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낭송 May 09. 2024

체호프, 『베로치카』를 읽고

민음사 | 체호프 단편선 수록作



“왜 이런 논쟁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군그래! 처음에는 안부를 묻다가, 나중엔 명복을 빌게 된 꼴이잖아!”




이 글은 이반 알렉세예비치 아그뇨프가 8월의 그날 저녁, 유리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갈 때 울리던 방울 소리를 기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즉, 이 글은 아그뇨프가 먼 훗날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으로 전개되는 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작 이 글 속에서 현재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그뇨프는 그저 그 무렵의 기억을 승마용 장화와 함께 침대 밑에서 먼지를 벗 삼아 뒹굴고 있는 밀짚모자에 비유하며, 당시의 시기를 생생하게 전달할 뿐이다.


통계원인 아그뇨프는 어느 마을에 잠시 머무르면서, 그 마을에서 얻은 어떠한 감상들을 나열한다. 치열하고 고립되고 메마른 도시 생활에서 얻지 못했던 어떠한 정겨움, 따뜻함, 작은 환대. 아그뇨프는 이 시골 마을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끼고, 이 애틋한 애정이 결코 영원하지 않음을 아쉬워한다. 지금 쪽문을 나서는 순간 이 모든 것들은 그에게 추억으로 변하면서 현실적인 의미를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그리하여 한두 해가 지나면 이 모든 다정한 모습들은 마치 환상의 산물이기나 했다는 듯이 그의 의식 속에서 사라져 갈 것이다.” 

그는 이 작은 마을에서 느끼는 환대에 감동을 받은 듯 하지만, 이 마을을 떠나는 데에 있어 일말의 망설임도 없다. 오히려 빠르게 떠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아그뇨프는 자기 존재를 망각하게 하는 이 시골 마을의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움을 느낀다. “8월의 달밤에 깔린 안개를 바라보면서 아그뇨프는 자연 그대로가 아닌 꾸며진 무대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이런 느낌은 아마도 생전 처음인 듯했다.” 그러니 “단추 하나 하나, 주름 하나하나에서 따뜻하고 편안하고 단순한 무언가”를 느끼게 하는 베라는 당연하게도 아그뇨프의 마음에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시골 마을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있으며, 무대 속 한 장면을 현실로 살아가는 베라는 아그뇨프와 정 반대되는 시야를 가진다. 베라에게 이 마을이란 현실이자, 사회적 존재로서의 자신을 오히려 공고하게 정체화하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끝없는 평정과 목적 없는 삶을 참을 수 없어요모든 사람들이 무미건조해서 마치 물방울처럼 서로 구별이 안 되는 이 고장 사람들을 참을 수 없어요이들은 전부 정이 많고 선량하지요왜냐하면 배부르고 걱정이 없으니까그래서 싸울 일도 없으니까……그러나 저는 일과 삶의 필요로 인해 냉혹해진 사람들이 고뇌하며 사는 바로 그 커다랗고 습기 찬 집들이 좋아요…….”


이렇게 보면, 아그뇨프는 마을을 긍정하는 반면 베라는 마을을 부정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과연 아그뇨프는 정말로 단순히 마을을 긍정하고 있는가? 마을의 이방인이자 타자로서 바라보는 아그뇨프의 시선은 과연 온전한가? 그 말은 다음의 대사로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그것은 단지 영혼의 무기력, 아름다움을 깊이 자각하지 못하는 무능력일 뿐이며 또한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한 지저분한 싸움과 독신의 하숙방 생활, 그리고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얻어진 조로증에 다름 아닌 것이다.” 아그뇨프 역시 본인이 이방인으로서 여겨지는 곳이 아닌, 원주민으로서 소속된 사회를 향한 싫증을 드러낸다. 그는 그것을 독신의 하숙방 생활이자, 교육이라는 미명 아래 얻어진 조로증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베라와 아그뇨프는 대칭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그들은 이질적인 존재를 끝없이 미화하고, 환상화하는 동일한 결을 가진 인간 존재다.


그러니 환상화된 외부의 것이 개인의 고유성에 개입되는 순간, 아그뇨프는 명백한 불안을 표현한다. 이러한 불안은 끝없이 아그뇨프가 현재를 먼 과거의 한 순간으로 지칭하도록 유도한다.


지금 우리는 현재를 느끼며그 현재가 우리 마음을 채우고 설레게 합니다하지만 우리가 나중에 만났을 때는이 다리에서 마지막으로 본 날이 언제였는지어느 달어느 해였는지도 기억 못 할 겁니다…….” 손님으로서 다가왔을 때, 이 고장은 아그뇨프에게 가장 미학적인 존재로 남을 것이다. 만일 베라처럼 이 고장에서의 삶이 아그뇨프의 현실이 된다면, 이 고장에서의 기억은 정말로 “명복을 빌게 된 꼴”이 될 테니까.


“이별과 과실주에서 비롯된 우수, 온정과 감상적인 기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날카롭고 거북한 소심증이 그자리를 채웠다.” (…) “사랑을 고백하고 난 그녀는 여태껏 자신을 감싸고 있던 여성적인 고고함을 잃은 채, 키가 줄어들고 단순해지고 어두워진 것처럼 보였다.” 베라가 자신의 환상을 어떠한 현실적인 책무적 관계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순간, 아그뇨프는 그러한 관계의 변화를 거부한다. 이방인으로서 자신이 무대의 일부분처럼 다가갔던, 환상의 산물처럼 다가가려고 했던 일부분이 현실로 이끌려 나왔을 때 느끼는 어떠한 불안과 두려움. 아그뇨프는 흔히 부조리라 말하는 이 불안을 극적으로 경험했던 것이다.


작품 후반부에서 결국 아그뇨프는 베라에게 돌아간다. 심지어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 싶다고 서술하면서, 스스로를 충돌질하고, 억지로 베라의 모습을 떠올리려 하면서까지 다시 되돌아간다. 그는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한 상실을 경험한다. 소유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상실은 아그뇨프에게 베라라는 여성의 실제적 삶에 삽입하겠다는 충동을 불어넣지만, 그의 도전은 끝내 실패한다. 그는 베라라는 존재를 소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토착민으로서의 삶으로 회귀한 그에게, 이 때의 기억은 침대 밑에서 먼지를 벗 삼아 뒹굴고 있는 밀짚모자처럼 낡아간다.




                    *ex. 오리엔탈리즘

작가의 이전글 문보영, 『슬프지 않은 기억칩』을 읽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