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행위, 그리고 취향의 변주곡
타인의 욕망과 나의 욕망, 어떤 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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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와 말하기는 다른 영역이라지만, 센스 있는 화법을 지닌 사람이 대중적인 글을 생산하기 쉽다는 말을 믿는다. 그런 점에서 나의 재능은 실격이다. 센스라는 건 내게는 마치 어느 재능 너머에 있는 영역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재능이라고 믿었던 동경하던 어느 문학가의 죽음을 경험했다. 3달 후, 의사는 내게 Panic Attack이라는 진단 명을 내렸다. 나는 바야흐로 유언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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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롬은 <희망의 혁명>에서 그런 말을 했다.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지는 신념은 자신의 의견이 변하지 않을 거라는 신념이 아니라, 삶에 대한 기본적인 지향점, 자신의 성격 구조의 기질에 대한 신념이라고. 이런 신념은 자신에 대한 경험, '나'라고 정당하게 말할 수 있는 능력,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느낌으로 길든다고 말이다.
그런 점에서 어떤 유언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죽는 순간마저 지저분하고 더러운 것이 나의 인생이다. 어쩌면 이런 방황은 젊음에 기인했을지도 모른다. 청춘은 본래 할 말이 많은 법이지 않은가. 무엇에 기인하든 간에, 여전히 나는 나를 모르겠다. 나는 나를 믿지 못한다.
내가 믿는 유일한 진실은, 우리는 본디 스스로를 의심한 만큼 역설적으로 믿게 된다는 사실이다.
마치 도덕적 인간의 딜레마와도 유사하다. 도덕적 인간의 딜레마란, 스스로를 비도덕적으로 의심하는 인간만이 도덕적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태도에서 비롯한다. 누군가 선함을 추구하려면 선함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아야 한다. 단순히 정언 명령을 따르는 것만으로 자신이 선하다고 말한다면, 그 인간이 과연 선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선함이 무엇인지 생각할수록, 본인 역시 자신의 도덕성을 의심하게 된다. 그러한 선악의 이분법을 멈추고, 훨씬 세분화된 선악을 스스로 고찰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도덕적인 인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딜레마는 사대부의 나라에서도 종종 다뤄져 왔다. 정조는 이조 참의 유언호와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誠意]과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 것[正心] 사이 어떤 분별이 있는지"를 논하였는데, 유언호는 "뜻이 성실한 경지에 이르면 그 발로가 성실하지 않을 리 없으니, 마음이 올바르지 않을 것을 걱정할 리 없다. 그러나 기쁘고 노엽고 우려되고 두려울 때 살피는 것이 정밀하지 못할 때, 마음은 편중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뜻을 성실하게 하는 것이 마음을 올바르게 하는 것보다 선행된다"라고 말했다. 도덕적인 인간은 선을 추구하는 뜻에 후행하며, 기쁘고 노엽고 우려되고 두려울 때 정밀하게 살피는 의심이란 뜻을 성실하게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어쨌거나 우리는 헤매는 만큼 존재한다. 나라는 존재는 끝없이 의심당하는 만큼 견고해지는 골치 아픈 미물이다. 그런 마음으로 나를 끝없이 헤맸다. 이건 묘비명이 아닌, 나라는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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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우리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말한다. 라캉으로부터 시작한 이 명제는 마케팅이나 자본주의 사회의 교과서로 자리매김한 듯하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해지는 것들은 존재자가 존재의 문법 속에서 발화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이미 사회 기저에 존재하는 법칙 속에서 회전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나의 취향마저 타자가 지닌 취향의 모방에 불과해 보인다.
대체로 개인은 자신이 사회의 모방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불쾌감을 느낀다. 어쩌면 인간의 본능과 가장 가까운 욕망일 것이다. 동시에 관계주의적 문화에서는 이런 본능을 규율의 배반인 것처럼 여기며 다른 개인을 공격하기도 한다. 사회를 모방하지 않는 개인을 사회로 귀화歸化시키려는 투쟁이다. 때로는 자기 자신을 사회에 복속시키기 위해 투쟁하는 개인도 있다.
스무 한 살, 나는 그런 마음으로 극도로 평범한 나에 대한 시를 적었는데, 그 시는 동시에 평범하지 않은 나에 대한 고백이기도 했다. 평범하게 존재할 수 없는 자기 자신에 대한 원망과, 평범해지기 위한 처절한 노력, 그러나 대중적이고 평범해져 버린 깊은 자아가 제게 경고하는 위기의식을 써 내렸다. 그러나 차후에 이르러, 아웃사이더적 자기의식도 결국 라캉이 전제한 사회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으며, 도리어 사회성과 자기의식은 병립할 수 있는 개념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정서적 갈등마저 사실은 독자적일 것 없는 진부한 과정에 불과하며, 내가 고민해 왔던 아웃사이더적 의식이 그저 한국이라는 아주 좁은 사회에 갇혔을 때 벌어지는 정치적 다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결국 아웃사이더도 아니었으며, 도리어 다수적인 특성에 해당하는 대중에 불과하다는 진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나서야 자기의식 논쟁은 끝이 났다. 나는 연대를 요구할 만큼의 아웃사이더가 아니며, 취향을 고르는 과정마저 위선적인 윤리의식이 개입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비겁함을 깨달은 후에야.
마치 취향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저는 보통 달콤한 플라워 향을 좋아해요. 그래서 샤넬 샹스 오 땅드르를 오랫동안 써 왔죠. 지미 추의 블러썸도 비슷한 이유로 좋아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다른 취향을 도전해 보려고 해요. 조금 더 묵직한 우디향으로요. 최근에는 르 라보의 상탈 33을 샀지요."라고 그럴 듯이 취향을 나열하는 내 말에는 숨길 수 없는 자본주의적 권력의식과 위선이 숨어 있는 셈이다. 취향을 이야기하는 듯 하지만, 대화는 사실 과시를 드러낸다. 취향을 과시의 일부로 사용하는 건, 사실 아주 뻔하고 그럴듯한 대중적 화법이다. 이런 화법은 아주 뻔하고, 멋없으며, 센스 있지 않다. 그런 내가 어떻게 아웃사이더적 인간임을 표방할 수 있겠는가? 그건 자기기만이다.
재밌는 건 이러한 깨달음이 카뮈의 전락the fall에서도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전락>에서는 스스로를 권력의 위계에서 상류층으로 단정 지으면서도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믿는 위선과, 끝내 도덕적으로 전락하는 이중적인 인간 군상을 담았다. 백 년이 지나도 동일한 사회 법칙과 인간 본성 아래, 대중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동시성 현상이다.
나 스스로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느 뻔한 인간 군상으로 등장한다는 사실에 대한 실망감과 허탈함. 그렇다면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오는 당연한 방랑. 그 방랑이 내게 가져다주는 건 강박증에 가까운 문화의 향유였다. 내가 좋아하는 언어를 알기 위해서는 수많은 언어를 접해봐야 하듯이, 선호와 불호를 깨닫기 위해서는 엄청난 문화를 향유해야만 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이 반드시 선호와 불호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도리어 나는 문화를 감별할 만큼 평론가적인 인간이 아닐 수도 있다는 고백만이 돌아오는 나날이다.
나의 유서는 아직 한 줄도 쓰이지 않았다.
"언니, 장기기증을 신청하고 싶어. 그런데 엄마가 얘기를 듣더니 크게 화내더라."
"엄마는 네 죽음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거야. 서른 살이 되는 날에 엄마 몰래 해."
"알았어."
어린 마음에 나누었던 어떤 대화들이 떠오른다. 이건 나의 욕망일까, 타인의 욕망일까. 또는 이런 의심마저 강박적인 망상에 불과할까. 같은 태양 아래 새로운 문장은 없다던 포스트 모더니즘적 테제는 사실 솔로몬 어구의 인용이었다. 나는 누구의 인용이었나. 이 위선은 누구의 인용이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