 이 정도로 힘들어야 하는가? 퍽이나 많이 버는 것도 아니잖아. 투입 대비 아웃풋이 부적절하다 싶을 정도로, 나라는 사람을 쏟아부은 결과가 부실하기 그지없었다.
보이지 않는 돈의 힘을 극명히 느꼈다. 그러나 이러한 무형의 힘을 휘두를 정도로 큰돈을 원하는 건 아니었다. 타인을 움직이기 위해서가 아닌 나를 유지하기 위한 돈은 그리 크지 않았다. 어차피 어딜 가나 힘들고, (유의미한 차이가 없는) 어차피 얼마 안 되는 월급쟁이의 수입이라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게 좋지 않나는 생각을 그때쯤 했다.
먹을게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 입에 풀칠 못하고 살까. 물론 사는데 먹는 게 다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한 걸음 떨어져서 남의 일로 생각해 보면 말이다. 풍족하게 살진 못하더라도 뭐라도 해 먹고살지 않겠는가.
많이 힘들까.
내가 너무 겁먹은 건 아닐까?
좀 아껴서 살면 되지 않을까?
어느 시점까지 힘껏 노력해 볼 순 있지 않을까. 부족하지만, 내가 원하는 일을 한다면 감수할만하지 않을까. 내가 지키려는 현실이 그리 귀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고작 이 정도라면 말이다.
정답은 없다
현재의 내 선택으로 일어날 변화를 긴 시간 감내할 자신은 여전히 없다. 그러나 미래의 나에게 맞을 정답을 예견하여 미리 딱딱 맞춘다는 건 웬만치 용한 점쟁이도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야말로 어불성설!)
최선이라 생각한 행동이 언제까지나 최고의 선택으로 남아 있기란 힘든 것 같다. 심사숙고하여 내린 '결정'임에도 결과가 좋지 않다면, 내 선택에 대한 판단이 부정적으로 바뀌는 것을 종종 발견한다.
반대로 '결과'가 좋다면 상황을 되새길 새도 없이 (있는지도 모를 내) 선견지명에 감탄하며, 잘했다고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간다.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팔랑대며 나부끼는 하얀 종이 쪼가리처럼 자신의 '선택'에 대한 판단을 온전히 '결과'에 맡겨버리는 것이다.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결과론적 사고'가 그리 건전한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건 경험적으로 이미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를 전부 내 통제 아래에 두기란 불가능하며, 언제나 좋은 결과만 얻길 바라는 마음 또한 그저 바람에 그칠 수밖에 없다.
결과를 보고 뒤늦게 '이랬으면 좋았을걸, 저랬으면 좋았을걸'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기 쉽다. 기로에 선 자신의 선택을 되새겨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결과를 지워놓고 다시 그 상황으로 돌아간다 생각한다면, 나는 미지의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했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될 것이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고,
난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했다.
그렇다면 나를 탓할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아니, 내가 미리 알았으면 그렇게 했지. 모르니까 고민한 거 아니냐.) 아쉬움이 남는다면, 그건 불가능을 향한 버리지 못한 미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