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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약 Sep 20. 2021

두통과 녹내장 : 대학병원에 가다

진료일을 기다리면서



나는 내가 녹내장이라는 생각에 한참을 우울해했다. 20대에 녹내장이라니 이 무슨 날벼락인가. 때마침 젊은 녹내장 환자가 늘고 있다는 기사가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딱 내 얘기였다. 나 같은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내원일을 기다리며 녹내장 약, 녹내장 진행 늦추는 법, 녹내장 원인, 녹내장 증상 등 시간 날 때마다 녹내장에 대해 검색했다. 여러 가지로 알아보았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보였다.




녹내장 관련 네이버 카페에서 찾은 내용이다. 도움이 될 것 같아 저장해두었다.










3차 병원



대학병원엔 엄마가 동행했다. 내 불안이 전염된 것인지, 아니면 나름 큰 병으로 큰 병원에 간다는 게 신경 쓰여서인지 엄마는 내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안과병동에는 나 외에도 진료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이 있었는데, 다들 나이가 많았다. 20대는커녕 30대, 40대도 잘 보이지 않았다.


황반 변성, 백내장, 녹내장, 당뇨망막병증 등 안과질환은 나이가 많아질수록 유병률이 높아진다. 대기 중인 환자들의 나이대를 대면하니 나의 불운이 더 마음에 와 박히는 기분이었다.

동병상련이었을까. 이 많은 사람들이 무슨 질환으로 여기까지 찾아왔을지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다들 쉽지 않았겠지. 주위를 둘러보며 애써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는데, 오래 기다리지 않아 내 차례가 왔다. 간호사 선생님이 종이 한 장을 나눠주면 검사 절차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빨간 동그라미를 쳐가며 설명해주었다.




나와 어떤 할아버지 한 분을 같이 불렀는데 순번이 비슷한 사람은 모아놓고 한 번에 설명하는 것 같았다. 이 할아버지는 나와 똑같이 녹내장으로 내원하셨는데, 녹내장 검사가 처음은 아닌 듯했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겠지만, 한눈에도 할아버지는 나이가 아주 많아 보였다. 눈을 제대로 뜨지 못했고, 혼자서 거동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보호자가 옆에 붙어 서서 간호사의 말을 짧게 전달해 주었다. 더 쉬운 말로 전해 들으면서도 할아버지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귀도 잘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 할아버지를 보며 나는 갑자기 '이건 아니다' 생각했다. 한쪽 눈이 실명하고, 남은 한쪽도 이미 시야의 일부를 잃은 할아버지를 앞에 두고서야 나는 뭔가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정말 심각하게 이 병증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검사나 한 번 해보자고 깔짝데고 있자니 말로 표현하기 힘든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동시에 난 녹내장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병과 죽음은 나이를 따지지 않는다지만, 그때 그 공간에서 나처럼 멀쩡해 보이는 사람도 또 없었던 것이다. 마치 내가 와선 안 될 곳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진료비 세부내역서를 보면 어떤 검사를 했는지 확인 할 수 있다.




나중에 진료 세부내역을 보고 알았는데 검사를 참 많이 했더라.

시력/안압 검사, 굴절 검사, 각막 두께 확인, 정밀검사, 예진, 망막/시신경 유두 관찰, 그리고 시야검사. 

라섹수술을 한 안과 A (1차 병원)에서 한 검사와 뭔가 달랐겠지 싶은데, 그닥 설명을 안 해주니 내가 알 길이 없었다. (설명을 하면 얼마나 알아들었겠냐마는)


정밀검사는 한 검사실 안에서 이루어졌다. 방 안은 검사 할 기계로 가득 차 있고, 의사 선생님 여럿이 각 기계를 하나 씩 담당하고 있었다. 의사와 기계는 그 자리에 있고, 환자만 한 칸 한 칸 옆으로 이동하는 식이였다.


여기서 인상적인 기억이 하나 있는데, 얇은 테의 안경을 쓴 호리호리한 의사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섬세한 손끝으로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데 (검사해야 하니까) 그 손이 너무 시원하고 기분이 좋은 거다.

순간 내 안의 뭔가가 훅하고 흔들렸다. 검사에 필요한 말 몇 마디를 나눴는데, 별 거 아닌 말이었음에도 찰나의 배려를 느꼈다. 차가움 속에 언뜻 드러난 다정함에 검사가 끝나고 옆 자리로 이동할 때는 왠지 모를 아쉬움마저 들었다.

의사 선생님의 서늘한 손을 기억한다. 물 한 번 닿지 않았을 것 같은 부드러운 손이었다. 왠지 미남이었던 것 같기도 한데,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낯설고 불안한 순간, 흔들림 없이 고요한 선생님을 봐서 좋았던 것 같다. 이곳에도 조용히 일상을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안심이 되었다.


모든 일정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다. 불과 얼마 전에 한 번 들어봤다고, 결과지가 사뭇 익숙해서 내심 뿌듯했다. (알아볼 안목은 없더라도) 




네이버 이미지 검색



검사 결과, 역시나 나는 녹내장이 아니었다. 심지어 1차 병원(의원급)에서 나온 결과보다 동그라미에 노란색(주의를 뜻한다) 비율이 많았는데도, 나는 정상이라고 했다. 내가 불안해 보였는지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해주셨다. 대학병원까지 왔을 정도면 당연히 걱정을 했으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말해줘서 고마웠다. 젊은 나이에 녹내장이라니, 무서웠단 말이다.

 

나를 향하던 불운이 발길을 돌리자, 그동안 느꼈던 서러움이 사르르 녹았다.









헛발질이었던 셈



당시 난 매우 진지해서, 대학병원 진료에 앞서 물어볼 내용을 한껏 준비했었다. (뭔가 생각이 많았던 건 알겠는데, 지금 읽어보면 잘 해석이 안된다) 그러나 잔뜩 준비해 간 질문은 아무 소용 없어졌다. 모든 질문이 내가 녹내장이라는 전제 하에 작성된 것이었기 때문에 물어볼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야말로 헛수고였다.


확실하지 않은 일을 나는 확신했다. (이러다 없는 병도 만들 판이다) 내가 과민했었다. 그러나 나는 무의미한 종이로 전락해버린 질문지를 버리지 못했다.  



고이 챙겨서 가져온 질문지. 간절함이 느껴진다.




나는 마음을 푹 놓고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왔다. 안심한 동시에 조금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가족들은 별 일 아닌데 호들갑 떨었다는 식으로 반응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동안 수차례 안과를 찾았던 이유가 분명 있었겠으나, 녹내장이 아니라는 안도감 앞에선 큰 문제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결과적으로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게 되었지만, 어쨌거나 문제가 없다니 잘 된 일이었다.


거금 40만 원. 녹내장 검사비용은 비쌌다. 그래도 마음의 안식을 위해 지불한 비용이라 생각하면 쓰린 속이 조금 달래 졌다.




근시를 확인하기 위해 그토록 안과를 돌아다녔다니 허탈함이 들었다.


 


내 눈에 문제가 없다는 걸 직접 확인하고, 확신하고 나서 한동안 안과를 찾지 않았다. 내가 겪고 있는 안과적 불편함은 여전했지만, 녹내장이라는 무서운 질환과 대비하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됐건 눈 문제가 아니라니 더는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위 진단서가 보이는가. 질병분류기호 H52.1 내 주상병은 근시였다. 더는 안과를 찾지 않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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