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데 갓난아기를 유모차에 태운 젊은 부부가 탔다. 옆에 있던 남편이 눈을 반짝거리며 “몇 살이예요.” 물어본다. “이제 200일 되었어요.” 아기 아빠가 말하자 우리는 아기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우리는 고등학생이 된 아들의 어릴 때 이야기를 나눴다. 그때 엄청 귀여웠지. 맞아, 데리고 나가면 서로 안아 보려고 했잖아. 그랬던 아이가 벌써 아빠 키보다 훌쩍 커버렸다.
주말인 오늘도 우리는 여지없이 학교로 가서 아이를 픽업했다. 아기 손 같았던 나뭇잎들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며 머릿결처럼 찰랑거렸다.
아이가 기숙사에 입사한 지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세월을 이기는 이가 누가 있으랴! 기숙사와 학교생활에 적응하려고 분주했던 시간이 거짓말처럼 지나가고 있었다.
장바구니에 어설프게 짐을 싸서 첫 입사하던 날은 모든 게 서툴렀다. 아이를 집에서 처음 내보내며 마음까지 함께 보냈던 첫날이었다. 아이를 기숙사에 놔두고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컥했는지 모른다.
텅빈 아들 방에 들어서기만 해도 눈물이 쏟아져서 며칠은 들여다보지도 못했다. 그 뒤로 기숙사로 떠나보낼 때마다 가느다란 풀잎에 베인 듯 마음이 아려왔었다.
벚꽃이 피었다가 지고 봄을 기다린 무수한 꽃들이 속삭이듯 봄이 깊어가고 있다. 투명한 연두빛 잎들이 초록빛으로 짙어가고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으로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다.
이별의 유효기간이 석 달이라고 했던가? 아직도 아이를 보면 짠하지만 마음이 폭풍을 맞은 듯 요동치지는 않는다.
기숙사 입사 두 달이 지나며 서투른 몸짓으로 시작했던 이별에 익숙해지고 있다. 햇살과 바람을 온몸에 받으며 성장하는 나무들처럼 우리도 시나브로 성장하고 있었나보다.
이별은 어두운 터널같지만 터널은 언젠가 끝이 보이는 법이다. 고생을 감내해야 성숙이 찾아오듯이 자식의 힘겨움을 묵묵히 지켜볼 줄 알아야 자식이 성숙하는 것 같다.
언젠가 TV로 보았던 콘도르가 떠오른다. 커다란 새끼 콘도르가 비행연습하는 영상이었다. 콘도르는 절벽에서 사는데 몸집이 커서 착지를 못했다. 부모 콘도르는 새끼의 독립을 위해 끊임없이 비행연습을 시키고 새끼는 자꾸 곤두박질쳤다. 나는 그 모습이 애처로웠지만 새끼 콘도르는 결국 큰 날개를 펼치고 날아올랐다.
부모는 때론 자식을 위해 묵묵히 방관자가 되어야 한다. 기숙사 생활에 적응하는 아들을 보며 이별의 유효기간을 생각해보는 주말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