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남매의 요람기- 뱅골,
여섯 번째 이야기

by 권영순

둘째는 한문 공부였다. 이것 역시 체력 훈련처럼 철저하고 치밀하게 이루어졌다. 여기서도 아버지의 꼼꼼한 성격이 제대로 발휘되었다. 그때는 종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물품이 아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암기를 위해 연습장을 사용할 때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연습장 공책 한 면을 연필로 시작해 색깔 펜들로 바꿔가며 낙서하듯이 써가며 사용했다. 그게 흔한 일이었다. 종이는 비싸고 귀했다.


지금도 기억난다. 우리는 모두 일력(매일 떼는 달력) 뒷면 빈 여백에 꼼꼼하게 칸을 그려 천자문을 쓴 과제를 받았다. 연필을 쥘 수만 있으면 받아야 하는 과제였다. 매일 그 아래 빈칸을 일정 부분 채워야 했다. 아버지 본인도 공부해 가며 농사일을 하느라 무척 바쁘셨을 텐데 언제 그런 걸 우리에게 준비해 주셨는지 모르겠다. 우리는 이 일과를 거르지 못했다. 매일 써서 제출하고 검사까지 받았다. 다행히 체력 단련처럼 등수를 매기지는 않으셨다. 그날 과제를 마치지 않으면 저녁을 못 먹는다는 벌(?)이 있었을 뿐이다.


이 한문 공부에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인 사람은 작은 오빠였다. 세 살 무렵에 천자문을 통째로 암기해 줄줄 외웠다. 심지어 천자문을 거꾸로도 암기했단다. 그 소문은 화성군을 넘어 경기도 전체로 퍼졌다. 신동 소리를 들은 것이다. 작은 오빠는 큰오빠가 비봉 초등학교에 입학하자 울며 따라 나서 결국 시험을 보고 학교에 입학하는 일까지 생겼다. 그래서 큰오빠의 초등학교 동창생이 작은 오빠 동창이기도 하다. 키는 작지만 선생님들이 부르는 한자를 칠판에 척척 써내 할 수 없이 입학을 허락했단다. 그 시절은 그것도 가능했다. 즉 초등학교를 시험 쳐서 입학한 사람이 작은 오빠라는 거다. 당시 화성에는 유치원이 없었다.


내 기억에 할아버지의 절대적인 사랑은 장손이었던 큰오빠였다. 손자를 저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나 싶을 정도였다. 우리가 제기동에 살 때 할아버지는 매일 엄마에게 일정한 용돈을 받으셨다. 집에서 가게가 있는 시장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지팡이를 짚고 길 찾기 쉬운 개천을 따라 하루 한 번 정확히 제기 시장을 오가셨다. 그렇게 모으신 용돈을 어디에 쓰셨을까? 그 흔한 담배도 술도 전혀 하지 않으셨는데. 본인을 위해 쓰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큰오빠는 매일 할아버지가 계신 방을 드나들었다. 그냥 의례적으로 들여다보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 옆에 가서 누워 뒹구는 모습이 일상일 정도였다. 나는 그런 행동만으로도 효도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으니까. 그게 눈에 보였다. 할아버지는 그런 손자를 향해 슬그머니 용돈 필요하냐고 물으셨다. 그걸 나도 여러 번 봤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일이다. 오빠도 아직 대학생이었다. 오빠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직접 손발톱을 깎아 드리고 깨끗하게 몸을 씻기는 염습을 직접 했다.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큰오빠는 잘 알았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평생 살아오신 터전을 버리시고 우리를 따라 서울로 오셨다. 남들은 죽을 때가 되면 고향을 찾는다는데. 할아버지는 그 반대의 처지가 되셨다. 노년에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신 것이다. 그 데미지가 얼마나 컸을지 당시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나도 정신없는 학창 시절을 보내느라 조부모님 두 분의 어려움을 살피지 못한 것이다. 이제야 조부모님들에게 죄송한 마음이 든다.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그 심정을 우리들이 알기는 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에게 치매가 막 찾아올 무렵이었다. 서울이라 집집마다 모두 수돗물을 사용하고 있었다. 우물이 필요 없어져서였을 것이다. 어느 날부터 할아버지는 집 근처에 버려진 우물을 살려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셨다. 우물은 혹시 익사 사고가 날까 봐 무거운 나무 뚜껑으로 덮여 있었다. 거기다 수많은 돌들을 던져 넣어 물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방치된 지 이미 오래된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그 나무 뚜껑을 직접 열고 들어가 돌들을 꺼내기 시작하셨다. 평생 우물을 소중히 생각하셨는데 이렇게 방치되는 걸 납득하지 못하신 모양이었다. 결국 남자 형제들 모두가 나서 우물 속을 채웠던 돌들을 꺼냈다. 누구도 할아버지의 행동을 막거나 큰소리를 낸 기억은 없다. 처음에 좀 말린 것 같기는 한데 결국은 다 나서서 우물을 살리는 작업을 한 것이다. 한 동안 그 우물은 동네 사람들이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다. 청소나 화단 물 주기 용이었을 것이다.


작은 오빠에 대해 가장 기대를 많이 한 사람은 당연히 아버지다. 내가 보기에 큰오빠 이상으로 공도 많이 들이셨다. 근동 최고의 신동이라 불렸으니 아버지의 기대가 얼마나 컸을지 이해는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가진 진짜 재능을 알아보는 눈은 부족하셨다.

자식 교육에 대한 부모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일까?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가 이루어야 한다고 은근히 강조하는 게 아닐까? 난 그건 자녀에게 지나친 과제를 떠안기는 거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자신의 기대를 접고 우리 할아버지처럼 온전히 내어주시기만 했다면 작은 오빠의 삶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제기동에 살 때 아버지가 작은 오빠를 심하게 때리신 적이 있다. 그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문제는 종아리를 연탄집게로 때려 피멍이 잔뜩 들었다는 것이다. 그걸 나중에 보신 엄마는 아버지에게 달려들어 드잡이를 하셨다. 자식을 어떻게 그렇게 때릴 수 있냐며 당장 이혼하자고 울며 난리를 부리셨다. 내 기억에 아버지의 교육 방식에 대해 엄마가 하신 전무후무한 반항이었다.


나는 긴 시간 중학교에서 학생들과 생활했다. 사람들의 흑역사는 대부분 중학생 때 저지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2병이란 말이 그냥 생긴 건 아니다. 다양한 사고를 치는 학생들에게 체벌이 필요할까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그에 대한 내 결론은 ‘아니다’이다. 한 때는 교육이라는 미명으로 체벌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시간이 흐른 다음 내가 깨달은 것이 있다. 일을 저지른 학생들이 나에게 체벌을 받은 것은 나보다 힘이 약해서가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나를 봐서 맞아 줬다고 생각한다. 덩치도 힘도 나보다 더 큰 데도 말이다. 그걸 내가 잘 몰랐던 것이다. 선생님이니까, 또는 가르침을 따르지 못한 것에 미안해서였음을 지금은 안다. 너무 늦게 깨달아 나에게 맞고 자란 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작은 오빠도 아버지의 기대를 다 충족시키지 못한 것에 미안해서 참고 맞아 주지 않았을까? 작은 오빠에 대한 아버지 중심의 기대를 버리고 좋아하는 분야를 찾아갈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우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우리 엄마처럼 자식이 뭘 한다고 해도 그냥 받아들이셨으면. 서울대에 법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미대도 있다. 그곳만 다녀도 남들이 얼마나 부러워하는 곳인데. 지금도 우리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작은 오빠가 지금이라도 그림을 틈틈이 그리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언젠가는 <권가네 이야기> 삽화를 모아 작지만 전시회를 하고 싶다는 건 아직도 내 꿈 중 하나다.


아버지의 자식 교육에 대한 열정은 사실 구포리 시절이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 부모님은 오빠들이 서울 중학교에 진학한 다음 마음이 좀 급해지신 듯하다. 두 분이 서울로 올라와 제기시장에서 수원 상회를 열게 된 과정을 난 자세히 모른다. 다만 작은 아버지에게 맡긴 두 오빠들을 보고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서신 것 같다. 시골에서 농사만 지어서는 다섯이나 되는 자녀들 학비를 대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가산을 정리해서라도 학비를 마련해야 한다는 압박감에도 시달리셨던 것 같다. 덕분에 강압(?)에 가까운 이런 교육을 많이 피해 간 사람은 우리들 중 막내다. 그래서인지 막내는 위의 형들이나 누나와는 조금 다른 타입으로 자랐다. 다른 형제들은 아버지의 권위에 거의 맞서지 못했다. 형제들 중 가장 까칠한 성격의 작은 오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집 작은 아들 진형이가 초등학교 5학년 즈음이었다. 무슨 일로 학원을 빼먹고 나에게 거짓말을 했는데 그걸 아빠가 알아챘다. 아니 파헤쳤다. 엄마들은 자녀들의 거짓말에도 대충 넘어간다. 남편도 평소에는 진형이가 둘째라고 좀 봐주는 게 있었다. 형보다 덜 엄격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날은 아니었다. 단단히 마음먹은 게 있는 모양이었다. 곧 부자간에 벌로 종아리를 몇 대나 맞아야 하는지에 대한 조율(?)이 오갔다. 진원 아빠는 100대는 맞아야 네가 다시는 거짓말을 안 한다며 더 이상 깎아 주지 못한다고 못을 박았다. 너무 단호하게 말해 옆에서 말리려던 나도 뭘 어쩌지 못할 정도였다. 아빠 말을 안 들으려면 집을 나가 네 맘대로 살라며 점점 압박 수위를 높여갔다.

그 순간 어떤 기시감이 들었다. 어디서 본 장면 같았다. 진형이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가방에 이것저것 쓸어 담기 시작했다. 방으로 따라 들어간 나에게 100대를 맞으면 자기는 죽는다며 그냥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지만 진원 아빠의 기세가 너무 등등해 뭐라고 참견조차 할 수 없었다. 부모가 되니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부모의 마음이다. 아무리 화가 나도 정신병자가 아닌 다음에야 아이를 죽을 때까지 때리지는 않는다. 그냥 말이 100대라는 거지. 진형이가 집을 나가고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큰소리만 냈지 진원 아빠의 걱정도 장난 아닌 걸 왜 모르겠는가? 슬그머니 집을 나섰다. 나도 모르게 집 앞에 있는 방이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향했다. 거기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역시나! 어두워지는 운동장에서 가방을 멘 채 빙빙 돌고 있는 진형이가 있었다. 나를 본 진형이가 이렇게 물었다. “아빠가 들어오래?”


수십 년 전 종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막내가 내게 물었던 말과 이렇게나 같을 수가!

그렇게 아버지 말 안 들으려면 집을 나가라고 했다고 막내는 가방을 싸서 집을 나갔다. 그날 밤 나는 집을 나간 막내를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놀이터. 제기동 성당. 개천 근처에 있는 서울사대부중 운동장 등. 내가 막내를 찾은 장소는 바로 종암 초등학교 운동장이었다. 운동장 가에 있는 가로등 아래를 빙빙 돌다 나를 보고 한 말이 바로 그 말이었다. 내 기시감의 정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막내는 거의 아버지에게 혼나는 일이 없었다. 혹시라도 맞아야 할 일이 생기면 집을 나갔다. 자신의 뜻도 굽히지 않았다. 아버지는 막내가 심하게 고집을 부려도 이런저런 이유로 그냥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해 한문 시험을 공부할 때의 일이다. 한문을 읽고 쓰고 해석하는 건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해 한문이 쉬웠던 것이다. 문제는 다른 데서 생겼다. 아버지가 그려 준 칸을 무조건 채우다 보니 필순이 엉망이었다. 내 멋대로 한문을 그려왔음을 그때서야 깨달았다. 아버지가 필순까지 감시하진 않으셨던 게 분명하다. 필순이 있다는 것도 사실 중학교에 가서야 알았다. 그렇다고 어린 시절 한문 교육이 살아가면서 도움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나는 중요한 일에 어릴 적 익힌 한문 실력으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

첫 번째는 임용시험에서였다. 교육학은 자신 있었다. 당시에도 교육학을 1개 이상 틀리면 불합격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다행히 1교시 교육학을 모두 맞은 것 같아 안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공 시험 문제를 받아 드니 눈앞이 캄캄했다. 고전문학 쪽 지문들이 어디서 본 적도 없는 생소한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해석이 잘 되지 않아 답 쓰기를 망설이고 있는데 확연히 아는 문제가 있었다. ‘비상’을 한문으로 쓰라는 것이었다. 공중을 난다는 의미의 ‘飛翔’을 나는 정확히 쓸 수 있었다. 나중에 교육부 감사관실에 계신 아버지 대학동창 의구 아저씨에게 알아보니 내 성적은 2등이었다. 전국적으로 수백 명이 지원한 시험에서 이런 결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 밥을 굶지 않으려고 억지로 썼던 한자 반복 학습의 도움이 아니었을까? 시험이 끝나고 다들 그 한자를 어떻게 쓰냐고 서로 물어보는 걸 보고 '떨어지지는 않겠구나.' 안심이 되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임용 발표가 나던 날. 셋째의 서울대 합격 발표도 그날 있었다. 결과를 보고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막내가 숨 가쁘게 ‘빨리 말해! 빨리~~’하는 것이었다. ‘합격이야.’ 그 순간 막내가 지르던 환호성이 얼마나 크던지. 그날 우리 집은 겹경사가 생겼다. 지금도 긴장하며 결과를 기다렸을 가족들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그려진다.


다음은 대학원 시절이다.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원 공부를 하던 때라 바쁘게 지냈다. 문제는 공부할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전공 선택 과목 중 ‘한문 강독’이 있었다. 난 당연히 한문 강독 강좌를 신청했다. 그리고 첫 시간에 들어가 깜짝 놀랐다. 수강인원이 4명이었던 것이다. 적어도 10명은 되리라 생각했는데. 그 수업에 들어온 사람들이 서로 우리 중 한 명만 A, 나머지는 B, C, D라며 한숨을 쉬었다. 강좌 선택을 잘못했다는 한탄이었다. 과연 수업 시간만이 아니라 시험도 쉽지 않았다. 난 배운 걸 암기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연필을 잡을 수 있을 때부터 시작한 한문공부라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답안지 채점한 것을 교수님이 확인하라며 나눠주셨다. 다른 학생들이 내 답지를 흘끔거리더니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이런 시험에 98점을 맞을 수 있냐고. 독음 하나 잘못 쓴 것 때문에 2점이 깎여 있었다. '왜 100점이 아니지?' 라며 시험지를 살피고 있는 내게 사람들이 몰려들어 내 시험지를 들여다보고 하는 말이었다. 대학 시절 친구들 사이 내 별명 중 하나는 학점 귀신이었다. 가정 형편 때문에 장학금을 놓칠 수 없어 필사적으로 공부하면서 붙은 별명이다. 대학원은 내가 돈을 벌어 학비를 충당할 수 있는 데도 아직 A학점에 목을 매고 있는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이었기에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이런 특수한 경우 말고도 내게 남들이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한문은 높은 허들이 아니었다. ‘비상(飛翔)도 최인훈의 소설 중 <비상>을 읽으며 봐 둔 기억이 나 다른 사람처럼 실수를 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시험 운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나의 임용고시 시험 운도 나쁘지 않았던 것이다.


초등학교 2학년 어느 봄날이었다. 비봉초등학교 운동장 가에는 긴 역사에 걸맞게 아름드리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나무 벤치가 놓여 있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나는 혼자 돌멩이로 땅바닥에 우리 반 친구들 이름을 썼다. 같은 반 친구들 이름을 한글로 쓰면서 신기하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아버지는 비봉국민학교 1회 졸업생이셨다

내 의문은 따로 있다. 왜 한문 공부는 연필을 들기 시작하면서 시키셨는데 한글은 가르치지 않으셨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그건 학교에 가면 저절로 익힐 수 있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적어도 본인의 자식은 미리 한글 공부를 시키지 않아도 공부에 뒤처지지 않을 역량이 된다고 믿으셨나?

국어 교사를 34년 한 사람이 한글을 초등학교 2학년에 가서야 완전히 깨우쳤다면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한글 공부를 따로 시키지 않은 아버지의 의도가 아직도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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