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사한 꽃다발을 안겨드리고 싶은 막내 고모님 -
오남매의 막내 고모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달덩이 같이 고운 외모에 그 못지않게 마음씨도 선량한 분이셨다. 꽃길만 걸어도 부족한 분이 우리 인천 고모시다. 물론 남양 고모님도 고운 외모셨다. 하지만 막내 고모에 대한 기억이 훨씬 많고 다양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뱅골에 살았던 시절 고모는 뱅골에서 우리 가족과 꽤 오래 함께 사셨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남양(남양만이 지금은 매립되어 거대한 논밭이 되었다)에 소금을 사러 왔던 인천의 부자 아낙이 우연히 막내 고모를 보고 며느리 삼겠다고 해 인천으로 시집을 보냈다고 하셨다. 당시만 해도 반상이 엄격한 편이었다. 안동 권 씨 집에서 제주 고씨 성을 가진 집으로 왜 시집을 보냈는지 잘 모르겠다. 아니 잘 몰랐다. 의문(?)만 있었다. 게다가 시집을 보낸 다음에야 고모부가 폐병을 앓고 계셨음을 알았단다. 왜정 때 폐병은 고칠 수 있는 병이 아니었다. 김소월부터 이상 같은 많은 작가들이 폐병으로 죽었다. 국문학을 전공했으니 나도 안다. 고모는 혼인해서 딸 둘과 아들을 연달아 낳았다. 그리고 고모부가 돌아가셨다. 20대 중후반에 청상과부가 되신 것이다. 제법 가산이 넉넉했던 시부모님마저 돌아가시자 가세도 기울었단다.
할머니는 고모가 친인척들에게 재산을 거의 빼앗겼다고 하셨다. 나는 막내 고모에 대해 이렇게 알고 있었다. 아마 할머니의 왜곡된 기억이 나에게 잘못 전달된 게 아닌가 싶다.
아버지 이야기는 완전히 달랐다. 인천이 아니라 서울로 시집을 가셨다는 것이다.
막내 고모부는 왜정 때 공고를 나와 경성 전기에 다니셨다. 돈도 잘 벌고 집안도 부자였다. 그런데 전기 공사를 하러 전봇대에 올라갔다 떨어지는 사고로 심하게 다치셨다고 하셨다. 그 일로 고모부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경성 전기는 한국 전력의 전신이다. 일제 시대 공대나 공고는 한국인에게 입학이 잘 허락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한국인들이 당시 선진 일본의 기술을 배우는 걸 좋아하지 않아 차별을 많이 했단다. 고모부의 학교 성적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만약 고모부가 그런 사고로 돌아가지 않으셨다면 막내 고모의 인생도 그렇게 험난하지는 않으셨을 텐데.
나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던 사실에 대해 놀랐다. 우리 할아버지 성품에 딸의 혼사를 단지 부자라고 해 함부로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나는 일제 말이라 정신대 때문에 고모를 급히 시집보냈을 수는 있었겠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가족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걸 알고 새삼 할아버지에게 죄송했다. 할아버지의 인품을 간과하다니.
고모가 청상이 되시자 할아버지는 인천으로 딸을 데리러 가셨다. 그리고 고모 가족을 모두 구포리로 데리고 오셨다. 고모 시댁의 나이 많은 시할머니 두 분은 할아버지의 정직한 성품을 알고 비봉에 땅을 사 주셨다. 황새골 논이라고 내가 알고 있던 왕재골 주변의 그 논들로 인해 우리 집은 가세를 더 불려 나갈 수 있었다는 게 아버지의 설명이다. 원래 있던 일흔여덟 마지기에 스무 마지기 논이 더 생겼기 때문이다. 엄마가 시집을 오시기 전 고모는 혼자 그 큰살림을 모두 맡으셨다.
우리는 막내 고모를 인천 고모라고 불렀다. 고모의 딸인 두 언니는 인천에 사시는 분들을 만나 시집을 가셨다. 그즈음 고모는 우리 동네에 집을 하나 마련하셨다. 내가 비봉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가끔 큰언니의 아들들이 외가에 왔다. 큰 언니의 맏이는 나랑 동갑이다. 촌수는 아줌마와 조카 사이지만. 그 애는 나와 자주 어울렸다. 우리 집 사랑채 돌담 벼락에 마주 앉아 소꿉놀이를 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두 언니에게 아이들이 연달아 태어나면서 고모는 거주지를 인천으로 옮기신 것 같다. 언니들은 모두 아들만 낳았다. 큰 언니는 넷, 둘째 언니는 다섯 명이다. 둘째 언니가 넷째를 가졌을 때 이야기다. 언니는 아들 넷은 키우기 힘들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결국 동네 산부인과 의사를 찾아갔다. 딸이 아니면 낳지 않겠다고. 그랬더니 나이 지긋한 그 의사는 분명히 딸이니 염려 말고 낳으라고 했단다. 결과는? 아들 쌍둥이였다. 졸지에 아들이 넷도 아니고 다섯이 된 것이다. 이건 웃을 일이 아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고모를 따라 둘째 언니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딸이 하나라도 있는 우리 집과 너무 차이가 났다. 엄마는 내가 딸이라고 여러 가지 일을 나와 함께 하셨다. 겨울 준비로 창호를 다시 바를 때는 각종 나무나 풀 잎사귀를 창호지 중간에 넣고 겹으로 발랐다. 밤에 불빛을 받으면 창호는 아주 예쁜 무늬가 생겼다. 호롱불에 어른거리는 그 무늬들을 얼마나 좋아했던가.
뒤 울안 장독대 주변에는 화단을 만들어 갖가지 꽃들을 나와 함께 심고 가꾸셨다. 채송화. 맨드라미. 분꽃. 나팔꽃. 과꽃. 뒤 울안이 보이는 문을 활짝 열어놓고 철철이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라디오 어린이 방송을 듣던 모습이 지금도 환하게 그려진다. 마치 손에 잡힐 듯.
그러나 우리 집과 다르게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는 남자애 다섯을 상상해 보라. 언니의 손에는 부엌에서 쓰는 빗자루가 항상 들려 있었다. 욕설도 거침없었다. 그날 저녁상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하다. 분명 큰 양은솥에 엄청난 양의 콩나물을 삶았다. 그 흔한 참기름도 제대로 안 치고 소금만 넣은 콩나물이 양푼 하나 가득 저녁상에 올라왔다. 그것이 마법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경이로울 정도였다. 내가 젓가락으로 콩나물을 가져올 틈도 없었다. 아들 넷인 우리 집 식사 시간도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거긴 차원이 달랐다. 모두 잠들기 전까지 지붕이나 마루가 들썩 거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였다. 혹시 집이 무너질까 봐. 솔직히 내내 겁에 질려 있었다.
결혼하기 전 작은 언니는 말소리조차 조곤조곤한 편이었다. 그런 언니가 여전사처럼 사람이 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언니는 방학에 자주 놀러 오라며 내가 앉을 수 있는 책상까지 보여줬다. 그러나 다시 가고 싶지 않았던 게 내 본심이었다.
인천 고모는 딸을 못 낳는 것도 병신이라며 언니들을 원망하셨다. 그 정도로 외손녀가 없는 것을 자주 아쉬워하셨다. 만약 고모에게 외할머니의 형편과 처지를 잘 알아줄 마음씨 고운 외손녀가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도 고모를 떠올리면 그게 가장 아쉽다.
우리 엄마는 인천 고모님을 아주 좋아하셨다. 무엇보다 마음씨가 고운 분이셨기 때문이다. 엄마는 인천 고모에게 ‘그런 시누이’가 없다고 자주 말씀하셨다. 엄마의 힘든 시집살이를 많이 도와주신 데다 힘들 때마다 늘 다독여주신 분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고모를 떠올리면 온화한 웃음이 먼저다. 고모는 음식 솜씨가 좋은 탓에 여기저기 불려 다니면서 일을 많이 하셨다. 엄마는 ‘일은 솜씨 좋은 사람에게 간다.’며 고모가 하시는 힘든 일을 안타까워하셨다.
그러나 정말 안타깝고 슬픈 일은 따로 있다. 고모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그 사건은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났다. 그 일이 일어난 50여 년 전에는 우리 동네에도 갯벌이 꽤 넓게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배도 드나들었다. 엄마는 가끔 뱅골에 살던 그 시절 이른 아침이면 생선을 팔러 오던 사람들 이야기를 하셨다. 일제부터 계속된 간척 사업으로 남양만을 막으면서 우리 동네의 넓은 갯벌도 모두 논이 되었다. 지금 반월공단도 그렇게 조성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만조 때면 마을 근처까지 일렁이며 드나들던 바닷물이 개울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당시 고종 사촌 오빠는 인하 공대를 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선량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마다 타인에게 기억되는 양상은 각각 다르다. 큰오빠는 광택 오빠를 이렇게 기억한다. 중키에 안경을 쓴 미남이라고. 아버지 대학 시절 사진에 안경만 씌우면 딱 그 얼굴이라고. 나는 오빠의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도 뚜렷하게 기억하는 게 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에게 시골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소꿉놀이나 원피스 등을 사다 준 다정한 친척 오빠로 말이다.
남양 고모네 고종 사촌 오빠들은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이다. 심지어 뱃일도 익숙하다. 내가 남양에 놀러 가면 배를 타고 제부도에 갔었다. 그곳에서 게도 잡고 갯벌에서 망둥어나 새조개 등을 잡으며 어울렸던 기억이 선명하다. 바다는 놀이터였다. 수영도 누구 못지않게 잘했다. 그런 사촌들과 바다에 갔던 오빠만 왜 그런 일을 당했을까? 나는 그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과정을 전혀 모른다. 갯벌에서 싸죽이라는 조개를 잡다 들이닥친 밀물에 휩쓸려 그 오빠만 빠져나오지 못했다고 들었다. 오랜 세월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고 당시에 대한 아버지의 설명은 약간 달랐다. 광택 오빠 스스로 수영 연습을 한다고 밀물로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갈 때는 잘 갔는데 돌아올 때 다리에 쥐가 났는지 깊은 물속으로 빠졌다는 것이다. 결국 오빠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물이 빠지고 나서야 깊은 웅덩이에서 오빠를 찾았다고 하셨다.
현장에 있었던 큰오빠 말은 이렇다. 자기가 나중에 들으니 그곳에서 여러 사람이 죽었단다. 물길 어느 지점에 소용돌이가 있어서였다. 현장에 있었던 두 오빠들은 아직도 그 기억을 떠올리기 힘든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그때의 충격적인 기억을 되살려 당시 이야기들을 했다.
사고가 난 장소는 우리가 강도 방죽이라고 부르던 곳이었다. 강도 방죽은 일제강점기 수탈의 현장 중 하나다. 일인 대지주가 조선인들의 싼 인건비를 이용해 갯벌을 논으로 만들었다. 어마어마한 공사였을 것이다.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들의 안전을 고려해가며 경작지를 개간할 리는 없었다. 넓은 땅에서 수확할 쌀의 존재가 더 중요했던 사람들이다. 엄청난 물길을 막아 세웠으니 곳곳이 지뢰였을 터. 바다에서 밀고 들어오는 밀물은 갑자기 좁아지는 물길을 만나 어떤 문제를 일으켰을까? 깊은 수렁 같은 소용돌이를 얼마든지 만들었을 것이다.
그날 사고는 예고 없이 일어났다.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광택 오빠는 서울 공덕동에서 자랐다. 공덕동은 마포 인접한 지역이다. 즉 한강 주변이다. 오빠도 수영에 능숙한 사람이었다. 한강을 왕복할 정도로 평소 수영 실력을 자랑했다는 오빠와 아버지의 증언이 있으니 사실일 것이다.
큰오빠의 말이다.
- 형이 강도 방죽에서 헤엄을 치더니 갑자기 물로 쑥 들어갔어. 어! 하는 사이에 밀물에 휩쓸리듯 떠내려가는 걸 보고 난 울면서 어른들을 부르러 집으로 달려갔어. 유조 아저씨네 집 앞 작은 도랑을 뛰어 건너는데 거미 한 마리가 줄을 타고 올라가더라. 울면서 형이 거미줄 정도의 운만으로도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
현장에 남아 발을 동동 구르던 작은 오빠는 광택 오빠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 큰형이 울면서 어른들을 부르러 갔는데 광택이 형이 두 번 팔을 물 밖으로 내밀었어. 안경이 들린 팔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 나. -
강도 방죽에서 일어난 이 사건은 막내 고모에게만 충격적인 상처로 남은 게 아니었다. 우리 가족에게도 평생 기억에 남을 아픈 상처였다.
내가 마음 아프게 기억하는 해난 사고는 하나 더 있다. 그건 작은 오빠 친구 일이다. 그 오빠의 집은 제기동 우리 집과 제기 시장 사이에 있었다. 내 기억에 그 오빠 이름은 희영이다. 그 오빠도 유난히 수영을 잘했다. 한강 왕복은 기본일 정도였다. 강원도 속초에 놀러 갔을 때 바다 수영도 얼마나 능숙한지 사람들이 구경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 오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오빠가 해군에 입대하기 얼마 전에 그 집에 강아지가 한 마리 태어났다. 치와와였다. 몇 대를 거친 잡종 개들 사이에 태어난 강아지였다. 내 손바닥보다 약간 큰 그 강아지는 나를 보면 손가락만 한 다리로 마루에서 달려 나왔다. 나는 우리 가게가 있던 시장을 오가는 길에 자주 그 집을 들락거렸다. 오빠들이 친구였던 덕에 어른들까지 잘 아는 사이여서 별 거리낌이 없었다.
1974년 경남 통영 앞바다에서 해군 예인정(YTL정) 침몰 사고로 순직한 해군과 해경 159명 속에 그 오빠가 있었다. 예인정은 1974년 2월 22일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통영 충렬사를 참배하고 돌아가던 중 돌풍으로 장좌섬 앞바다에서 침몰했다. 이 유례없는 사고로 배에 타고 있던 해군 신병 316명 가운데 159명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그 사고로 물개 저리 가라 하게 수영을 잘하던 오빠는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아직도 오빠가 죽은 뒤 그 어느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오빠의 집을 지나가며 혹시나 치와와를 볼 수 있을까 대문 사이를 살짝 엿보았을 때였다. 대청마루에서 오빠의 어머니가 서랍장에서 옷들을 꺼내 쓰다듬고 계셨다. 아들의 옷을 꺼내 놓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들여다보시던 모습. 차마 버리지도 못하고 꺼냈다 넣었다를 반복하셨을 텐데. 아들을 앞세운 엄마의 마음이 얼마나 마음 아프게 느껴지던지. 다음 날부터 나는 가능하면 그 집을 멀리 돌아서 다녔다. 그렇다고 쉽게 잊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청상으로 아들 하나 믿고 사시던 고모에게 광택 오빠의 참변은 하늘이 무너지는 날벼락이었을 것이다. 오빠는 구포리 우리 산에 묻혔다. 어렸을 때 오빠의 비석을 쓸며 눈물을 흘리시던 고모를 본 적이 있다. 나만 해도 한동안 오빠의 무덤을 슬슬 피해 다닐 정도로 충격이 컸다. 현장에 같이 있었던 큰오빠는 지금도 그 장소를 떠올리기 힘들어한다. 천금보다 귀했을 그 아들을 잃고 인천 고모는 어떻게 사셨을까? 그걸 생각하면 너무 아득한 느낌이다.
두 언니들이 낳은 아홉 명이나 되는 외손자들을 키우시면서 잊으셨을까? 인천 고모가 손자들을 얼마나 귀애하셨는지 기억나는 장면이 있다. 인천 고모는 깔끔하고 단정한 외모에 음식이나 바느질 솜씨도 뛰어나셨다. 고모는 육아를 힘들어하는 큰언니의 맏아들과 둘째를 자주 뱅골에 데려오셨다. 그리고 숯불에 구운 김에 양념간장을 올려 밥을 싸서 직접 먹여 주시곤 하셨다. 대충 김밥을 만드는 게 아니었다. 밥알 하나 흘리지 않게 정성스럽게 싸 주셨다. 나는 속으로 엄청 부러워했다. 그 시절 김은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니었다. 맞은편에 앉은 조카딸에게도 쉽게 먹어보라며 권할 수 없는 고가의 음식이었다.
내 첫 발령지는 아현중이다. 부임한 첫 해 두 가지 정도 말실수를 한 기억이 있다. 첫째가 귤 사건이다. 교과서에 실린 나무 타령을 가르칠 때였다. 각종 나무의 특성을 이야기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귤이 너무 비싸 먹기 힘든 과일이었다고 했다. 오죽하면 대학 나무라고 불릴 정도였다고 설명한 것이다. 순진한 내 제자들은 다음 날 줄줄이 검은색 봉투를 들고 교무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수줍게 귤이 든 검정 봉투를 내게 내밀더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이 어렸을 때 귤을 못 먹어보셨다고 하셔서.’ 더 당혹스러웠던 건 나이 든 어떤 여선생님이 옆에서 하던 비아냥거림이었다. 귤이 먹고 싶다고 애들 앞에서 별 수를 다 쓴다고 말이다.
두 번째는 꽃에 관한 전설 이야기를 하다 달리아 꽃을 좋아한다고 말한 게 문제였다. 내게 달리아는 추억이 있는 꽃이다. 엄마는 달리아 알뿌리를 뱅골 집 지하실에 보관했다 봄에 꽃밭에 심으셨다. 뒤란에 심은 그 꽃은 색감이 곱고 예뻐 꽃이 피기를 내내 기다렸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지금도 달리아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라고. 그렇게 말했다. 다음 날 꽃집에서 값비싼 달리아를 사 들고 올 여학생이 있을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벌써 40년 전 일이니 모두 이제는 50대에 접어드는 아줌마들이다. 그 시절은 그런 학생들이 꽤 많았다. 50년도 더 전에 김이 얼마나 비싼 식재료였는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귤이나 김은 그 시절 내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먹거리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모가 나를 소홀히 여기신 건 아니다. 내가 결혼할 때 목화솜 이불을 몇 채나 해 주신 분이 바로 인천 고모셨다. 고모는 화성 여기저기를 다니시며 목화솜을 직접 구하셨다. 목화를 기르는 집들을 잘 아시는 건 한동안 그 일이 고모의 주요 소득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결혼할 무렵에는 목화를 기르는 집이 거의 없었다. 산업화로 옷감들도 석유에서 뽑을 기술이 생겼기 때문이다. 고모는 발품을 꽤 파셔야 했단다. 엄마는 힘들게 만들어 주신 이불이니 솜을 틀어서 계속 쓰라고 하셨다. 하지만 목화솜을 틀 수 있는 이불 가게들이 사라지면서 보관조차 어려운 짐이 되어 갔다.
4년 전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옥상 출입구에 솜이불을 쌓아두고 처리를 고민하고 있었다. 마침 건물 전체 집수리 공사를 하던 분들이 그걸 치우겠다고 하길래 좋다고 했다. 인천 고모가 돌아가신 지 오래전이지만 차마 엄마에게도 이불을 버렸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30년 된 이불을 나는 왜 가지고 있었을까? 그걸 마련해 주신 분의 정성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애지중지 길러 준 외손자들에게 과연 인천 고모도 그런 존재였을까? 인천 고모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고 오신 다음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는 한동안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한 마디로 당혹스러웠다. 이미 돈을 벌 정도로 장성한 고모의 외손자들이 우리 아버지에게 구포리 산에 외할머니 산소 자리를 내놓으라며 큰소리를 냈다는 거였다. 막내 누이의 장례를 치르러 가신 아버지는 화를 내셨다고 하셨다. 구포리 전체 토지 수용령이 떨어져 언제 수용될지 모른다는 게 이유였다. 그러면서 그동안 너희들은 외삼촌 산소 한 번 돌보지 않았다며 역정을 내셨단다. 적어도 외할머니 묘 자리 하나 사서 매장하는 건 너희들 책임이라고 말이다. 그랬더니 조카 손자들이 떼로 할아버지뻘인 아버지에게 큰소리로 덤벼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장례도 끝까지 못 보고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우리 아버지에게 막내 누이는 어떤 분이셨을까? 아버지는 종종 막내 누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곤경에 빠졌을 때는 빨갱이로 몰려 수원 교도소에 구금되셨을 당시였다. 아직 혼인도 하지 않은 아버지를 구해내신 분은 인천 고모셨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실제로는 큰어머니의 도움이 가장 컸다고 하셨다. 당시 수원고등법원 판사였던 그분의 사촌 오빠에게 아버지의 구명운동을 직접 하셨기 때문이다. 고모 역시 집안의 장손인 동생을 구하기 위해 누구보다 헌신적이셨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자신은 수감 90일 만에 면제형으로 재판에도 넘겨지지 않고 집으로 돌아오셨다고 하셨다. 두 분의 정성 어린 뒷바라지와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아버지는 더 어려운 시간을 오래 견디셔야 했거나 목숨을 건지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1.4 후퇴 당시 수원교도소에 수감되었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정식 재판도 없이 말이다.
아버지가 큰어머니라고 부르신 분은 화성 만석꾼 집안의 맏며느리였던 분이시다. 양어머니까지 모시고 어렵게 살던 우리 할아버지의 고생을 알고 땅을 열 마지기 주신다고 했던 분의 며느리로 우리 집과는 인연이 깊은 분이셨다.
고모님들이 살아 계셨을 때 우리 형제들이 명절마다 한 일이 있다. 두 분을 찾아 꼬박꼬박 인사를 들여온 것이다. 자가용이 생기기 전에는 버스와 전철을 몇 번이나 갈아타고도 다녔다. 일 년에 두 번 우리 집 명절의 연중행사였다. 하지만 고모님들이 돌아가시면서 중요한 끈 하나가 소멸되고 그냥 남이 된 것 같다. 먼 곳에 사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더 낫다는 말은 그래서 생겼나 싶다.
병으로 일찍 돌아가신 막내 고모부의 무덤은 사당에서 과천으로 넘어가는 남태령 고개 그 어디쯤 있었단다. 과천에 종합청사가 들어서면서 남태령 고개에 넓은 길이 생겼다. 고모부의 무덤은 방치되다 무연고 묘지로 처리되어 없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아들을 앞세운 비극 덕에 고모마저 화장되어 한 줌의 재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 산에 있던 광택 오빠 묘는 새로 마련한 청요리로 모셔왔다.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나는 인천 고모의 수줍은 듯한 미소를 떠올릴 수 있다. 만만치 않은 시집살이를 하던 엄마의 처지를 이해하고 아껴 주셨던 인천 고모의 선량한 마음 씀씀이를 나도 본받고 싶다. 분명 고모가 살아 계실 때는 고운 마음씨에 대한 보답을 제대로 받지 못하셨다. 그러나 후덕하고 선한 일생의 보답을 지금은 천국에서 받고 계심을 나는 믿고 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그분을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다정하고 고운 분이 우리들의 막내 고모라서 행운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