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남매의 요람기 - 뱅골,
두 번째 이야기

by 권영순

- 세분 고모님 이야기 1-


우리 오 남매에게는 고모님이 세 분이시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되셨다. 아버지도 우리처럼 오 남매다. 아들 둘에 딸이 셋이다. 고모 세 분은 모두 아버지의 누님들이다.

할머니 이야기에 의하면 우리 아버지 위로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단다. 얼굴이 잘 생긴 데다 똑똑했는데 어릴 때 병으로 죽었다며 자주 아쉬워하셨다. 딸만 연이어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대를 이을 아들을 얻을 방법을 구하셨다. 결국 살던 터를 옮겨 새 집을 크게 짓고 이사를 했다고 하셨다.

그곳이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뱅골 집이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전에 살던 집이 있던 곳을 연화동이라고 하셨다. 어른들은 뱅골 집터를 당시 유명한 지관이 짚어줬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과연 연화동에서 뱅골로 이사 오자 얼마 안 돼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날 자리라던 지관의 말이 맞긴 한 모양이다.

그러나 옮겨 오기 전 집터에도 장점이 있었단다. 딸들이 모두 잘 될 터였다는 것이다. 그런 집터를 떠나서였을까? 세 고모님의 삶은 모두 평탄치 않으셨다. 나는 큰 고모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아버지보다도 훨씬 연배셨으니 보기는 했더라도 내가 너무 어려 얼굴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수 있다.


30년도 더 전의 일이다. 하루는 화성으로 낙향해 계신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부산에 사는 큰 고모 아들이 서울 구경을 하고 싶다고 하니 네가 좀 안내해 주라는 부탁이셨다. 그 고종사촌 오빠의 이름이 홍백선이라고 하셨다. 백선이나 만선이라는 이름은 자주 들었던 터라 어렴풋 기억이 났다.

큰아들 진원이가 돌이나 갓 지났을까? 유모차에 아들 진원이를 태우고 남편까지 동원해 경복궁에 갔다. 그 고종사촌 오빠는 50대 중반 정도로 원양어선 선장이셨다. 다른 나라는 많이 다녀봤는데 서울 구경은 처음이라며 아주 좋아하셨다. 경복궁과 주변을 보여드렸다. 광화문을 거쳐 경복궁 근정전이며 민비가 시해된 장소도 갔다. 일본 놈들이 조선총독부 건물을 경복궁 앞에 지은 이유도 설명하며 아는 척을 꽤 했었다.


재작년 벚꽃이 한창인 봄이었다. 함께 퇴직한 선생님 한 분이 경복궁 투어를 가자며 연락을 하셨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경복궁 곳곳을 다니다 고종사촌 오빠와 왔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 부족한 설명에도 감탄하며 들어주신 분에게 진심으로 부끄럽고 미안했다. 아무리 전문가가 아니었더라도 내 안내나 설명이 부족했던 건 사실이다. 솔직히 경복궁과 관련되는 공부를 좀 더 했어야 했다.


이 글을 쓰며 그 오빠들에 대해 아버지에게 물었었다. 아버지는 그 조카들 모두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고 하셨다. 어린 시절 내가 듣기에 큰 고모는 드물게 똑똑한 분이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남편은 허랑방탕함과 외도를 일삼는 한량(? 놈팡이?)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환경을 견디지 못해 결국 큰고모님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셨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에서 큰 고모 이야기는 거의 금기였다. 다만 아버지는 큰고모가 낳은 아들들이 모두 머리가 비상하다고 하셨다. 맏아들인 만선이 오빠는 독학으로 고등학교를 마치고 수원 연탄 공장 공장장까지 했다. 그 딸은 서울대 의대를 갈 정도로 똑똑했다. 부모의 그늘이 없었던 백선이 오빠도 어릴 때부터 부산 등지로 떠돌아야 했다. 외항선 선장이 되기까지 고생도 많았다. 아버지는 큰누이 소생인 조카들이 시련을 딛고 모두 당당하게 살고 있다며 항상 대견해하셨다.


둘째 고모님은 남양 홍 씨 집안으로 출가하셨다. 큰고모님과 마찬가지로 남양 홍 씨와 혼인한 이유는 집안끼리 하는 세혼 풍습 때문이었다. 우리 증조모님도 남양 홍 씨다. 시집오시던 해 가을에 남편을 여의고 평생 수절하며 사신 열녀(?) 셨다. 그것도 스물이 되기 전이란다. 나중에 우리 할아버지를 양자로 들여 함께 가산을 일으켜 세우신 대단한 분이시다.


이렇게 우리 안동 권 씨 집안과 남양 홍 씨 가문의 혼인은 흔한 일이었다. 남양은 비봉과 지역적으로도 가깝다. 우리 오 남매는 남양의 고종 사촌들과 교류가 많았다. 고모부는 좋게 말하면 한량이셨다. 나쁘게 말하면 알코올 중독 증세가 심한 편이셨다. 조선시대 남양 홍 씨는 당당한 세도가였다. 고모부가 그 남양 홍 씨 본가의 장손이셨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술과 유흥을 즐겨하신 분이라 집안 돌보기를 소홀히 하셨던 듯하다. 당연히 둘째 고모와 가정 내의 분쟁이 잦았다.

둘째 고모는 귀가 잘 안 들리셨다. 선천적으로 장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고 한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어릴 때 중이염을 앓아 약간 난청은 있었다고 하셨다. 그러나 난청이 더 심해지신 이유는 가정 폭력 탓이 아닐까 하는 게 내 추측이다. 그때는 출가외인인 딸의 가정 문제에 친정이 참견하는 걸 거의 금기시했다. 그게 사회 분위기였다. 딸이 부당한 일을 당해도 마찬가지였다.

뱅골에 살던 어느 해 여름이었다. 할머니와 둘이 둘째 고모가 사시는 남양 시리를 간 적이 있다. 할머니는 딸네 주실 보따리를 머리에 이셨다. 차를 타고 간 게 아니라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고모네 집을 찾아 걸어가신 것이다. 개울물을 건널 때 할머니가 업고 건네주신 기억이 나니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을 것이다.

친정 엄마와 조카딸이 왔다고 고모는 야식으로 옥수수를 삶고 감자를 쪄서 내놓으셨다. 거기도 식구가 아주 많았다. 고모는 간식을 각자의 그릇에 따로 담아 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먹을 것으로 일어나는 다툼을 방지하는 목적이셨던 것 같다. 하지만 내 것은 따로 없었다. 할머니 그릇에 조금 더 담아 주시며 거기서 같이 먹으라고 하셨다. 아무리 어려도 차별당하는 것에 대한 눈치는 있다. 과수원에서 따온 복숭아를 먹거나 저녁상에서도 이런 식의 은근한 차별은 계속되었다. 나는 지금도 남양 고모가 성정이 고약하거나 경우 없는 분은 아니셨다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둘째 누이가 착하기는 해도 고집은 있다고 평하셨다.


남자들을 우대하는 풍습은 우리 집에도 있었다. 다행히 나는 딸 하나라는 이유로 이런 유형의 차별을 받아 본 적이 없다. 아니 거꾸로 역차별이 더 우세했다. 게다가 우리 집에서는 나만의 비호 세력이 분명히 존재했다. 비호 세력의 정점은 아버지셨다.

딸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셨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내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막내 외숙모님이 서울에서 놀러 오셨다. 그리고 갓난쟁이인 나를 보더니 한 마디 하셨단다. 여자애 코가 너무 납작하다고. 이런 못생긴 딸이면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고. 그 말을 엄마에게 전해 들은 아버지는 몹시 화를 내셨단다. 나중에 커서 코 높이는 수술시켜 주면 되는 데 별소릴 다 듣겠다고 하신 것이다.


60년도 더 전, 화성 뱅골 촌구석에서 이 말은 엄청 파격적이었다. 지금도 나는 닭고기의 껍질을 먹지 않는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속살만 발라 수저에 얹어 주는 닭고기를 아버지 무릎에 앉아 받아먹던 어린 내 모습이다. 내 외모를 험담하셨던 막내 외숙모님은 끝내 아들만 넷 얻으셨다. 그리고 나 같은 딸을 가진 우리 엄마를 평생 부러워하셨다는 후문이다.


2017년 여름 제주여고에 가서 논술 수업을 한 적이 있다. 꽤 긴 기간 조카딸인 인하 집에 묵었다. 평일에는 혼밥으로 삼시 세끼를 때워야 했다. 수업은 토,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인하는 새벽에 나가 밤늦게야 집에 돌아왔다. 더구나 살을 빼야 한다며 저녁을 먹지 않았다. 당시 공주대 교수로 재직해 세종에 살던 큰오빠와 통화할 일이 있어 인하가 다이어트 중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때 큰오빠는 ‘걔가 뺄 살이 어디 있어 그러냐!’며 건강을 걱정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그리고 과거 아버지를 떠올랐다.

‘아! 딸 바보도 유전인가?’ 싶었다.



아버지의 말년에 아버지에게 아쉬워한 점은 따로 있다. 아버지가 그 옛날처럼 시대를 앞서 가시는 스마트한 생각을 계속 가지셨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다. 가치관의 변화에 엄마만큼만 민감했어도 자식들에 대해 훨씬 긍지를 가지셨을 텐데.

무엇보다 자녀들과의 소통에 더 열린 마음으로 대하셨으면 좋았을 걸.


최근 조선의 마지막 왕세자 이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엄청 꽃미남이시라며 수많은 댓글을 달았다. 사실 젊은 시절 우리 아버지 사진을 보면 훨씬 미남이시다. 할머니의 선이 고운 외모를 그대로 빼닮으셨으니 당연한 일이다. 엄마는 내게도 아버지 눈매를 닮아 눈이 아주 예쁘다고 종종 이야기하셨다. 덕분에 평생 얼굴에 손을 대지 않고 이 얼굴로 살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제주에 놀러 갔을 때다. 나랑 동행하신 선생님이 인하가 고모를 많이 닮았다고 하셨다. 인하는 제 엄마를 닮아 계란형의 예쁜 얼굴을 가졌다. 당연히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라고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그 선생님 말이 눈매가 똑같다고 하셨다. 그 때야 이해가 됐다. 눈매도 유전되는 유전자의 힘을.


아버지는 뱅골 집에서 수원에 있는 서울대 농대를 자전거로 통학하셨다. 처음에는 야목에 가서 기차로 통학을 하셨단다. 엄마는 서울대 교복을 입고 교모를 쓰고 통학하는 아버지를 구경하기 위해 통학 시간이면 근방의 처녀들이 울타리 너머 몰래 구경했다고 하셨다.

아버지에게도 사정은 있다. 세월이, 그리고 혹독한 세상이 아버지에게 과거의 스마트한 생각과 사고방식을 계속 지킬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식들도 나름 자기 영역에서 열심히 노력하여 삶을 일구고 있다는 걸 엄마만큼 고마워하고 자랑스러워하셨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그게 좀 아쉬웠다.


엄마 말에 의하면 내가 태어났을 때 할머니는 딸이라고 서운해하셨단다. 그 할머니조차 나의 비호 세력이었다. 성정이 까칠해 엄마를 자주 구박하셨던 할머니도 손녀를 이기지는 못하셨다. 내가 할머니에게 들은 험한 소리 중 기억나는 건 두 가지다. 고기하고 밥을 달라는 내게 ‘저 년은 새우젓 꼬랑지라도 있어야 밥을 처먹는다.’며 역정을 내시던 기억이 하나다. 또 홍역으로 다 죽어가는 나를 위해 눈보라를 뚫고 어딘가에 가서 약을 구해오셨다고. 그 덕에 열이 떨어져 살았는데 할머니에게 서운한 소리를 한다는 원망이셨다. 그 소리를 듣고 나는 상당히 찔끔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내가 대학교 4학년 봄에 돌아가셨다. 지금도 할머니에 대해 나쁜 감정이나 기억은 없다. 세월이 흘러서 잊은 것이 아니다. 가까운 육친에게 받은 상처는 그대로 남는 법이다. 물론 나에게도 험한 소리를 많이 하셨을 거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상처로 남지 않은 걸 보면 과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가게에서 종일 장사를 하던 엄마 대신 할머니는 말년에 손녀딸과 많은 시간을 보내셔야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가장 슬퍼한 사람은 큰오빠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누가 가장 슬퍼했을까? 그건 나였다. 내가 할머니 노년의 보살핌을 크게 귀찮아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어릴 때부터 베풀어 주신 할머니의 사랑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명딸인 덕에 이런 비호 세력이 내게 존재할 수도 있었음은 인정한다. 덕분에 나는 나만의 고집과 오만도 부릴 수 있었다. 그래서였을 거다. 나는 할머니 앞에 놓인 감자와 옥수수를 보고 서럽게 울어대기 시작했다. 할머니의 눈짓에 고모는 얼른 다른 그릇에 내 몫을 따로 담아주셨다. 조카딸의 눈물에 당황했는지 고모는 분명 허둥대셨다. 하지만 이미 삐질 대로 삐진 나는 안 먹는다며 야밤인데도 할머니에게 집에 가자고 졸라댔다. 남양의 고종사촌들은 별것도 아닌 일에 울며 난리를 부리는 나를 보더니 좀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자신들이 보기에 울며 집에 간다고 떼를 부릴 정도의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나 보다. 누굴 닮았는지 성질이 지랄스럽다고 형제끼리 험담하는 걸 직접 들었으니 사실일 거다.



- 세분 고모님 이야기 2 -


안동 권 씨는 옛날부터 딸이 가문을 일으킨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 오 남매의 남자 형제들이 낳아 기른 딸들도 다들 예쁘다. 무엇보다 야무지다. 똑 소리들이 난다. 어디가서나 권가네 딸답게 당당하고 멋지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잊어버렸을 수도 있었던 어린 시절 남양 둘째 고모네서 겪었던 이야기를 소환해 낸 이유가 있다. 네 번째 근무했던 풍납 중학교는 공립에서 흔치 않은 남자 중학교였다. 당시에는 가끔 반별로 간식용 먹을 것이 생길 때가 있었다. 이 경우 정확히 분배하지 않으면 엉뚱한 피해자가 나타난다. 소심하거나 힘이 약하면 더 심한 약탈당하기 수준의 일도 발생한다. 심지어 남이 먹고 있는 것도 힘으로 빼앗는 일이 비일비재다. 먹을 것 앞에서 거의 동물의 왕국 수준으로 아비규환이다. 한창 성장 중이니 이해는 된다. 남녀 혼반이면 남학생들도 나름 관리를 한다. 여학생들에게 야비한 모습을 보이거나 심지어 진화가 덜 된 짐승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학생들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생기면 가만히 있지 않는다. 나쁘게 말하면 고자질이라도 한다. 남학생들도 1학년 때는 고자질을 한다. 하지만 철이 들고 그 행동으로 남자답지 못하다는 등의 불리한 경우를 당해 보면 절대 이르는 법이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몰지각한 행동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다 문득 떠올린 것이 어린 시절 남양 고모네서 내가 겪은 이야기였다. 그걸 일종의 인성교육 자료로 써먹었다. 어린 시절 내 행동을 자의식 과잉이라 할 수도 있다. 더구나 내가 자라던 시절에는 여성들에 대해 부당한 차별이 비일비재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할 정도였다.


<82년생 김지영>이라는 책의 주인공 김지영의 엄마가 바로 나와 비슷한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다. 거기에서도 남자 형제를 위해 희생을 강요당한 김지영의 엄마 이야기가 나온다.


어리거나 여자라는 이유로 공평한 분배에서 제외된 과거를 떠올리며 학생들 앞에서 엄청 분개했다. 화염과 분노 수준의 불을 뿜은 것 같다.


-그 옛날 어렸던 나도 먹을 것으로 차별당하는 것에 화가 나고 속이 상했다. 나를 더 화나게 한 건 차별을 해 놓고도 그걸 깨닫지 못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었다. 소심하거나 힘이 약한 것이 차별을 당하는 이유가 돼서는 절대 안 된다. 거기다 그런 일을 당해도 화도 내지 못하는 소심한 친구가 한 교실에 있다면? 당한 사람은 나처럼 평생 잊지 못할 거다. 함께 공부하는 친구 중에 이런 친구가 있다면 그 애 기분이 얼마나 비참할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너희들은 학교가 그 어느 곳보다 평등하고 공평한 곳이어야 한다고 바란다. 자신들은 공평을 그렇게 바라면서 실제 행동은 그게 아니라면 동물들과 뭐가 다르냐? -


그 시절 한 반에는 5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다. 중 3이라 단신인 나보다 20센티 이상 키가 큰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반 학생들은 별 논리도 없는 내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나중에는 반에 먹을 것이 생겼을 때 결석한 친구의 것을 따로 챙겨 두었다. 순수한 데다 공감 능력은 얼마나 뛰어난 학생들인가?


최근 연예계에 어렵게 데뷔했다 중학시절 저질렀던 학교폭력 사건으로 피땀 흘린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연예인들을 종종 본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반성하고 용서를 구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 당한 사람이 잊을 수 없는 악몽이 되기 전에 말이다. 인생의 황금기가 찾아왔을 때 과거의 잘못으로 일순 나락으로 던져지면 얼마나 억울하겠는가?


남양 고모는 아들 셋에 딸 둘을 두셨다. 안타깝게도 아들들은 아버지를 닮아 술을 좋아했다. 지금은 막내 오빠만 살아 있다. 위로 두 오빠는 술로 인해 일찍 죽었다. 술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떤 피해를 끼치는지 몸소 보여주고 말이다. 다행히 오빠의 자녀들은 잘 성장했다. 술로 인해 생길 문제의 고리를 끊은 것이다. 남양 고모 큰오빠의 아들은 은행에서 지점장을 하고 있다. 막내 오빠의 딸은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한다.


내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우리 형제들은 술로 인해 큰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100살을 목표로 엄격하게 금주와 금연을 실천하신 아버지의 솔선수범 덕이 아닐까 싶다.


고모가 사시던 남양 시리는 서해안 바닷가였다. 우리 가족이 뱅골에 살던 시절은 남양만이 간척되지 않았다. 고모네 집은 제법 넓은 복숭아 과수원도 있었다. 산비탈에 지어진 과수원 원두막에 올라가면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가까이 가면 진흙투성이 뿌연 흙물이지만 멀리서 보면 햇살에 물비늘이 반짝거리는 바다가 장관이었다. 흰 두루미들이 간간히 날아와 먹이를 찾던 들판 너머 은빛 물비늘이 반짝이는 바다. 그 풍경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남양 고모는 음식 솜씨가 아주 좋으셨다.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닐 무렵 여름 방학이면 남양 시리에 있는 고모 집에 종종 놀러 갔었다. 고모는 팥을 넣은 찐빵이나 불린 콩을 맷돌에 갈아 콩국수를 직접 만들어 주셨다. 물론 더 이상 먹을 것으로 차별을 하지는 않으셨다. 지금도 여름이 되면 고소하고 풍미 가득한 그 콩국수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그 정도로 기막힌 맛이었다.


다른 사람 말이 잘 들리지 않아 체머리를 돌리듯 머리를 흔드시면서도 조곤조곤 이야기하시던 남양 고모님. 누구보다 선량한 온유함을 지닌 분이셨다. 무엇보다 품성이 넉넉한 분이었음이 분명하다. 가정 형편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청력을 잃어 고생은 하셨지만 끝까지 종가의 맏며느리로 할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자신의 인생을 부지런히 노력하며 사신 분이 남양 고모셨다.

농장의 봄.jpg 구포리 산의 활짝 핀 매화와 복숭아꽃 유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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