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와서 엄마가 당한 어려움은 여러 가지였다. 그중 할머니가 엄마를 가장 힘들게 하셨단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시어머니를 친정 엄마처럼 모시고 싶었는데 그게 안되어 아쉬웠다고 딸인 내게 하소연처럼 이야기하셨다.
할머니는 전주 이 씨 양녕대군파 집안에서 자란 분이시다. 왕손의 후예답게 고운 외모에 음식 솜씨 또한 좋으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손수 머리를 곱게 빗고 쪽을 찌시고 옷매무새도 단정하셨다. 성정까지 까다로워 엄마가 할머니의 요구 수준을 따라가기 상당히 버거웠던 모양이다.
당시는 고부간 갈등이 생겨도 남편이 끼어들지 않는 게 미덕(?)이었다. 엄마는 가끔 할머니에게 당하는 핍박이 서러워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하셨다. 그러나 배우지 못한 분이니 그냥 네가 참으라고 해 못내 서운했다고 하셨다. 시어머니에게 말대꾸조차 할 수 없던 시절이니 엄마의 상처가 얼마나 컸을지 어린 마음에도 그저 안쓰럽기만 했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은 분유도 없던 때였다. 엄마는 큰오빠를 낳고 젖몸살을 심하게 앓아 고생을 하셨단다. 한밤에도 배가 고파 우는 아들을 위해 부엌에서 장작을 피워 가며 미음을 끓여야 했다. 분유는커녕 지금처럼 가스로 간단히 조리할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을 게 눈에 선하다.
큰오빠는 이런 기억을 가지고 있다.
- 외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동으로 만든 등잔대와 기름 종지를 가지고 오셨대. 외할머니 돌아가시고 그걸 엄마가 간직하고 계시다 시집오실 때 갖고 오셔서 거기다 내 미음을 끓여 먹였어. 위가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미음을 먹고 자라 나는 지금도 위가 좋지 않아. -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엄마는 유별나게 할머니의 꾸중을 더 참을 수 없었단다. 수원 그 어딘가에서 혼자 살아도 이것보단 덜 고생스럽겠지 싶어 도망을 가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마지막으로 갓 돌 지난 큰오빠 배를 채워주고 가려고 젖을 물리는데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졌다고 하셨다. 한참 젖을 먹던 큰오빠가 이상한 분위기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엄마 까까 사줄까? 사탕 사줄까?’ 하더니 작은 손으로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큰오빠의 혼신을 다한 달래기 연기 덕에 엄마는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하셨다. 자식 버리고 도망 가 혼자 잘 살면 얼마나 잘 살겠냐며. 그때 엄마가 도망가는 걸 감행하셨으면 우린 모두 태어나지도 못했을 것이다.
큰오빠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자신이 읽은 최초의 시를 우리에게 알려줬다.
‘ 아버님이 보시던 옛날 국어책에 실려 있던 시야.
학교 갔다 돌아오니
엄마가 없네.
엄마엄마 불러 봐도
대답이 없네.
초등학교 때였지만 이 시를 읽은 순간의 그 섬뜩한 느낌은 잊지를 못하겠더라고. 내게 그런 일이 생기면 어쩌지 하는 공포가 가슴을 저몄어. 그런데 지금 그렇게 되었네.’
엄마는 맏며느리로 큰집 살림을 하시기에 역량이나 성품이 부족한 분은 아니셨다. 불을 때서 밥을 하던 시절에도 부엌에 들어가시면 금방 먹을 것이 뚝딱 나왔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손맛이 탁월한 덕에 무슨 재료로 음식을 해도 어느 하나 맛나지 않은 게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의 손맛은 거의 타고났다는 생각이 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할머니에게 호된 시집살이를 당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나중에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엄마는 디테일에 약하셨다. 음식을 만드는 일이나 살림살이도 소소한 마무리와 깔끔한 뒷정리가 필요하다. 엄마는 아마 그것을 못하셨던 모양이다. 지금도 나는 우리 할머니에게 아쉬운 게 하나 있다.
단정하시고 고운 외모만큼이나 넉넉한 성정으로 친정 엄마를 일찍 잃고 시집오신 우리 엄마를 넉넉히 품어주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