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남매의 요람기 - 뱅골,
네 번째 이야기

by 권영순

뱅골 시절 우리 집 가정교육의 핵심은 무엇이었을까?

난 한 마디로 ‘우애’였다고 생각한다. 충이나 효는 분명 아니었다. 우리는 무슨 잘못을 했건 상관없이 공동 책임을 졌다. 남매 중 누군가 잘못을 저지르면 벌도 함께 받고 종아리도 같이 맞았다는 뜻이다.


뱅골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구포 2리 노인회관 근처에 제법 규모가 큰 배 과수원이 있었다. 지금은 배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밭으로 바뀌었다. 그 사건에 연루된 오 남매는 나까지 셋이다.

추석이 좀 지났을 무렵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다 큰오빠와 작은 오빠가 무슨 생각인지 배를 따 먹자고 했다. 왜 그날 학년도 다른 셋의 하교 시간이 같았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 역할은 망보기! 조마조마했지만 우리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배를 따 몰래 먹어치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거의 완전 범죄 수준이었다. 그리고 까맣게 그 일을 잊어버렸다.


설 명절이 다가오면 동네 아줌마들은 파마를 하는 미용사를 마을로 불렀다. 일종의 야매(?)였다. 단체로 파마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누군가 우리 남매들의 비행을 엄마에게 알려 주었다. 동네 사람들은 우리 오 남매를 공부 잘하는 모범생이라며 칭찬해 왔다. 심지어 큰오빠는 비봉 초등학교 반장님이었다. 배를 따는 걸 주인이 직접 본 모양이었다. 우리가 딴 배라야 간이 작아 겨우 서너 개였을 것이다. 그분은 심각하게 피해를 끼치며 서리를 한 것도 아니고 애들이니 그럴 수 있다고 모른 척했단다.


엄마에게 그 말을 전해 들은 아버지는 그날 저녁 우리를 소집했다. 마루에 나이 순서대로 세워놓고 그 사건에 대해 물으셨다. 거짓말도 해 본 놈이 한다고 별로 그런 일에 소질이 없는 우리는 사실대로 그 일을 고백했다. 일을 저지른 셋이야 맞아도 할 말이 없다. 문제는 졸지에 날벼락을 맞은 셋째와 막내다.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종아리는 똑같이 맞은 것이다. 여자라고 나만 매 맞을 숫자에서 반을 감형해 주셨다. 형제간의 우애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장황한 설교까지 곁들인 건 덤이다. 아마 저지른 잘못에 대한 훈계보다 더 길었을 것이다.

당시 아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부모의 무차별적인 구타가 흔했지만 거의 문제 되지 않던 시대였다. 심지어 화풀이 대상으로 이유 없이 맞는 일도 허다했다.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매를 맞는 이유를 설명이라도 해 주셨다. 무엇보다 신체의 아무 곳이나 함부로 때리지 않으셨다. 종아리 외에는.

아버지는 우리들의 집안일 돕기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다

아버지는 공동 책임을 왜 그렇게 강조하셨을까? 그건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좀 전설에 가까운 이유다. 우리가 잘 아는 우애 깊은 형제 이야기가 있다. 추수를 마친 달밤. 형제는 서로의 낟가리에 자신의 나락을 날아다 준다. 형은 갓 결혼한 동생의 살림이 부족할까 봐. 동생은 식구 많은 형의 살림이 힘들다고. 요즘은 얼마 안 되는 재산 때문에도 싸우는 사람들이 흔하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말 그대로 전설 따라 삼천리 수준의 이야기겠지만.


우리 외할아버지 형제들은 이야기 속 형제보다 더 우애가 깊었단다. 원래 우리 외가는 가산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외가는 용인 수지에 있었다. 엄마는 어린 시절 외할머니와 수지에 있는 광교산에 자주 가셨다며 그곳에 대한 추억이 많다고 하셨다. 산나물이나 버섯을 채취하러 그곳을 다니신 것이다. 외할머니는 부잣집 딸이셨지만 산나물이나 버섯들을 잘 아셨단다. 심지어 어디에서 어떤 버섯이 잘 자라는지도. 엄마는 그렇게 따 온 버섯을 넣고 외할머니가 된장찌개를 끓이면 소고기를 넣고 끓인 것보다 더 맛있었다고 하셨다.


엄마와 함께 구포리 뱅골에 더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나도 산나물이나 버섯 같은 자연산 먹거리를 찾는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을까? 장성해 가정을 이룬 다음 봄이면 엄마를 모시고 강원도 오대산을 가거나 화성의 장덕리를 다니며 겨우 취나물 몇 가지 익혔다. 실생활에서 배울 수 있는 것도 이렇게 단절되는구나 싶어 아쉽기만 하다. 나에게는 딸도 없으니...

그나마 버섯은 식용인지 독버섯인지 구분조차 하지 못한다. 독버섯 중 한 가지만 확실히 아는 게 있다. 파리버섯이다. 어렸을 때 엄마와 산에 가면 분홍색의 어여쁜 자태를 가진 버섯을 땄다. 그것을 이가 깨져 못 쓰는 사기그릇에 적당히 찢어 놓으면 파리들이 몰려든다. 모여든 파리들은 버섯의 수액 속에서 죽었다. 말 그대로 천연 파리 잡이였다. 파리 버섯은 나에게 특별한 교훈을 주었다. 모양과 색만 예쁘다고 다 좋은 건 아니라는.


외할아버지의 형제는 모두 세 분이셨다. 그분들의 우애는 용인 수지 지역에서 소문이 자자할 정도로 좋으셨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광교산 깊은 산골에서 나무를 해 지금의 양재동에 오셔서 파셨다. 당시는 말죽거리라고 부르던 곳이다. 전답이 부족해 땔감을 팔아 가족을 부양하신 듯하다. 용인에서 양재는 소달구지에 땔감을 싣고 첫새벽에 길을 나서면 나무를 팔고 한 밤중에 돌아올 수 있을 정도의 거리였다.

광교산이 그 당시 얼마나 깊은 산골이었는지 알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나는 엄마에게 그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다. 광교산 골짜기에 외가의 밭이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갑자기 스산한 바람이 뒤에서 불며 호랑이가 쫓아오는 듯한 느낌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때까지도 사람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것 중 하나가 ‘호환’이었다. 과거에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히는 것도 타고난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한 여름 더위가 심해지면 우리 가족은 마당에 멍석을 펴고 그 위에 요를 깔고 잠을 잤다. 지금도 밤하늘에서 쏟아질 듯 반짝이던 별들의 기억이 생생하다. 마당에 누워 올려다보면 은하수가 바로 우리 머리 위에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모기를 쫓기 위한 화톳불의 연기가 하늘로 향하는 모습을 바라보다 나는 엄마에게 자주 옛날이야기를 졸랐다. 엄마는 견우와 직녀 이야기며 삼천 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낙화암 이야기를 해 주셨다.

호환을 운명으로 타고 난 사람들 이야기도 있었다. 호환을 타고 난 사람은 마당에 여러 사람이 함께 잠들었더라도 그 사람만 콕 찍어 없어진단다. 여러 사람들이 그를 가운데 둘러싸고 자도 소용없다고 하셨다. 주변에 어지럽게 찍힌 호랑이 발자국으로 호랑이가 물어간 걸 알 수 있었다나? 우리가 뱅골에서 살던 때는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한데서 잠을 자도 불안하지 않았다. 호랑이 열 마리가 와도 물리쳐 줄 엄마 옆에 있었으니.


엄마 이야기에 의하면 외할아버지는 등 뒤에서 따라오는 호랑이의 존재를 감지하셨지만 침착하게 행동하셨단다. 약점을 보이지 않으신 것이다. 이윽고 마을이 보이자 온 힘을 다해 뛰시며 집에서 기르는 개를 소리쳐 부르셨다. '백구야~!' 하고. 호랑이가 가장 좋아하는 먹이가 바로 개였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를 슬슬 따라오던 호랑이는 달려오는 개를 보자 마을 주변 개울을 비호처럼 날아 단숨에 물고 광교산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주인이 부르자 기쁘게 달려왔을 개가 불쌍했다. 당시 개는 식용이었다. 얼마나 두려우셨으면 입고 있던 옷이 흠뻑 젖었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셨단다. 엄마는 정말 그 이야기를 실감 나게 해 주셨다. ‘백구야~!’하고 부르는 소리까지 곁들여서.


나는 외할아버지를 생전에 뵌 적이 없다. 오래전 고인이 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엄마가 밤마다 방아 찧는 소리가 들려도 겁 없이 뒤란을 살피러 다닐 수 있었던 강단은 외할아버지를 닮아서라고 생각하곤 했다.


양재동은 과거 지방 각처에서 올라오는 말들이 잠시 숨을 고르며 먹이를 먹던 일종의 쉼터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양재동을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지방 각처 다양한 물건들을 가지고 와 팔던 양재동 말죽거리에서 할아버지는 정성껏 장만한 장작들을 땔감으로 파셨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실 때면 소금에 절인 고등어를 한 손 사셨다. 소를 끌고 용인 수지로 돌아오실 무렵이면 캄캄해져 깊은 밤이 되었다. 그때마다 동생이나 형이 꽤 멀리 마중을 나오셨단다. 외양간에 소를 집어넣고 소죽을 챙기고 돌아가는 외할아버지 형제들 손에는 고등어 토막이 들려 있었다. 먹을 것이 많은 가운데 토막은 형에게 그리고 가장 먹을 것이 없는 꼬리나 머리 부분은 막내가. 고등어 한 손이라야 겨우 두 마리인데 그걸 그렇게 분배해서 나눠 먹었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엄청나게 짠 내 나다 못해 눈물겨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말미에 꼭 붙어 다닌 엄마의 설명이 있었다. 콩 한쪽도 나눠 드실 만큼 우애가 남다르셨다는.


바다가 먼 광교산 골짜기에서 고등어는 별미 중 별미였을 것이다. 대학을 다닐 때 미당 서정주가 쓴 수필집을 읽은 적이 있다. 미당의 고향은 전라도 고창 부안의 선운리라는 곳이다. 미당의 수필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 마을에는 여기저기 산골을 돌며 소금을 팔러 다니던 사람이 있었다. 소금을 다 팔고 집으로 돌아올 때 그는 늙은 아버지를 위해 잘 말린 황태를 한 마리씩 사다 드렸다. 이빨이 다 빠져 잇몸만 남은 아버지는 아들이 사다 준 황태를 뼈까지 남김없이 녹여서 드셨다. 강원도 황태 덕장에서 나온 황태니 전라도 부안에서는 얼마나 귀한 음식이었을지 짐작은 간다. 모두 너나없이 먹을 것이 부족했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금 외할아버지의 직계 후손들은 용인 수지의 땅이 수용되면서 보상금으로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보상금을 얼마나 받았는지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다. 제일 큰 외삼촌 네는 사과 박스에 돈을 넣어 베란다에 보관하고 있다 어디에 땅이 나왔다면 바로 달려가 샀다는 소리였다. 사과 상자에 돈을 넣어 뇌물로 준 사건으로 전국이 떠들썩한 때였다. 평생 우리의 학비로 고생하셨던 엄마의 입장에서 부러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물론 보상금만으로 재산을 불린 건 아니다. 둘째 외삼촌 네 순진이 언니는 음식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극한 직업’이라는 영화에 수원 왕갈비 치킨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수원을 대표하는 음식이 ‘수원 갈비’다. 그 ‘수원 갈비’가 바로 순진이 언니가 만든 브랜드다. 평범한 남자에게 시집가 음식 솜씨 하나로 가산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순진이 언니다.

내가 중학생 때다. 우리 집에 놀러 온 언니는 신들린 솜씨로 우리에게 자장면을 만들어 주었다. 자장면은 중국집에서나 먹을 수 있다고 믿었던 우리에게 문화적 충격을 준 사람이 바로 언니였다. 언니는 스스로 공부 머리는 없다며 공부 잘하는 우리 오 남매들을 부러워했다. 그러나 음식 솜씨 하나로 재능 발휘를 제대로 한 언니를 나는 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스포츠 센터에 운전학원에 다양한 영역에서 사업체를 운영하는 외가 재물복의 근원이 형제간 우애에서 나온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외가 식구들은 아버지들의 유일한 여자 형제였던 우리 엄마를 명절마다 찾아오곤 했다. 아버지는 그런 외가 식구들의 행동을 고운 마음 씀씀이로 보셨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자주 외할아버지 형제들의 우애 깊으심을 강조하며 너희들도 그렇게 살라고 이야기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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