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연습이라는 단어에서 습(習)의 뜻을 아주 좋아한다. 뱅골에 살 때 날기(羽) 연습을 매일(日)하는 제비들을 보며 자라서이다. 서울로 이사 온 뒤 가장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제비들을 보기 어려웠다는 거다.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뱅골에는 제비들이 아주 많았다. 지금과 달리 아주 흔한 새였다.
제비는 사람들이 사는 집에 들어와 살림을 차렸다. 뱅골에 있던 우리 집 대청마루 처마에도 제비집이 있었다. 봄이 오면 제비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물론 작년 그 제비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일 년 만에 돌아온 제비들은 집수리를 위해 주변의 넓은 논밭을 쉴 새 없이 드나든다. 봄의 기운이 넘실거리는 들판에서 지푸라기나 진흙 등 집짓기 도구들을 물어오는 것이다.
제비집 수리가 끝나면 알을 낳는다. 이어 시끄럽게 재재거리는 새끼 제비들이 태어난다. 새끼들을 먹이기 위해 부지런히 드나드는 어미 제비들의 입에는 어김없이 벌레들이 물려 있었다. 내가 항상 궁금했던 건 먹이 주는 순서였다. 어미 제비는 새끼들의 먹이 순서를 어떻게 구분했을까? 어미가 먹이를 물고 날아오면 새끼들 모두 입을 크게 벌리고 소리를 질러대는데. 먹이 순서를 제대로 지키는지 알고 싶어 마루에 누워 지켜본 적도 있다. 결국 비밀은 풀지 못했다. 초여름 한낮 시원한 대청마루에 누웠는데 잠이 들지 않기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가끔 제비 새끼가 극성맞게 먹이를 욕심내다 바닥으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장난으로라도 새끼들을 건드리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곧바로 제비집에 올려주었다. 우리들은 모두 구전되는 <흥부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비 새끼를 살려줬다고 해서 제비가 박씨를 물고 돌아오는 경우는 없었다. 흥부 외에 제비가 물어다 주는 박씨로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 역시 들은 적이 없다. 박씨로 부자가 되는 상상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굳이 <흥부전>의 주제를 찾는다면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우리 주변의 미물들에 대해서도 항상 온정을 베풀어야 한다는 교훈이 담겼다고.
제비가 사람들이 사는 집에 둥지를 트는 이유는 간단하다. 천적을 피해기 위해서일 것이다. 제비의 안전은 결국 사람들이 지켜줘야 한다. 천장 대들보에 능구렁이 같은 것이 출몰하면 어미 제비는 시끄럽게 울어대며 소란을 떤다. 자신들을 지켜 줄 사람을 부르는 것처럼.
대청마루에 분비물을 떨어트리고 종일 시끄러운 소리를 내도 사람들은 제비와의 공생에 왜 호의적이었을까? 사람들에게 유익한 새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 인간에게 유익한 새를 보호할 정도로 재치와 유머 감각이 뛰어났다. 제비가 잡아먹는 해충 덕분에 사람들이 키우는 농산물은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농산물을 해충으로부터 지켜 주는 제비를 자연스럽게 보호하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먹을 것이 부족한 긴 겨울을 견뎌야 하는 우리 조상들에게 따뜻하고 먹을 것 풍부한 먼 남쪽 나라에 대한 로망 역시 만만치 않았을 터. 제비를 떠나보내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마음은 우리의 노랫말 속에 얼마나 많이 담겨있는가. 제비 사랑은 그것만 보아도 납득이 된다.
처음 날기를 배울 때 새끼 제비들은 안마당의 빨랫줄까지도 간신히 날아간다. 하지만 곧 영역을 확장한다. 여름 방학이 되면 큰 대문 그네에 앉아 제비가 날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본 적이 많다. 그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참새가 포로롱 포로롱 앙증맞게 난다면 제비는 말 그대로 시원시원한 포물선을 그리며 난다. 저절로 탄성이 나온다. 여름 내내 제비가 날기 연습을 하는 이유는 확실하다. 멀고 먼 대양을 건너 강남으로 가기 위해서다. 지치지 않고 대양을 건너기 위해 제비는 쉬지 않고 나는 연습을 통해 체력을 기른다. 가을이 되면 연미복을 입은 날렵하고 멋진 모습이 된다. 하지만 비행 연습을 쉬지는 않는다. 쉴 새 없이 각종 비행 연습을 한다. 봄날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게 들판을 나는 제비를 보며 저절로 감탄이 나온다.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갈매기 조나단보다 더 멋진 새가 있다면 난 지금도 제비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형제 중 제비 이상으로 연습의 백미를 보여준 사람은 셋째다. 가족이 일부 헤어져 지낸 시점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작은 아버지를 위해 조부모님 두 분이 사거리 근처 신작로 옆에 방 2칸짜리 집을 짓고 뱅골 집을 나가셨다. 우리에게 뱅골 집을 물려주고 분가를 하신 것이다. 얼마 동안은 엄마가 조석으로 밥을 해다 나르셨다. 그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던 것 같다.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중반 즈음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나와 셋째와 막내를 조부모님에게 맡기셨다. 서울에서 우리 식구가 모여 살 집을 구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오빠들은 이미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부모님은 제기시장에 수원 상회라는 야채 가게를 내고 우리들 공부 뒷바라지를 시작하셨다. 막내는 아직 학교에 입학하지 않았다. 내가 3학년이니 셋째는 1학년이었다. 부모님의 손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기였다. 부모와 형제에게서 분리되기에는 너무 어렸다. 나는 지금도 그 시절을 아릿한 서글픔으로 기억한다. 나도 어렸지만 셋째는 더 어렸다.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 뭘 알아서 집안 형편을 이해하겠는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형제나 부모의 후광이 거의 없었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위로 오빠 둘의 중학 입시에 열정을 많이 보이셨다. 직접 데리고 시험공부를 시키셨다. 당시 중학교는 학교별 입학시험이 있었다. 5대 공립은 각종 과외를 받던 서울 아이들도 입학하기 힘든 학교였다. 그때 오빠들이 시험을 쳤던 학교는 5대 공립 중에서 경복중이었다고 기억한다. 합격 발표는 라디오로 들어야 했다. 합격자 번호를 듣기 위해 온 가족이 라디오를 틀어놓고 기다렸다.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합격 발표를 듣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
시간이 흘러 셋째가 초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 얼마 안 되어서였을 것이다. 하루는 국어 교과서에 있는 <선녀와 나무꾼>을 암기해 볼 테니 들어달라고 했다. 그때 국어는 같은 학년이라면 누구나 똑같이 배우는 국정교과서였다. 내 기억에 <선녀와 나무꾼>은 분량이 많았다. 암기할 길이가 만만치 않았다. 담임선생님이 틀리지 않고 암기를 하면 무슨 상을 주신다고 하셨나 보다. 내가 보기에 담임선생님도 큰 기대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도 끝까지 암기할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냥 한 번 들어준다는 마음이 컸다. 그런데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암기를 하는 것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서 반장도 암기하지 못하는 것을 혼자만 했다며 나에게 자랑했다. 그렇게 암기하기까지 셋째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지. 나는 그 일을 또렷이 기억한다. 너무 감탄했기 때문이다.
그 일은 셋째에게 공부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는 터닝 포인트가 되지 않았을까? 셋째는 3학년 가을 즈음에 나와 함께 서울로 전학을 왔다. 나는 5학년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위축된 채 학교를 다닌 기억이 난다.
고향에서는 인근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에 부잣집 딸이었다. 하지만 서울에 전학 오니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시장 상인의 딸이었다. 초라한 옷차림으로 돌봄이 부족한 가정의 아이라는 표시가 온몸에서 나는 아이일 수밖에 없었다.
셋째는 언제부터 학교 공부에서 두각을 나타냈을까?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를 듣거나 초등학교부터 공부를 잘한다는 소리를 들은 건 분명 아니다. 막내도 중학교에 가서야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당시 초등학교는 어느 정도 부모의 후광에 가까운 뒷바라지가 필요했다. 하지만 밤낮으로 장사에 바쁘신 우리 부모님이 학교를 찾아다니고 학교 공부에 신경 써 주시기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마 우리가 중고교 시절 학생회 활동 경력이 거의 없는 이유는 부모님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는 가정환경 탓이 컸을 거라 생각한다. 다들 공부는 잘했는데도. 그래도 숫자로 시험 성적이 공개되는 중학교부터는 객관적으로 우수한 성적이 분명히 드러났다.
막내의 증언에 의하면 셋째는 서울 제기시장 근처에서 구슬치기 기술 연마와 실습에 열중했으니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는 데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을 수도 있다. 당연히 공부는 뒷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셋째가 서울사대부중을 다닐 때도 공부에 밀린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다. 그냥 상위권이었다고나 할까? 방과 후면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축구를 하던 모습이 기억나니 그냥 놀이라면 다 좋아하는 학생이었다. 서울대에 입학하기 전 재수를 할 때도 셋째는 부모님에게 학원비 부담을 드리지 않았다. 입시학원에서 모셔갔다. 연세대에 합격했는데도 가지 않은 이유는 등록금이 비싼 사립이어서였다. 국립인 서울대를 가지 않으면 학비 마련이 힘들다는 걸 본인이 잘 알아 포기했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셋째가 삼수를 해야겠다고 결정한 날이었다. 엄마는 셋째에게 삼수를 하지 말고 나와 장사를 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셨다. 근처에서 가게 일을 돕던 내가 그런 말씀을 하시는 엄마와 셋째를 가만히 지켜봤다. 나는 평소 셋째가 눈이 작다며 놀려댔었다. 그런 셋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니 간신히 싫다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한 엄마가 미안하셨던지 돌아서서 긴 한숨을 쉬셨다. 아직도 그 순간 엄마 모습이 생생하다. 어느 자식이라도 차별하지 않으셨지만 학비 부담을 덜고자 아들에게 그런 소리를 한 것에 엄마의 미안함이 담긴 한숨이 아니었을까. 그래도 나는 우리 오 남매만큼 부모님의 형편과 고생하시는 처지를 잘 헤아린 자식들은 없다고 믿고 있다.
어린 시절에는 구슬이나 딱지치기 같은 잡기의 제왕이었는데. 사실 셋째가 잘하는 것들은 우리가 아는 것보다 더 많았을 거다. 나는 자라면서 셋째가 오 남매 중 누구보다 성격이 유하고 배려심이 많다고 느꼈다. 그저 조용히 자기 할 일은 잘하던 그런 동생이었다. 무엇보다 남이 보거나 말거나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 게으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무던히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