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는 글 삽화: 권세안 감수 및 자료:권정안, 권호안
- 나는 매일매일 충분히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나는 남은 생 동안 간절하게 무엇을 하고 싶은가? - <한동일, 라틴어 수업 중에서>
가족 이야기를 쓰는 5년 동안 그토록 바라던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34년 만이다. 햇살 찬란한 오전에 음악 방송을 들으며 혼자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 그게 내 오랜 꿈이었다.
직장에서 또는 가사와 육아로 정신없이 보내던 내게 자투리라도 남는 시간이 있었나? 여유와 한가를 누리는 일이 가능한 일이기는 했나? 집은 오랜 시간 나에게 휴식을 제공하지 못했다. 대다수 일하는 여성들처럼 집은 퇴근하는 곳이 아니었다. 가사와 육아를 위해 다시 출근하는 곳이었다. 그 일에는 공휴일도 없었다. 몸이 천근이라도 나를 기다리는 가족에게 제공해야 할 편안한 공간과 음식 그 외에도 필요한 것들은 항상 무한 대기 중이었다.
그것들은 왜 여자에게만 주어지는 일과인가? 여자도 직장에 나가 만만치 않은 강도의 노동을 하고 수입을 얻는 데도. 나는 이런 부당함을 부당함이라 생각지도 못하고 살아왔다.
그렇다면 나의 엄마나 할머니는 나보다 더 평등하고 존중받는 삶을 사셨을까? 가정 내에서의 의사 결정에 거의 영향력도 없이 노동력만 제공하신 건 아닐까?
우리 엄마가 하시던 말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 여자는 봉제사와 남편과 시조부모 봉양이 제일 중요하다고. 일단 시집을 가면 그곳에 뼈를 묻을 생각을 해야 했다고.-
당시에는 드물게 신식 교육의 기회를 어느 정도 제공받았던 엄마도 이런 소리를 하셨다. 엄마도 감정이나 이성이 있으셨는데(지금도 인정하지만 엄마는 놀랄 정도로 진보적인 사고 방식과 지력을 가지고 계셨다) 그걸 시집살이를 하시면서 얼마나 존중받으셨을까? 자신의 감정과 관습 사이에서 엄마가 느꼈을 간극은 얼마나 컸을까? 아마 그 괴리감이 부당한 시집살이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탈출해 새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엄마는 탈출을 감행하지 않으셨다. 자식 눈에서 뽑아야 할 눈물을 누구보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계셨으니까. 엄마 자신도 외할머니가 돌아가심과 동시에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해 본 사람이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자식 버리고 가는 사람들은 이해 안 된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셨다.
엄마의 그런 삶의 방식은 나에게도 일종의 지표가 되었다. 아무리 사는 게 힘들어도 엄마만큼 힘들었는가 하고 비교하면 당장 꼬리를 내린 적이 많았다. 기준점을 엄마에게 두고 나를 살펴보면 늘 나는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정도쯤이야!’하며 기운을 내 툭툭 털고 일어설 수 있었다. 삶의 굴곡마다 생기는 허들이 훨씬 가볍게 느껴지는 마법이 거기에 있었다. 나는 이게 가족에게서 배우는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내 자식들이, 조카들이 이 글을 읽으면서 삶의 굽이굽이에서 만나는 어려움을 너끈히 돌파해 가며 살아갈 힘을 얻기를. 그게 가족 이야기를 기록하는 내 간절한 축원이며 소망이다.
사실 지금에야 고백하건대 내가 누리는 것들의 대부분은 부모님과 조부모님들의 헌신과 희생 덕분이었다. 부족함 많은 내가 어디 가서 선생님 소리를 들어가며 평생 직장생활을 할 수 있었겠는가? 물론 교직이라고 해서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34년 동안 이렇게 사랑스러운 영혼들이 있을까 싶을 정도의 제자들을 수없이 만났다. 심지어 눈물 흘리며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조차도 귀여워 안아주고 달래주고 싶어 손이 근질거렸다.
'하느님은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아신다면서 왜 자신의 괴로움은 몰라주시고 해결해 주시지 않느냐?'며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여학생이 때때로 기억난다. 그 말을 하면서 눈물 콧물을 흘리는 모습이 어찌나 귀엽고 사랑스러웠는지. 앞에서는 차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지만 슬쩍 안고 토닥거리며 미소를 지었던 기억을 떠올리면 나도 좀 사이코적인 성향이 있는 게 아닌가 싶다.
-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내 절망이나 어려움도 지금 돌아보면 코웃음이 나온다. 뭐 그런 일에 그렇게 신경을 쓰고 잠을 못 자고 고민했나 생각하니 부끄러울 지경이다. 불안과 절망을 내일로 미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세월이 흐르며 사람들의 의식이 조금씩이라도 변화가 있었다는 점이다. 가정과 사회에서의 변화를 우리 가족들은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였다. 아마 엄마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엄마는 배움에 있어 정말 적극적이셨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지역사회에서 만나는 타인과의 소통에 그것을 적극 활용하셨다. 덕분에 우리들은 사회 변화에 누구보다 더 민감하게 적응하며 진취적인 가족들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내 남은 생의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하며 살고 싶은가? 이 질문으로 돌아가면 여전히 마음이 무거워지고 가슴이 먹먹해진다. 구포리 산에서 보내신 엄마와 아버지의 나날을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두 분은 내 앞에서 이런 삶의 모습을 몸소 보여주셨다.
가족을 끊임없이 사랑하고 매일매일 열심히 사시는 모습.
거기에 더해 나는 한 가지를 추가하고 싶다. 기록과 창작이다. 아버지도 기록을 하셨다. 안타깝게도 그 기록은 사실의 나열이라 타인이 읽기에 가독성이 너무 약하다. 나는 엄마의 감수성을 많이 닮았다. 이야기를 좋아하고 책 읽기도 쉬지 않는 편이다. 거기에 쓰기 훈련도 받았다. 그걸 이제 조금씩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일을 하고 싶다. 그 시작이 바로 가족 이야기다.
어느 가족에게나 시대와 환경에 따라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며 살아온 이야기가 있다. 그런 이야기를 자녀들은 듣고 자란다. 그리고 자신의 삶 속에서 반추된 기억을 토양으로 삼아 새로운 삶을 엮어낸다. 한국 사람만큼 혈연의 중요성을 절감하며 살아가는 민족은 드물다고 한다. 우리 가족도 마찬가지다. 혈연을 통한 연대의식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배우고 자랐다. 여기에 기록된 이야기의 줄기도 거기에서 뻗어 나왔다. 그래서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자손들 삶의 터전을 가꾸어 풍요로운 가지와 잎이 귀한 열매를 맺을 것을 기원하신 부모님과 조부모님의 기록이다. 더불어 당당한 사회인으로 성장해 부모의 역할까지 마무리해 가는 오 남매의 기록이다.
돌아보면 즐겁고 행복한 일들도 많았다. 때로는 영광의 자리도 있었다. 물론 견디기 힘든 순간도 많았다. 지금도 눈물이 핑 돌거나 마음이 먹먹해질 일도 부지기수였다. 기억의 한계로 그걸 다 기록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잊혀갈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전해져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오 남매의 자녀들에게 힘이 되고 또 다른 전설이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크기에 나름 열심히 기록했다.
내 기억이 정확할까? 사실 이 문제는 의미가 없다. 부모님과의 추억을 정리하는 것은 내 기억의 정리다. 다만 그 기억을 공유하고 확인해 주실 분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그게 아쉬울 뿐. 이 작업은 60년이 넘는 긴 세월을 함께 한 부모님에 대한 딸의 헌사이자 살아생전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과정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꼭 필요한 치유의 과정이겠지.
지금은 거의 전설처럼 느껴지는 엄마의 이야기지만 내 기억이 생생한 이유가 있다. 나에게는 지난 34년 동안 갖가지 이유로 이야기를 조르는 중학생 제자들이 매년 수백 명이었다. 당장 예화가 급하면 가끔 나의 어린 시절 들었거나 경험했던 기억들을 꺼냈다. 해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복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옆 반에서 해 준 이야기를 우리는 왜 안 해 주느냐며 따라다니던 제자들. 되돌아보니 그들은 고맙게도 내 기억을 재생해 내도록 돕는 애청자였다.
경기도의 화성군이라는 지명은 특별한 유래가 있다.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정조의 지극한 효심을 기리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자란 비봉면은 봉황이 천리를 날기 위해 날개를 펼치기 시작하던 곳이다. 서해안 굽이굽이 갈매기가 드나드는 포구로 이루어진 마을 구포리는 봉황의 휘황한 날개 아래 있었다. 아득한 옛날부터 천신제를 지내던 태행산 자락이기에 왕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양녕대군도 그곳에 터를 잡았다. 사람들은 그 터를 왕자가 살던 봉우리, 왕재봉이라 불렀다. 우리들은 태행산과 왕재봉의 기운을 받아 태어나고 자랐다. 내 이야기는 바로 이 마을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