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오남매 태몽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 더 있다. 그건 엄마의 꿈이다.
엄마의 외가는 만석꾼에 가까운 부자였다고 한다. 수지 용인에 어마어마한 땅을 가진 부자였다. 엄마의 외할머니는 딸만 셋 두셨다. 당시 법도대로 일가 중에서 양자를 들이셨다. 그 양자가 엄마 외가의 재산을 모두 물려받아 수원에 사학재단을 설립해 지금도 운영 중이다.
우리 외할머니는 왜정 당시 드물게 소학교를 다니신 인텔리셨다. 얼굴까지 폭 감싸는 장옷을 입고 가방은 하인이 들고. 그렇게 소학교를 다니셨단다. 그런 외할머니가 아들이 둘이나 되는 외할아버지와 혼인을 하시게 된 건 할머니가 양반이 아니라 중인이셨기 때문이다. 외할머니는 부잣집 장녀였지만 양반인 외할아버지의 후처라도 되시기 위해 논을 30마지기나 가지고 시집을 오셨다.
엄마는 어린 시절 외가에 갔던 일을 자주 이야기하셨다. 특히 장원이 컸는데 온갖 과실수가 심어져 있어 나무에 올라가 과일을 따먹고 놀아도 하인들이 말리지 않을 정도였다고 추억하셨다.
용인 수지의 시골인데도 우리 외할머니는 일본어로 된 신문을 종종 읽으셨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었을 것이다. 키도 후리후리 큰 편이셨는데 외할머니와 꼭 닮으셨다는 이모할머니를 볼 때마다 어떤 분이셨을지 상상이 되었다.
외할머니는 우리 엄마와 막내 외삼촌을 낳으셨다. 위로 두 분 외삼촌 중 큰외삼촌은 혼인을 하자마자 아들이 없는 큰댁에 양자로 보내졌다. 실제 집안을 이어받은 분은 둘째 외삼촌이셨다. 안타깝게도 외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셨다. 엄마가 소학교를 졸업하고 여학교에 입학하신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오니 외할머니가 시집올 때 데려오신 벙어리 하녀가 엄마를 방으로 끌고 가더란다. 그리고 이미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보여주셨다. 엄마는 그때 외할머니의 시신을 보며 너무 무서웠다고 기억하셨다. 아마 외할머니가 정을 떼고 가시려던 모양이시라며. 소학교 시절 성적이 월등히 좋았는데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시자마자 외가에서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하게 하셨다.
그때의 한은 아마 나의 대학 교육에 영향을 끼쳤을 거라 생각한다. 내 또래 여자 친척들이 모두 대학을 가지 못했는데 나만 대학을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구포리에 살던 친척들 사이에 여자가 대학까지 다니면 눈만 높아진다며 말이 많았는데 그런 압력에도 엄마는 굴하지 않으셨다. 그 말을 한 친척들은 뒷날 교사가 된 나를 보고 딸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은 걸 후회하셨다는 후문이다.
엄마만 학교를 못 다니게 된 건 아니었다. 막내 외삼촌도 상급학교를 못 가게 했단다. 막내 외삼촌은 혼자 서울로 가출해 시험(지금의 철도 고등학교)을 보고 합격증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러자 할 수 없이 학교를 보냈단다. 막내 외삼촌은 입학시험을 보러 가 아는 게 없어 ‘제발 합격만 시켜 달라’고 빽빽하게 시험지에 적으셨다. 그런 답지도 당시에는 통한 모양이다. 지금이야 부정 입학이라며 난리가 날 일이다. 나는 어릴 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외할머니처럼 엄마도 일찍 돌아가실까 봐 겁을 냈다. 엄마가 세상의 중심이던 시절이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엄마의 태몽은 탐스러운 사과 5개였다. 크기도 컸지만 때깔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랐단다. 꿈에서 엄마는 외가 후원에 있던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고 있었다. 새빨간 사과를 따 앞치마에 담고 있는데 우리 할아버지의 큼큼하시는 소리가 들려오더란다. 시집온 지 얼마 안 돼 아직 시아버지가 어렵게 느껴지던 시기였다. 얼른 방으로 돌아와 아랫목 이불에 사과를 넣어두고 할아버지가 지나가신 다음 살며시 이불을 들쳐봤단다. 그랬더니 나란히 놓인 사과 다섯 개 중 가운데 것 하나만 움푹 파인 사과였다는~.
일종의 예지몽일까? 우리는 5남매로 태어났다. 가운데 움푹 파인 사과는 셋째로 태어난 딸인 나였다니. 어릴 때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런 예지몽이 실현될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