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부모님이 선을 보는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날 새벽에 꿈을 꾸셨단다.
뱅골 대청마루 댓돌 아래 새끼 백호 5마리가 오글거리는 꿈이었다.
우리 오 남매가 태어나고 유년시절을 곳은 뱅골에 있는 집이다. 꿈이 얼마나 선명했는지 할아버지는 그냥 넘기지 않으셨다. 선을 보러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향해 오늘 만나는 아가씨와 무조건 결혼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 평소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하려는 일을 말리거나 불필요한 조언을 하시는 분이 아니셨다. 오히려 아들인 아버지의 의견을 상당히 존중해 주시는 분이셨다.
할머니 말은 이랬다. 선을 보고 돌아오신 아버지는 엄마를 70점이라고 하셨단다. 아버지는 아직 대학생이라 혼인이 내키지 않아 거절하려고 하셨다. 그러나 새끼 백호 5마리는 아들 다섯을 의미한다고 굳게 믿으신 할아버지의 드문 고집을 어기긴 어려웠나 보다.
당시는 집안 간의 신뢰도 중요한 시대였다. 아버지는 암묵적으로 이루어진 혼사를 함부로 내치기 어려웠다고 하셨다. 결국 두 분은 혼인을 하셨다.
성격 깐깐하신 할머니는 엄마에게 만만치 않은 시집살이를 시키셨다. 힘든 시집살이를 막아주신 분은 주로 우리 할아버지셨다. 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하셨을지 나는 알 것 같다. 엄마는 두고두고 그런 할아버지에게 고맙다고 하셨다.
농사의 규모가 제법 있어어 일이 아무리 많아도 할머니는 밭일을 거의 하지 않으셨다. 집안 살림만 하라고 할 정도로 할머니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던 할아버지다. 그러나 할머니의 타박에 가까운 잔소리가 선을 넘는다 싶으면 할아버지는 큰기침으로 은근히 압박을 주시며 막아주곤 하셨단다.
이런 할아버지도 노년 치매로 고생이 많으셨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입으셨던 옷은 한복이었다. 요즘처럼 빨래가 쉬운 옷이 아니었다. 우리가 제기동에 살 때 평생 정든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주한 터라 할아버지의 치매 증세는 갈수록 심해졌다. 그것으로 인해 옷에 실수도 자주 하셨다. 더러워진 옷을 한 번 벗어 놓으시면 빨래 감만 드럼통만한 고무 대야 한 가득이었다. 요즘같이 성능좋은 세탁기도 없었다.
집안일을 돕는 가사도우미 언니들이 있을 때도 그 일은 고스란히 엄마 몫이었다. 엄마는 힘겨운 하루 장사를 마치고 밤늦게 돌아 오셨다. 심신이 고단하셨을 텐데도 고무대야 가득 든 할아버지 빨래를 군소리 한 마디 없이 하셨다.
젊은 시절 할아버지에게 받은 사랑과 은혜를 이렇게 갚으신 것이다.
할아버지는 태행산과 왕재봉의 기운을 담은 백호 다섯 마리의 성장을 보지 못하고 1976년에 돌아가셨다. 고향을 떠나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도시로 이주해 생애 마지막을 보내시게 한 죄송함. 엄마는 할아버지에 대한 죄송함을 자주 표현하셨었다.
그래서 더 기를 쓰고 우리들의 공부 뒷바라지에 최선을 다하신 게 아닐까?
오남매 중 막내는 노동부 이사관으로 근무하다 퇴직했다.
"나는 종암동(제기동) 집에서 할아버지와 같은 방을 썼어. 그래서 할아버지의 치매를 생생하게 기억해...길을 잃어 찾아 다녔던 기억, 골패를 하시던 기억, 냄새가 진동했던 솜이불 기억 등등.
퇴직하고 치매후견인이라는 봉사를 하는데, 그 당시 기억이 큰 영향을 미쳤지.
치매라는 질병이 얼마나 가족에게 큰 부담인지, 당시 어렸던 나도 알겠더라고... 치매는 가족도 역활을 해야 하지만, 국가가 체계적으로 뒷받침해야 하는 질병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어."
한때는 화성군에서 누구보다 정직하고 의지가 강한 분으로 소문이 자자하셨던 할아버지의 노후가 이렇게 힘겨웠으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사회적으로 대성할 손주를 다섯 얻을 것이라는 할아버지의 꿈은 틀리지 않았다. 심지어 은퇴를 해서도 할아버지를 기억하고 남을 돕기 위해 노력하는 손주가 있으니 말이다.
가족과 관련되는 기억은 오래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 우리 오남매는 각자 할아버지의 노년에 대한 기억을 각자의 방식대로 삶에 적용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