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주양 Sep 04. 2024

8. 온전한 이별(하)

판타지힐링소설(꽃이피면오세요)


#8


벚나무 가지마다 돋아난 연두색 순잎이 진한 초록색으로 바뀔 때까지. 틈만 나면 과거로 들어가던 마리는 수호의 도움으로 지독한 상처에서 차츰 벗어나고 있다. 그래서인지 계절은 가을을 향해 가는데 어째 마리의 얼굴은 봄처럼 화사해진다. 뿐만 아니라 주막을 쥐방울 드나들 듯하고 염치없이 카카가 머무는 방에 자신의 칫솔이나 여벌의 옷들을 갖다 놓는가 하면, 퇴근 후 저녁은 꼭 주막에서 먹는 데다가, 주말에는 잠까지 자고 가는 뻔뻔함의 극치를 달리는 중이다. 복실이가 아무리 핀잔을 줘도 아랑곳하지 않는 그녀는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 그런 마리의 모습에 수호는 날마다 뿌듯하고 흐뭇해진다.


"야앙! 니가 뭐가 좋아졌냥? 그거능 니 친구가 듣기 좋으라공 거짓뿌렁 한거징! 너 어젱 미친년처럼 울고불공 난리 친 거능 뭔뎅?"


그녀가 가끔 이상해지는 건 사실이다. 페이스북에 올라온 도현의 웨딩사진을 훔쳐보고는 꼴불견이라느니. 신부 얼굴이 썩 예쁘지는 않다느니. 여우 같은 놈이랑 헤어져서 다행이라느니. 욕을 한 바가지 늘어놓다가 미친 여자처럼 목 놓아 운 것이 정확히 백서른 두 번쯤은 된다.


"햇소리말공. 빨링 오기나행! 닭가슴살 사오공! 카카새끼 옛날에능 쌀밥만 줘도 쳐 먹더닝! 지금은 고기반찬 없으면 입도 한대잖냥?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거냥?"


그렇더라도 마리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고 수호의 삶도 더 이상 지루하지 않다. 흘러가는 시간의 초침소리가 명료하게 들려온다. 너는 현실을 살아가고 있어! 주막 한편에 걸려있는 벽시계가 매시간 뻐꾹뻐꾹, 성실히도 일러준다.


"뭐? 폰요금이 많이 나왕? 통화하는 밖에 안하는뎅? 그것도 받는 것만 하는뎅? 꼴랑 효도폰 하나 사줘놓공! 생색이냥? 방울이할멈도 아이폰 쓴다옹! 크르릉!"


기분 좋은 변화에 매일이 행복한 수호이지만 마음 한편에는 걱정과 의구심이 뿌리내려 생각 없이 웃다가도 턱을 괴며 골몰하고는 한다. 누군가 규칙이라고 정해준건 아니지만 헤아리지 못할 만큼 아주 긴 세월 동안 복사꽃의 법칙이란 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1. 과거의 다녀온 자들은 그간 짓눌렀던 상처에서 자유해진다.

2. 현실을 살아낼 힘이 생긴다.

3. 회기 한 경험과 수호를 기억하지 못한다.


"마라탕 거의 다 왔뎅! 맨날 늦엉! 계약서는 종이조까리냥? 그노무 회사 확 불태워버릴깡?"


마리가 사준 휴대폰으로 게임 아이템을 열심히 고르는 복실이 머리를 한 대 쥐어박으며 일어난 수호가 대문 쪽으로 걸어간다. 요즘 수호는 무한도전이나 나혼산을 보며 낄낄거리다가도 마리가 도착할 시간이 되면 벌떡 일어나 그녀가 자주 앉는 위치에 휴지를 놓아두고 안마당 목문을 활짝 열어놓는 일들을 루틴처럼 하고 있다.


“마리 왔어요~”

“자기 이름 부르지 말랬징? 징그럽다옹! 크릉”

“칫, 너도 하잖아.”


눈썹을 팔자 모양으로 내린 마리가 양손 가득 들린 마트봉지를 대문 앞에 서 있던 수호에게 건넨다.


“복실이는 귀엽공! 인간여자 너능! 아무런 매력이 없잖냥?”


도끼빗에 분무기를 뿌려 반듯하게 잘린 머리칼로 옮기던 복실이가 동공을 가릴 만큼 한껏 눈을 내리깔았다.


“그루밍하는 거야? 고양이들은 침으로 하던데 너는 물로 해?”

“크아옹!”


순간 복실이의 미간이 산처럼 휘어지면서 크고 둔탁한 주먹은 스파링 준비를 한다. 긴장한 마리가 항복자세를 취하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다 도망을 치고 눈을 희번덕 뜬 복실이는 한 손에 도끼빗을 휘두르며 추격을 한다. 마리의 등장으로 머리채 잡힐 일이 줄어든 수호가 반듯한 헤어스타일을 뽐내며 냉장고 앞으로 걸어간다. 그러고는 엄숙한 표정으로 식빵, 살구잼, 냉동핫도그, 용가리치킨을 봉투에서 하나씩 꺼내며 탄성을 내지른다.


“군만두! 김말이! 비엔나소시지!”


잠시 후, 수호대신 산발머리가 된 마리는 폴짝폴짝 뛰어오르는 카카를 안고 소파 끄트머리에 걸터앉았다. 으음 고소한 냄새~ 카카의 앞발을 살포시 잡아 킁킁, 냄새를 맡다가 버둥거리는 강아지를 꽉 끌어안고 옆으로 풀썩 드러누웠다. 눈을 붙이는 건가 싶더니 이내 스프링처럼 몸을 튕기며 일어나 복실이를 향해 얼굴을 휙 돌렸다.


“복실아, 학원 가봤어?”

“유튜브로 한 번만 따라 하며능 내가앙 전문가다옹!”

“학원 가서 배워.. 학원비 내준다니까.”

“헹! 월급쟁이 푼돈 벌면성! 또 얼마나 생색을 낼라공?”

“진짜 업종 변경하자! 테이블 몇 개 갖다 놓고 커피랑 빵 팔자고! 야외마당에서 내다보이는 경치가 예술이잖아? 이런 뷰면 사람들 기꺼이 올라온다!”

“왜 하필 빵이랑 커피냐옹?”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여 턱끝에서 찰랑이는 머리칼에 헤어에센스를 톡톡 두들기던 복실이가 물었다.


“이 동네는 젊은 사람들이 많거든!

“젊은 사람은 커피랑 빵만 먹냐옹?”

“그건 아니지만.. 서울 한복판 널찍한 야외에서 그것도 사방이 한강뷰는 없거든! 한강의 윤슬과 국밥보다는 커피랑 빵 아니겠니? 그리고 복사골 주막이 뭐냐? 아니지 이젠 하나 지워져서 사골 주막이지? 촌스럽다! 진짜!”


순간 얼음이 되어버리는 복실과 수호. 눈치 없는 이마리는 손까지 저으며 열변을 토하다가 바닥에 떨어진 냉동만두를 보고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마라탕! 요즘 막말시전 장난 아니다옹? 간을 내놓고 사는 거냥?”

그게 아니라.. 복실이가 카페가 어울리는 좀  세련된 스타일이잖아?”


곧 광대를 씰룩이더니 어깨를 으쓱 올린 복실이가 도도하게 손을 흔든다.


“계속해봐라앙~인간여자영..”

세련된 칼단발과 국밥은 좀 매치가 안되는거지! 커피색 앞치마를 하고 얼그레이 케이크가 가득한 유리진열장 앞에 서 있는 복실이를 떠올리니까. 너무 딱인 거지!”


마리가 손가락을 튕기며 복실을 향해 한쪽 눈을 찡긋거리자 지렁이처럼 꿈틀대던 복실이의 웃긴 입술이 달맞이꽃처럼 활짝 벌어진다.


너 뭐 좀 아는 인간이구낭? 대신 학원비 밀리지 말라냥! 나 쪽팔린 거 진짜 싫어한다냥!

"우리 복실이를 위해 이 한 몸 바칩니다!"


복실은 너스레를 떠는 마리를 곁눈질하며 자꾸만 벌어지는 입을 숨기려 휴대폰에 얼굴을 박았다.


"만두 먹을 사람!"


식량으로 냉장고를 꽉꽉 채운 수호가 만두비닐을 양손으로 잡아 뜯으며 말했다.


"야앙! 튀겨! 찌지말라냥!"

"왜? 나는 담백하게 쪄서 식초간장에 콕 찍어먹을 건데?"


만두를 튀기자는 복실과 쪄먹자는 수호의 아옹다옹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마리의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어린다. 여전히 도현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고. 출근할 월요일만 생각하면 일요일 밤부터 머리가 아파오지만. 복사골 주막을 떠올리면 순식간에 월요일이 지나가 금요일 여섯 시가 되는 마법이 일어난다.


“만두 튀긴 게 좋음? 찐 게 좋음?”

“마라탕 말 잘해라옹! 크릉”


수호와 복실이 동시에 마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반반”


마리의 대답에 수호와 복실은 입을 동그랗게 모으며 오!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크게 웃으며 신식과 구식이 뒤섞여 본질을 모르겠는 복사골 주막의 오픈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반은 쪄주고! 반은 구워줄게! 둘 다 나와!”


조금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찐만두와 기름이 반지르르한 군만두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라면도 끓이자옹!”

 물 올릴까? 라면은 복실이가 잘 끓여!”


수호가 젖은 행주로 테이블을 훔치며 복실을 가리키자. 우리의 얍삽 대마왕 복실 군은 소중한 도끼빗까지 내던지고 잽싸게 의자에 앉아 갓 구운 만두를 입에 쑤셔 넣더니 뜨겁다며 엉덩이를 들썩이고 호들갑을 떤다. 혀를 끌끌 차며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차가운 물을 유리컵에 따르던 수호가 마리를 넌지시 건너다본다.


“그 친구는 어떻게 됐어?”

“누구?”

“회사에서 너 괴롭히는 사람들 칭찬한다는.."

“서영이?”


복실이 앞에 물컵을 내려놓은 수호가 찬장에서 냄비를 꺼내면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마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술을 삐죽인다. 가스레인지 점화버튼을 돌리자, 타타타탁! 불이 들어왔고 수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마리에게 집중했다.


자주 다퉈. 서로에게 예민해졌어...”


서영과 함께 퇴근을 하던 날이었다. 예쁜 베이커리 카페를 유심히 보던 마리가 서영에게 물었다.


“한강 보이는 곳에 베이커리 카페 어떨 것 같아? 아는 분 도와서 카페를 열까 생각 중이거든?”

“누구?”

“미모의 남자와 고양이 같은 남자. 나중에 소개해줄게. 근데 나 장사 잘할 것 같지 않아?”


싱긋 웃는 마리를 유심히 지켜보던 서영이 잠시 골똘하더니 구슬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혜언니가 장사하면 진짜 잘할 거 같아! 옷 사러 같이 간 적 있거든? 진짜 야무지게 깎더라고. 지혜언니 옷가게 하고 싶어 하는 거 알아?


나 여기 지혜언니랑 왔었어! 지혜언니가! 지혜언니가! 요즘 서영의 대화는 거의 정지혜로 시작해서 정지혜로 끝난다. 마리의 속은 레몬 한통을 다 먹은 것처럼 쓰리지만, 그래도 정지혜가 서영과 친하게 지내면 자신을 덜 괴롭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자신을 향한 비호감이 사라지지 않을까? 내심 기대하며 쓰린 속을 달래던 마리였는데, 그녀의 소망과는 달리 상황은 더 안 좋게 흘러갔다.


"지혜님 결혼한다던데.."

"응!"

"너는 알고 있었구나.."

"언니가 비밀로 하라고 했어! 내일 신혼집에서 집들이하거든? 너도 데려간다고 했어!"

"정말? 나도 초대한 거야?"

"그럼 당연하지!"


이젠 정지혜와 비밀까지 공유하는 서영을 보며 마음 한편에 구멍이 난 것처럼 찬바람이 불고 소외감마저 들었지만. 지혜님이 신혼집에 초대를 하다니! 서영이가 자신을 위해 보이지 않게 애를 써줬구나.. 잠시 원망하고 질투했던 게 미안해졌다. 초대 소식을 들은 그날 화장실로 들어가는 정지혜를 따라간 마리가 잔뜩 기대에 찬 얼굴로 물었다.


"지혜님 결혼 축하드려요. 혹시 집들이 선물로 갖고 싶은 거 있으세요?"


그러자 정지혜는 아리송한 표정을 지으며 마리 옆을 쓰윽 지나쳤다. 그러고는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는 서영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서영아 너랑 영업팀 장훈 씨랑만 와! 알았지?"


머쓱해하며 어쩔 줄 몰라하는 마리에게 서영은 시선을 피하며 언니가 사람 많이 오면 정신이 없어 그런가 봐. 얼버무리듯 정지혜를 감쌌다. 서영아 지혜님이 초대한 게 아니었던 거니? 사람을 바보로 만드니! 따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마리는 쓴웃음을 지으며 상한 마음을 알약처럼 삼켰다. 일주일 후, 정지혜 집들이에 다녀온 서영은 정지혜의 칭찬을 해맑게 늘어놓았다.


"언니가 우리 대접한다고 파스타를 두 종류나 한 거야! 집도 너무 예쁘고.. 언니 엄청 깔끔하게 잘해 놨어! 형부 되는 사람이 엄청 스위트한가 봐! 프러포즈도 엄청 로맨틱하게 했더라고!"


그래도 조금 다행인 건, 정지혜와 무리들이 예전만큼 마리를 무시하지는 않는다는 거다. 그것만으로도 족하다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서영에게 섭섭한 마음은 들었지만 그래도 서영은 마리에게 오랜 친구이기에.. 속상함이나 배신감은 서영을 위해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고 있는데 칫솔을 한 손에 쥔 물류팀 신대리가 마리에 등을  치며 물었다.


“마리 님! 요즘 그렇게 은진 님을 질투한다면서?”


마리는 입속에 가득 찬 치약거품을 뱉지도 못하고 휘둥그렇게 뜬 눈알만 이리저리 굴렸다.


“지혜님이 그러던데? 은진 님 예비신랑이 잘 나가는 남자라서 이마리가 질투심을 숨기질 못한다고! 은진님이랑 잘 지내다가 그것 때문에 멀어진 거라며? 그리고 지혜님 속 좀 그만 썩여! 요즘 자기 때문에 퇴사를 진지하게 고민한다던데? 저번에 지혜님 무단결근했던 것도 다 자기 때문이라면서?”


정지혜는 이젠  유언비어까지 퍼트리고 있었다. 마리는 울분을 터뜨리며 정지혜의 악행을 서영에게 고했다. 분명 정지혜와 친하게 지낸 걸 후회할 거야! 김칫국 한 사발을 숨도 쉬지 않고 들이키면서.


“뭐? 지혜언니가 그랬다고! 정말이야? 끊어봐! 내가 직접 물어볼 거니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에는 서영이가 이렇게 흥분해서 길길이 날뛰는 게 자신을 위해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듣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마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서영아.. 지금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이 소문에 네 이름은 단 한 글자도 나오지 않았어.”


순간 수화기 너머가 고요해졌다. 간혹 서영의 얕은 숨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여보세요!"

“마리야 내가 말했잖아. 은진님이 나 스킨스쿠버 하는 것도 따라 하고. 옷 입는 것도 따라 하고. 은근히 견제하고 불편하게 만든다고. 그리고 자랑질도 너무 심하고. 맨날 얻어먹기만 하고. 너도 얄밉다고 싫댔잖아!"


그래 그랬지.. 그래서 얄밉기는 하지만 싫어하고 욕할 정도는 아닌 서은진을 너를 위해! 너보다 더! 펄펄 뛰며 흉을 봐줬지.. 감히 내 친구를 괴롭게 해? 이러면서 말이야.


"그런 것 때문에 좀 힘들다고 지혜언니한테 말했거든."


어쩜, 이렇게 예상을 비껴갈까? 그렇다 서영은 유언비어의 주인공이 자신인 줄 착각하고 길길이 날뛰었던 것이다.


"지혜언니랑 영주언니가 은진님을 예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렇게 예뻐하는 거 아니라더라?"


그래놓고 수습한다는 말이 박영주와 정지혜가 서은진보다 자신을 더 예뻐한다는 자랑질이었다. 마리의 억울함은 서영에게는 그저 남의 일이었다.


 "그런데 마리야! 지혜언니가 그렇게 말한 건, 큰 의미는 없어! 언니가 말하는 습관이 원래 그렇더라! 널 싫어해서 그런 거는 아니야!"


서영아 만약 네가 내 입장이라도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니? 너를 불편하게 한 서은진도 그럼 악의는 없는 건데 품어줄 수 있는 거니?


 "그 계집애한테 따져라앙! 너능 바보냥?"


가만히 듣던 복실이가 도끼빗을 휘두르며 목청을 높였다.


"정말 정말 서영이가 낯설어! 예민하고 까칠하긴 해도 이렇게 의리 없고 이기적인 줄은 몰랐지. 하긴 윤하도 서영이는 좀 눈치 보게 된다고 하긴 했어. 애가 워낙 예민보스거든! 거슬리는 건 또 뭐가 그렇게 많은지, 예전에 윤하가 밥 먹을 때 앞니로 씹는다고 면전에다가 짜증 냈다니까? 조금만 지 심기 거슬리면 바로 인상 구겨지고. 작은 걸로 지적질하고. 은근 받기만 하려 하고. 지 애인한테나 공주지 친구한테도 공주야? 온 세상이 지 중심으로 돌아가지! 말꼬리는 또 얼마나 잘 잡는데! 또박또박 비아냥거리면 내가 할 말을 는다니까? 그리고 지한테 잘해주면 무조건 인성 좋데! 그게 바로 일반화의 오류 아니야?"


"근뎅 왜 노냥?"

 

만두 세 개를 한꺼번에 욱여넣는 복실이의 짧은 질문에 마리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더니 손가락을 비비 꼬며 자신 없는 어투로 웅얼거렸다.


“늘 같이 울어줬거든. 은근 츤데레야 걔가 여린 구석도 많고. 같이 본 드라마도 많고. 한 번은 길거리에서 너무 웃다가 다음날 병원 실려간 적도 있다? 어릴 때 해리포터 책을 같이 돌려봤거든. 어느 날 이윤하가 갑자기 전화해서는 덤블도어 죽었다! 이러고 끊는 거야. 곧바로 서영이한테 전화해서 고대로 했지 그래도 서영이는 화도 안 냈어. 윤하랑 서영이랑은 추억이 너무 많아. 그 모든 시간을 다 버려야 하잖아.."


"야앙! 너 뭐 애인이랑 이별하냥?"


마리의 눈물은 오늘도 성실히 출근을 한다. 식탁 위에 휴지가 복실의 터치 한방에 마리 쪽으로 데굴데굴 굴러간다. 턱을 괴고 가만히 듣던 수호가 마리를 지긋이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삶이 오래될수록 인간관계는 좁아질 거야. 인간이 나이가 들수록 세월만 보내는 건 아니거든. 알게 모르게 지혜가 생겨. 나를 지키는 지혜. 부당함에 대응할 지혜. 할 말은 는 지혜. 끊어내는 지혜. 이별할 수 있는 지혜. 당장 뭘 어쩌라는 건 아니야."

"맞다옹 마라탕! 인간들이 널 괴롭히는데! 왜 너까지 널 괴롭히는 거냥?"


내가 뭘 할 수 있겠어. 나는 부당함에 대항할 용기도. 아닌걸 아니라고 말할 자신도. 오래된 인연을 끊어낼 힘도. 아무것도 없단 말이야...



“마라탕! 연습했던 대로 잘해라옹! 질질 짜면서 오면 가만 안둔다옹! 그리고 집에 올 때 얼그레이 케이크! 조각 말고, 판으로!”


마리는 주말 내내 복사골 주막에 쳐 박혀 복실의 지도하에 훈련하고 또 훈련했다. 일명, 할 말은 하고 삽시다!


“걱정하는 척, 지적질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한다옹?”

“너나 잘하세요?”

“괴변을 진리처럼 말하는 사람에게는 어떻게옹?”

“개소리하지 마!”


대학로 삼 번 출구 앞에 도착한 마리는 그간 쌓아온 싸움의 기술을 속으로 복습하며 벌어질 일들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다. 머리는 차갑게 마음은 뜨겁게. 억양은 단호하게 흥분은 금물. 화난다고 울컥하지 말기. 울컥하는 순간 지는 거다!


 "마리야!" 


역사에서 올라오는 서영은 평소보다 더 해사하다. 본래도 예쁜 그녀이지만 오늘 입은 남색 원피스가 단아한 얼굴을 한층 빛나게 했다. 서영이 손을 흔들며 가까이 다가온다. 펄이 들어간 핑크색 아이섀도가 참 잘 어울린다. 하얗게 웃는 서영에게 마리는 NO! 를 외쳐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면 부당함에 대응할 용기가 생겨.”


수호가 해준 말들을 속으로 되새기며. 더우니 시원한 데로 들어가자, 다정하게 손을 잡는 서영의 눈을 빤히 들여다본다. 맞잡은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지자 주막에서 수없이 연습한 것들이 주머니 속으로 쏙 들어간다. 그냥 이대로 묻어두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내면 안 될까? 잠시 그런 마음이 들었다.


“나 지훈이랑 싸웠어! 모임 있었거든? 글쎄 안유라 무리가 나온 거 있지? 너 알지 지훈이랑 비밀연애한다고 걔들이 나 은근히 따돌린 거. 그런데 기가 막혀! 지훈이가 걔들이랑 아무렇지 않게 웃고 떠드는 거 아니겠어? 아니 어떻게 그래? 여자 친구가 싫어하는 애들인 거 뻔히 알면서?"


마리는 kfc를 지나 민들레영토 앞에 다다를 때까지 서영의 하소연을 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우뚝 멈춰서 그녀를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너도 지혜님이랑 친하게 지내잖아!”

“뭐?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정지혜는 나에게 가해자야! 그런데 너는 좋은 사람이라며?

“이마리! 네가 괜찮다며? 친하게 지내라며?”

“마음 넓은 척 거짓말했어. 나이스하고 쿨 한 사람이고 싶었어!


순간 서영의 길고 짙은 속눈이 파르르 떨렸다. 마리는 침을 꿀꺽 삼키고 말을 이었다.


“나는 너한테 미안한 게 너무 많아. 고마운 것도 많고. 그래서 솔직한 심정을 말하기가 힘들었어. 그렇지만 너는 오랜 친구니까. 말하지 않아도 알 줄 알았어. 친구가 싫어하는 사람은 같이 싫어해준다. 내 친구를 괴롭힌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유치하지만 강력한 우정의 표시! 나는 그랬어. 잘 지내고 있는 친구였어도. 네가 싫다고 하면 멀리했어.”

내가 요즘 지혜언니 얘기를 좀 많이 했지, 하지만 네가 더 궁금해했어! 은근슬쩍 지혜언니 얘기 꺼내서 듣고 싶어 했던 건 너야!”

“사실 궁금했어. 내게는 나쁜 사람인데, 너에게는 좋은 사람이라니까."

"지혜언니 성격이 원래 크게 생각을 안 해! 너랑 나름 친하다고 생각해서 장난친  거래! 그리고 언제 적 일들로 지금 이렇게 난리를 치니?"

"그래서? 악의가 없고 장난으로 한 거고. 고릿 작일이면. 상처의 책임은 누가 지는 거야? 중학생 한 명이 삼 년 동안 친구를 왕따 시켰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도 쟤랑 놀지 마! 이러고 다녔데. 따돌림 받았던 그 아이는 마흔이 어서도 밉지는 않지만 기억은 한데. 하지만 오래된 일이고. 어렸고. 생각이 없었으니까. 상처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잘못한 거네? 지금 너의 말은."

"이마리! 확대해석 말아라.."

"하아.. 너 저번에 나랑 싸웠을 때 윤하한테 전화해서 그랬다며? 마리랑 싸웠다고. 그런데 지혜언니 좋은 사람이라고. 그 말 즉슨 너랑 싸운 이마리는 이상한 애고. 정지혜 악행을 매일 말했던 이마리는 거짓말장이고. 그게 사실이더라도 착한 지혜언니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고. 어쨌든 이마리에게 문제가 있어서 자꾸 싸우게 되는데 이마리가 싫어하는 정지혜는 좋은 사람이야. 이 말이잖아. 안 그래?"

"네 멋대로 판단하지 말고! 그딴 식으로 말하지 말고! 소설 쓰지 말고! 그리고 하가 그렇게 말했어? 나는 윤하한테 그런 말 한 적이 없어!"

"서영아.. 너는 기억 안 나는 거는 무조건 안 했다고 그러더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아주 정신병자로 만들어버리는 게 한두 번이 아니야! 보통 사람들은 말이야. 아 그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러지. 너처럼 정색하면서 그런 적 없다고 따지고 들지 않아. 그리고 우리 일에 윤하 끼어 넣지 말자.”

“하하! 야! 윤하를 소환한 건 지금 너야!”


서영은 입꼬리를 한쪽으로 올리며 승리의 미소를 짓는다. 초고속으로 달리던 마리가 아차, 하며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 이미 앞차를 들이받은 뒤다. 이윤하라는 넘버를 달고 있는 자동차.


[말싸움에서 제삼자는 끼워 팔면 안 된다]


복실님의 싸움의 기술 제7장 3항을 어겼다. 아 큰일이다. 하 얼굴은 또 어떻게 보지?


“윤하한테 전화할 거야!”


당황하는 마리의 표정을 잽싸게 읽은 서영이 길길이 날뛰며 휴대폰을 들었다. 그렇게 연습을 하고는 이미 이긴 싸움을 망치냐옹? 삿대질을 하며 혀를 찰 복실의 성난 모습이 스쳐간다. 케이크 한판으로는 어림도 없겠다. 마리는 다시 차분히 생각을 정리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나 얼마 전에 죽으려고 했어.”


휴대폰을 귀에 대고 씩씩거리던 서영이 얼굴을 굳히며 마리를 빤히 쳐다봤다.


“생명의 은인이 그러더라. 자신을 가장 괴롭히고 무시하는 건 나라고. 스스로를 아껴주고 편도 들어주고. 누가 괴롭히면 혼도 내주라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부당함에 맞설 힘이 생긴데. 아직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여전히 나는 내가 싫어. 그런데 이젠 나도 노력을 해볼 거야. 서영아 너 의리 없어! 너만 좋으면 앞에 있는 사람 감정이 상하든 말든 상관 안 하는 거 최악이야! 아니면 일부러 날 도발하고 싶어 그러는 거면 진짜 악질인 거고! 그리고 정지혜는 가해자야! 너한테 잘해준다고 내게도 좋은 사람은 아니야! 알겠어? 나는 너 때문에 정지혜가 더 싫어져!


넋이 나간 얼굴로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서영을 뒤로하고 거침없이 돌아선 마리의 귀에 굵은 쇠사슬이 팅,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벅차오르는 가슴을 풍선처럼 부풀려 깊은숨을 내뱉었다. 괴롭게 하는 모든 것에서 작별하고 돌아선 마리는 뒤돌아가지 않겠노라 다짐해 본다. 돌아서서 절대 소금기둥이 되지 않을 거야! 결의를 다지며 수호가 해준 말들을 노래처럼 읊조렸다.     


“스스로를 존중하는 사람은 타인도 존중할 수 있지.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애가 아닌 인류애가 생겨.”     



 “자기 친구 책임감 없다. 가을행사 어뜩하냐고!”


잔뜩 성난 얼굴로 지껄이는 파트장이 좁은 사무실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마리는 서영에게 전화를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이내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서영이가 하던 일 제가 할게요.”


정지혜가 호기롭게 일어나 파트장에게 말했다.


“어젯밤에 서영이 만났는데. 가고 싶던 회사에서 급하게 나와 달라고 했데요. 당장 가라고 했어요. 여기서 계약기간 채우려고 본업을 놓치면 되겠어요?”


파트장이 실눈을 뜨고 마뜩잖은 어투로 물었다.


“단짝친구라며 마리 씨는 몰랐어?”


파트장에 물음에 마리의 가슴에서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른다.


“서영 씨한테 전화 좀 해봐!”


파트장이 마리 쪽으로 걸어오며 언성을 높이자, 정지혜가 단오한 얼굴로 파트장을 가로막았다.


“서영이 마음 편하게 보내주죠? 그리고 서영이 맡은 일 똘똘하게 다 해놨어요. 알바생이 이 정도면 훌륭한 거죠! 전화하면 서영이가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못돼 먹은 정지혜가 서영에게는 어쩜 저리 천사 같을까? 유독 서영이 사랑스러운 걸까. 유독 마리가 밉상인 걸까. 본인에게 큰 문제가 있는 건 아닐지 사람들이 싫어하는 무언가가 자신에게 있는 건 아닐지 도현이도 그렇고 서영이와 회사 동료들도 저러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서영이가 정말 자신을 소중한 친구로 생각했다면, 정지혜를 높이며 친한 지인으로 두진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이 노크도 없이 쳐들어온다. 하아.. 또 자괴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자존감은 바닥에서 하이파이브를 친다.


“어쨌든 스쳐가는 사람이지만 잘되어 나간다니 다행이네? 그런데 어디 회사 들어간 거야?”


말은 잘됐다고 해도 표정은 여전히 찝찝하고 심난해 보이는 파트장이 정지혜 쪽으로 퉁퉁한 몸을 옮기며 서영의 소식을 묻는다. 뭐라 뭐라 떠드는 정지혜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애써 외면하고 퇴근 준비를 한다. 모니터를 거울삼아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쓸어내리던 마리가 옆에 앉은 은진에게로 몸을 돌렸다.


“은진님. 저 앞머리 잘라야겠죠?”

“네?”


가방을 꾸리던 서은진이 마리의 물음에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앞머리 길이 괜찮아요?”


은진은 흔들리던 눈빛을 고정하고 마리의 앞머리부터 얼굴 전체를 샅샅이 훑어봐준다.


“드라이해서 옆으로 넘기면 어때요?”


마리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 님이 먼저 말 건 거는 처음인 것 같아요. 마리 님 지혜언니랑 동갑이죠?"

"네 맞아요."

"에휴. 지혜언니도 참.. 마리 님이 참 순한 것 같아요."

"에잉 그렇지도 않아요.."


조금은 수줍어 보이는 은진을 향해 싱긋 웃던 마리가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서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는 씩씩하게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외쳤다. 그러자 정지혜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날카로운 음성으로 마리를 불러 세웠다.


“먼저 퇴근하는 거예요?”

“네, 퇴근 시간 아니에요? 일도 다 끝냈고..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처음 보는 마리의 당돌함정지혜의 안색이 창백하게 굳어진다. 감히 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할 말을 잃은 정지혜. 공포였고 두려움이었던 그녀를 뒤로하고 사무실에서 나온 마리가 십이 층 로비까지 씩씩하게 걸어갔다. 두려움은 과거에 있다. 현재에도 빈번히 출몰하겠지만 그럴 때마다 주막에서 연습한 싸움의 기술로 어퍼컷을 날릴 것이다. 골목에 갇힌 생쥐가 고양이에게 대드는 유튜브 영상이 갑자기 떠오른 마리는 잠시 고개를 숙여 키득거렸다.


동료 여러분! 오늘은 마음껏 당황하시고! 앞으로는 겁에 질린 생쥐가 아닌 복실이처럼 앙칼진 고양이로 변모할 이마리를 기대하시라!’


일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띵! 맑은 종소리가 울리자, 드르륵 문이 열렸다. 그 앞에는 반가운 두 얼굴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라탕 왜 늦게 나오공 난리양? 배고프다옹..”

“우리 옹이 배고파? 뭐 먹고 싶어? 고등어?”

“이게 고등어 먹을 차림이냐옹?”

“왜 고양이들은 나비넥타이를 좋아하는 거야?”

“뭬야?! 캬르릉!”

“농담이야.. 오늘 복장 최고다! 호텔뷔페 가자.

“복실잉 뷔페 요런 겅.. 한 번도 안 가봤다옹..”     


회전문을 지나서 밖으로 나오자 비 갠 하늘에 무지개가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떠 있었다. 나란히 걸어가는 세 사람 머리 위로 뭉근한 오후 햇살이 그림처럼 내려앉았다.



오늘도 꽃이 피면 오세요,
다음 편: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상)



이전 09화 7. 온전한 이별(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