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을 이겨내는 힘

by 권영순


일제의 수탈과 이어진 6.25 전쟁은 물자 부족으로 많은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땔감도 그중 하나였다. 산에는 땔감으로 쓸 나무가 없었다. 일제 치하부터 ‘붉은 산’이라는 소설이 있을 정도였으니 짐작할 만한 일이었다. 게다가 이어진 6.25 전쟁은 산야를 불태워 버렸으니 오죽했으랴 싶다.


바로 그 시절 뱅골 우리 집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다. 전쟁이 끝나고 갖가지 사연으로 피난 갔다 돌아오지 못한 집이 꽤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빈 집을 헐어 땔감으로 사용했다. 당시는 흔한 일이었단다.

엄마가 시집오셨을 당시 우리 집은 대식구였다. 식구가 이십 명이 넘었다. 연탄도 석유도 가스도 없던 시절이었다. 나무가 유일한 땔감이었다. 할아버지는 가끔 빈 집을 헐어 파는 걸 땔감용으로 사 오셨다. 가족이 많으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둘째 오빠를 낳기 얼마 전 아버지는 군에 입대하셨다. 아버지 없이 작은 오빠를 낳은 그 무렵 어느 날이었다. 할아버지는 장독대가 있는 뒤쪽 울안에 빈 집을 헐어 파는 땔감을 우차로 실어 와 가득 쟁여 놓으셨다.


문제는 그날 밤부터 일어났다. 밤마다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소리는 땔감을 쌓아둔 뒤쪽 울안에서 들려왔다. 방아 찧는 소리 비슷했다고 하셨다.

‘쿵더쿵! 쿵더쿵!’

밤마다 들리는 그 소리는 집안 식구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넣었다. 집안 어른인 할머니부터 머슴들도 겁을 먹었단다. 강단이 보통 아니셨던 엄마는 캄캄한 어둠을 무릎 쓰고 그 소리의 출처를 찾아 울안을 직접 살피러 다니셨다. 해가 질 무렵이면 다른 식구들은 아예 문밖 걸음을 하지 못할 정도로 겁을 내셨는데도 말이다.


전기도 없던 시절. 호롱불도 아껴 써야 할 때였으니 캄캄한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심리적 공포는 상당했을 것이다.

방아소리가 밤마다 들리면서 태어난 지 얼마 안 지난 작은 오빠가 갑자기 고열이 나며 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군대에 가 없고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들은 아프고.


그런 어느 날 밤 엄마는 꿈을 꾸셨다고 하셨다. 엄마가 내게 들려준 꿈의 내용은 이렇다.


‘부엌에서 한창 밥을 하고 있었어. 막 가마솥 밥이 끓을 무렵이었을 거야. 솥뚜껑이 들썩거리는 게 꿈에도 선명하게 보였으니까. 그때였지. 아랫집에서 우리 집으로 올라오는 야트막한 비탈길 있잖니? 그 길을 따라 소복을 입은 아낙이 어린 사내아이 손을 잡고 올라오더라. 그러더니 중문으로 들어와 부엌에 얼굴을 배꼼 들이미는 거야. 그러더니 뜸을 들이는 밥을 먼저 달라는 거야. 꿈속인데도 부아가 났어. 어르신들 밥도 아직 안 차려 드렸는데 싶었지. 엄마가 '신 새벽부터 와서 밥을 달라느냐.'며 가마솥에 불을 때던 부지깽이로 휘휘 쫓아버렸어. 그 아낙이 엄마에게 눈을 흘기며 새댁 인심이 사납다고 구시렁대면서 올아왔던 그 비탈길로 도로 내려가더구나. 그 꿈을 꾸고 일어나니 솜이불이 흠뻑 젖어 있더라.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몰라. 놀라 일어났는데 그 오밤중에 휴가를 얻은 아버지가 불쑥 집에 온 거야. 그리고 아들이 고열로 생사를 오가는 걸 보더니 바로 주사를 놓고 약을 먹였어. 까무룩 고열로 다 죽어가던 오빠를 너희 아버지가 바로 살리더구나.’


무슨 전설 속 이야기 같은 데다 우연의 일치라 하더라도 우리 집에 전해지는 이 이야기는 어린 시절 나를 매료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 엄마는 소복을 입은 여자와 아이를 근심과 병이라고 풀이하셨다. 근심과 병을 본인의 강단으로 이겨내신 것 같다며. 하지만 엄마 이야기를 들은 나는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우리 어린 시절 밥때가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거지들이 있었다. 엄마는 절대 그분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셨다. 거지들이 동냥을 오면 툇마루에 앉히고 작은 상에 밥을 차려 먹고 가게 하셨기 때문이다. 어렸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꿈에 거지들이 나오면 야박하게 굴어야 하는데 그걸 못하면 어쩌지 하며 쓸데없는 고민을 하곤 했다.


엄마의 그 꿈 이후 신기하게 밤마다 들리던 방아 찧는 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단다. 작은 오빠의 고열은 당시 조치원 국군 통합병원에서 의무병으로 근무하시던 아버지의 주사와 약 덕분에 괜찮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보니 병을 이겨내는 것도 사람의 마음에 좌우된다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막연한 두려움이 병을 키우는 걸 본 적도 있기 때문이다.

KakaoTalk_20210918_134815241_01.jpg 화성 분면(오남매 오대조 큰할머니 묘소)에 있는 산소에서 벌초를 하는 셋째와 막내. 아직도 벌초를 직접 한다.


keyword
이전 02화할아버지의 예지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