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남매의 요람기 - 뱅골,
다섯 번째 이야기

by 권영순

아버지가 우리에게 우애를 강조하신 두 번째 이유는 좀 더 실제적이다. 아버지 자신의 경험이 그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뱅골에 새로 집을 짓고 이사를 감행하신 이유는 아들을 낳기 위함이었다고 들었다. 뱅골은 전주 이 씨의 집성촌이다. 그 한가운데 땅을 마련해 집을 짓고 이사를 들어가신 것이다. 이사 탓만은 아니겠지만 세 분 고모님 모두 평탄한 삶을 사시지 못했다. 그렇다고 새로 이사 가서 낳은 두 아들의 삶은 평탄했나?


우리 아버지는 엄청난 노력가였음이 분명하다. 가문을 일으킬 맏아들이라는 사명감이 장난 아니셨다. 내가 어렸을 때 인천 고모는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버지가 수원에서 서울대 농대를 다니실 때 이야기였다. 어쩌다 고모가 동생을 보러 수원에 가보면 밤새 ‘쏼라’ 거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그 정도로 열심히 공부를 하셨다. 영어도 소리 내어 읽어가면서 외우던 아버지의 공부 습관을 그렇게 표현하신 거다.


어린 시절 내가 보기에 작은 아버지는 나이만 들었지 평생 늦둥이 막내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으로 보였다. 평생 동생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늘 부담감을 가지셨던 아버지는 그런 전철을 우리가 밟지 않기를 바라신 것 같다. 자식들 앞에서 작은 아버지와의 다툼을 자주 보일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상황이 지금 돌아보면 안타깝기만 하다.


우애 이상으로 부모님이 우리에게 공을 들인 부분이 있다. 나는 오빠들보다 늦게 태어났기에 둘이 어떻게 자랐는지 잘 모른다. 다만 뱅골 검다지 골짜기에서 우리 집의 가정교육이 특별했던 건 사실이다. 엄마는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 유별났다고 하셨다. 동네 사람들이 별나다는 소리를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 농작물을 살피러 텃밭을 나가실 때도 오빠들을 팔에 안고 나가셨다. 지금은 아버지로서 너무 당연시할만한 행동이다. 그러나 60년도 더 전에는 엄격한 아버지가 대세였다. 그런 시대였으니 별난 행동으로 보인 모양이다. 가정교육 역시 다른 집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한 것들이었다. 사실 근방에서 뚜르르 하게 소문이 날 정도로 남달랐다.

뒤로 보이는 집이 뱅골 검다지에 있던 집이다

이 교육들은 아버지 성격대로 철저하고 성실하게 이뤄졌다. 성실하다 못해 지나치게 꼼꼼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다.

첫째가 체력 단련을 위한 아침 운동이었다. 막내가 태어나면서 5남매가 완성된 날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날은 제헌절이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오빠 둘은 기념식을 하러 학교에 갔다. 막내가 태어나길 기다리며 나는 뱅골 집 안마당과 바깥마당을 빙빙 돌았다. 동생이 태어나는 울음소리를 기다린 것이다. 두 오빠가 기념식을 마치고 집으로 올 때였으니 시간은 거의 11시 정도였던 것 같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셋째가 어디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우리 집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에 부엌 옆으로 커다란 창고까지 있었다. 대문 샛문 그리고 우물로 나가는 문까지 출입문만 세 군데였다. 그때까지도 행랑채에는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데려오셨다는 종들이 살고 있었다. 그분들이 나중에 어떻게 독립해 나갔는지는 잘 모르겠다. 순새 할아범만 우리 집에서 돌아가실 때까지 함께 사셨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 오기 전부터 함께 살던 가족들이 조금씩 해체되었던 것 같다.

어른들은 막내가 태어난 날이 특별하다고 좋아하셨다. 엄마 말에 의하면 큰오빠는 뱀띠인데 2월 뱀이라 활동성이 많지는 않을 거라고 하셨다. 태몽은 따로 들은 게 없다. 작은 오빠 태몽은 은빛으로 번쩍이는 커다란 물고기라고 하셨다. 광채가 나는 데다 크기도 엄청 컸다고 하셨다. 다만 강이나 바다가 아닌 개천이라 아쉽다고. 나는 가을에 태어나 먹을 복은 넉넉하다고 하셨다. 말이 씨앗이 된다고 나는 평생 먹을 것 걱정을 한 적이 없다. 그런 말을 자주 해 주신 엄마 덕이다. 셋째와 막내에 대해서는 특별히 태몽 이야기를 들은 게 없다. 옛날부터 특별한 날에 태어나면 그날과 관련되는 운이 일생을 지배한다는 속설이 있다. 그래서인지 어른들은 막내가 자라면 법과 관련되는 일을 할 거라고 굳게 믿으신 모양이다. 특히 아버지의 기대가 남다르지 않았을까?


셋째가 태어난 날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는 할머니가 아직 머리도 다 나오지 않은 셋째를 또 딸이냐면서 콕 쥐어박으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이미 내 위로 아들이 둘이나 있는데도 말이다. 그때 할머니의 행동은 엄마를 많이 섭섭하게 하신 모양이다. 종종 그 이야기를 하신 걸 보면.


막내가 태어나면서 우리 가족은 완성되었다. 문제는 막내가 밥상에 앉아 밥을 먹는다고 숟가락을 들기 시작하면서 생겼다. 밥상에 작은 폭군이 나타난 것이다. 막내는 막무가내로 밥상에 있는 밥그릇을 거둬들여 자기 앞으로 가져갔다. 다른 형제들이 내 밥이라는 주장을 할 수도 없을 정도였다. 이런 행동은 상당 기간 지속되었다. 우리는 막내가 자기 밥그릇을 헤집으며 밥을 먹다 지칠 때까지 숟가락만 들고 기다려야 했다. 본인은 기억도 못하겠지만. 밥을 빼앗기고 멍청히 앉아서 기다려야 하는 데도 왜 아버지의 엄한 제재가 없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우리는 모두 막내의 떼를 쓰는 횡포의 시간이 끝나도록 배가 고파도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도 이미 막내는 아버지를 이겨먹는 유일한 존재였다. 내 생각이지만.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눌려 자랄 때 말대꾸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이 없는데.


우리는 아침마다 기상과 동시에 동네를 한 바퀴씩 뛰고 와야 했다. 아버지는 매일 그걸 기록하셨다. 누가 가장 먼저 일어나 동네를 돌고 왔는지 순서를 철저히 기록하신 것이다. 그리고 매달 그 결과를 발표하셨다. 누적 순서를 1등부터 5등까지로. 상으로는 수원에 나가 사 오신 사탕 같은 군것질거리였다. 순위대로 사탕의 숫자가 달라졌다. 사실 막내가 그 게임(?)에 참여하기 전까지 1등은 돌아가면서 나름 공평하게 주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막내가 참여하면서 완전히 다른 양상이 펼쳐졌다. 막내는 자신의 우군으로 엄마를 확보했다. 누구보다 자기를 먼저 깨우게 한 것이다. 그 시절 막내가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이 있다. 줄을 잘못 서서 막내가 됐다는 주장이었다. 막내는 비슷한 시간에 형이나 누나를 깨우면 걸음이 느린 자신이 1등을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엄마를 구슬려 자기만 일찍 깨워달라고 했다. 나중에는 형이나 누나는 절대 깨워주면 안 된다고 약속까지 받아냈다. 그 장면을 직접 봤으니 증언할 수 있다. 어느 날부터인가 1등은 늘 막내가 독점하기 시작했다. 그 기억의 정점은 어느 날 내가 2개의 눈깔사탕을 받았을 때 찍었다. 막내는 10개의 눈깔사탕을 받았다. 그날 나는 내가 받은 사탕을 손바닥에 놓고 바라보며 제법 우울해했었다.


막내는 그 시절부터 좋게 말하자면 승부욕이 형제들 사이에서도 발군이었다. 승부욕은 막내의 학창 시절에 확연히 드러났다. 상장과 자장면을 바꿔 먹는 일에 이르러 완전히 빛을 발했다고나 할까? 엄마와 둘이 무슨 협약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상장은 학교에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종류를 섭렵했다. 각종 우등상과 경시대회 우수상, 심지어 일기나 독후감 쓰기 대회 상까지.


지금 돌아보면 상장을 엄마에게 가져와 자장면과 바꿔먹는 일이 은밀하게 진행된 건 아니었다. 우리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시행이 은밀했다. 엄마는 가게를 비우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막내가 중학생이 되면서 가게를 비우는 일이 가끔 생겼다. 그런 날은 대부분 막내와 엄마가 자장면을 먹으러 가는 날이라고 생각하면 딱 맞았다. 어려운 시절이었기에 막내가 상을 받았다고 우리 모두에게 자장면을 사주기는 어려웠을 거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부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막내의 책상 서랍을 가득 채웠던 수많은 상장 역시 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청요리에서 짐을 정리할 때 일이다. 거기에 있었다. 막내의 상장들이. 세월의 깊은 무게를 지녀 빛바랜 상장의 일부가 남아 있었다. 부모님은 이미 오십 년도 더 지난 상장을 간직하고 계셨다. 제기동에서 서초동, 방배동에서 안양으로 다시 낙향해 구포리 산으로 이사에 이사를 하시면서도 절대 버리지 않으신 상장을 보며 나는 순간 심장이 울컥 울려오는 걸 느꼈다. 두 분에게 막내의 상장은 쉽게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어떤 것보다 소중한 물건임이 분명했다. 그것들은 시장에서 힘든 노동의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해 준 증거물이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두 분은 희망을 잃지 않으셨을 텐데. 그 소중한 상장들을 바라보며 지으셨을 미소가 나도 모르게 그려졌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부모에게 자식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식 사랑이 말로 표현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미 두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간직했던 물건들에 다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구포리 산에 있던 집이 곧 없어질 것을 알게 되신 뒤에 아버지는 중요한 물건들을 챙겨 직접 컨테이너에 넣으셨다. 쓰던 가구와 집기 농기구까지 다 버리시면서도 남기신 물건에 담긴 부모님의 사랑을 나는 너무 가볍게 생각했구나 싶어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애잔했다.

손주들이 탄 썰매를 스케이트를 타고 끌어주시는 분이 아버지시다

뱅골 시절 십여 년 동안 빠짐없이 했던 아침 운동은 우리들의 건강에 어떤 효과가 있었을까? 나는 분명 효과가 있었다고 본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좋아하셨다. 인천 고모는 몸이 날렵해서 공부만이 아니라 운동도 잘하셨다고 우리에게 자주 말씀하셨다. 화성군 씨름대회에도 자주 나가셨다.

겨울이면 우리들은 저수지에서 아버지에게 스케이트를 배웠다. 그러나 아버지의 체력과 운동 신경을 따라가지는 못했다. 오빠들은 더했다. 다른 과목은 모두 ‘수’를 받아도 체육만은 ‘우’를 받아 아버지를 낙담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어린 시절 꾸준히 기른 체력이 나이가 들수록 유용했던 건 분명하다. 공부에 꼭 필요한 기본 체력이 남들보다 일찍 길러졌기에 시간 싸움에서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그 누구도 병원에 입원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효과는 충분히 입증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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