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골 시절 못다 한 이야기들

(1) 명절과 운동회 (2) 소소하게 남은 이야기들

by 권영순

(1) 명절과 운동회

뱅골 시절 명절은 설렘과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들판에서 막 거둬들인 곡식들로 송편이나 각종 먹 거리를 만드는 추석. 농사를 쉬는 여유 시간에 뒤 울안과 부엌에 가득 쌓아 놓은 땔감으로 불을 지펴 만들던 설음식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엄마는 가마솥 앞에서 장작불을 활활 지펴 여러 재료들로 풍성한 먹 거리를 만들고 계셨다. 특히 우리들이 많이 기다렸던 음식이 있다. 엿 만들기였다. 그때는 설탕이 값비싼 시절이었다. 귀한 손님이 와야 설탕을 꺼냈다. 한 여름 손님이 오시면 시원한 우물물을 길어 설탕을 타서 대접했다. 그게 최고의 대접이었다. 마음대로 설탕을 먹을 수 없었던 우리에게 거의 유일한 당분은 엿이었다. 할아버지는 아주 엿을 좋아하셨다. 큰오빠는 할아버지 큰 사랑 다락에 꿀 항아리가 있어 몰래 가끔 애용(?)했다고 고백했다. 나는 기억이 전혀 없는데. 아마 다른 손주들에게는 비밀(?)이었나 보다.


엿 만들기는 수수나 고구마, 찹쌀이 주재료였다. 만드는 데도 여러 날이 걸렸다. 한 번은 남양 고모가 오셔서 고구마 한 가마니로 엿을 만드신 적이 있다. 거의 일주일을 사랑채 가마솥에서 엿물을 설설 끓이셨다. 나는 엄청 많은 엿이 나올 줄 알고 고대하며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나온 엿의 양이 너무 작아 실망했던 기억이 난다. 찹쌀 두 말이나 고구마 한 가마니 엿이 거의 비슷하게 나온다는 것도 그때 들었다. 분명히 찹쌀보다 고구마가 더 단맛이 나는데! 찹쌀은 재배가 어려운지 쌀보다 귀했다. 힘들게 만든 그 엿은 대부분 손님을 위한 접대용이거나 할아버지를 위한 비상용 간식으로 보관되었다. 호시탐탐 엿을 노리는 우리들 때문에 엄마는 대청마루 선반 높은 곳에 엿을 숨겨두셨다. 필요한 때에 꺼내 쓰시기 위해 비축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가끔 엿을 꺼내먹기로 작당을 했다. 그 시절 오 남매의 협업으로 이보다 완벽한 하모니는 없었다. 이 작당은 소리 없이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설이 가까워지면 엄마는 우리들의 설빔을 짓기 위해 안방에서 바느질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때가 적기였다. 우리는 안방에 계신 엄마 눈치를 살피며 엿을 꺼냈다. 건넛방에 있던 이불을 가져오고 무등까지 타서야 엿 광주리에 손이 닿았다. 꺼낸 엿을 입에 한입씩 가득 물고 밖으로 달아나며 큰 소리로 이실직고를 했다.

‘엄마! 우리 엿 꺼내 먹었어~’

혼날 걸 대비해 미리 선수를 친 거였다. ‘이 정도 시간이면 엄마 화가 좀 풀리셨겠지’ 싶을 때야 하나 둘씩 눈치를 보며 집으로 기어 들어왔다. 뭐라고 야단도 치기 전에 밖으로 달아나 버린 우리 때문에 얼마나 어이없어하셨을지. 모두 도망가고 난 뒤라 쫓아 나오셔야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아무도 없는 안마당을 바라보며 마루에 서서 헛웃음을 지으셨을 젊은 엄마의 모습이 그려진다.


셋째와 막내의 증언에 의하면 엿을 잘 만드는 장인은 따로 있단다. 아버지 사촌이고 우리들과는 육촌지간인 기안네 할머니시다. 둘이 기안네 갈 때마다 할머니가 엿을 꺼내 주셨다며 그 맛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내가 차별을 당한 건 아닌가 하는 강한 의구심이 생겼다. 기안 네는 우리 할아버지의 동생 집이다. 할아버지가 양자로 오시면서 친동생이지만 사촌이 된 경우다. 어찌 된 건지 기안네 할머니가 나에게 따로 엿을 주신 기억은 없다. 당연하지만 엿 맛 역시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평소 아줌마에게 아들을 못 낳는다며 구박을 심하게 하셨기에 이 의심은 나름 합리적이라 생각한다. 내가 여자라고 차별(?)하신 건 아닐까? 그랬더니 큰오빠가 자기도 얻어먹은 적이 없다며 그런 건 아닐 거라고 했다. 난 그런 의심이 드는데.


기안네 할머니는 며느리에겐 까다롭고 어려운 분이셨다. 그래도 성정이 활달하고 사교적인 분으로 기억한다. 그분에게도 6.25 전쟁으로 인한 깊은 상처가 있다. 그분의 맏아들은 부역을 이유로 수원교도소에서 옥사했다. 사실 맞아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다고 했다. 막내아들은 북으로 간 다음 연락이 두절됐다. 나는 살아생전 막내아들을 기다리고 기다리셨던 사연을 이리저리 들어서 알고 있다. 오죽하면 간첩으로 와도 좋으니 아들 얼굴 한 번 보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하셨을까.


기안 엄마도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여름 저녁에 놀러 가면 호박과 감자를 넣어 손칼국수를 만들어 주셨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온 식구가 모여 앉아 먹던 그 구수한 칼국수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야목역.jpg 과거 야목 역은 이런 모습이었다. 협궤로 꼬마 기차가 다니던 작은 간이역이었다

초임 발령지인 아현중 시절 이야기다. 그때 학생들은 지금처럼 학원을 다니지 않았다. 토요일에도 오전 수업을 했다. 어느 초여름이었다. 종례를 하며 꼬마 기차로 불렀던 수인선을 타러 가겠냐고 물어봤다. 여학생들 10여 명이 넘게 따라나섰다. 서울에서 1호선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다시 인천에서 수인선을 타고 야목(이곳도 수인선이 없어지면서 폐쇄되었다 지금은 수인분당선 전철이 다닌다)에서 내렸다. 야목이 뱅골에서 가장 가까운 기차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완전히 간척되지 않아 넓은 갯벌이 있었다. 상당히 먼 거리를 걸었다. 마땅히 갈 데가 없었던 나는 목마르고 배고픈 여학생들을 이끌고 기안네 집으로 들이닥쳤다. 전화도 없었던 때였다. 갑자기 들이닥친 우리를 어쩌겠는가? 아줌마는 텃밭에서 늙은 오이를 따 오이생채를, 가마솥에 불을 때 부랴부랴 밥을 하셨다. 마당에 멍석을 깐 다음 교자상을 펴고 우리에게 늦은 점심을 차려주셨다. 그야말로 정성 가득한 시골밥상이었다. 따끈한 쌀밥에 오이생채와 시골 고추장을 섞어 비빈 다음 입으로 퍼 나르던 여학생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아직도 고마운 마음이 샘솟는다. 뜬금없이 서울서 학생들까지 끌고 고향을 찾아온 내게 즐거운 마음으로 손님 대접을 해 주실 만큼 후덕한 분이셨기에.

어린 시절 먹었던 수수엿의 추억 때문에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엄마에게 수수엿을 좀 구해줄 수 없냐고 말을 흘렸다. 차마 조르지는 못했다. 다른 건 뭐든지 잘하시는 엄마도 못 만드시는 게 엿이었다. 그러면 어디 어디를 수소문해서 엿을 구해주셨다. 언젠가 한 번은 누군가 그 엿을 중간에 새치기했다. 누구였을까? 엄마가 범인을 분명히 이야기하셨는데???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아무리 맛나고 좋은 음식도 추억의 맛을 이길 수는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도 철없이 그 맛을 찾아댔으니 말이다. 지금은 엿을 만드실만한 분들이 모두 고인이 되셨다. 세월의 흐름이 아쉬운 추억 하나를 과거라는 시간 속으로 데려갔다고나 할까?



우리 집 중간 대문은 남쪽에 있었다. 중간 대문 쪽으로 둥글고 환한 달이 떠오르면 추석이 다가왔다. 추석 음식의 백미는 역시 온 식구가 대청마루에 모여 만들던 송편이다, 송편을 잘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는 속설에 얼마나 열심히 빚었는지.

나는 아들만 둘이다. 낳지도 못했을 딸의 미모를 위해 그렇게 노력을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헛웃음이 절로 나온다. 우리들 중 예쁜 송편은 주로 작은 오빠가 만들었다. 그래서 경하가 그렇게 예쁜 건가? 하지만 모두 맞는 말은 아닌 듯하다. 송편을 엉망으로 빚었던 셋째와 막내의 딸 미모도 어디 가서 빠지지 않는 걸 보면 말이다.


머슴 아저씨가 불린 쌀을 지고 사거리 방앗간(지금은 그곳도 흔적 없이 사라졌다)에 가셔서 기계로 뽑아 오던 가래떡. 지게에 반 가마가 넘는 불린 쌀을 지고 가실 때면 나도 자주 따라나섰다. 가래떡이 뽑혀 나올 때의 광경도 볼만한 구경거리였기 때문이다. 가래떡을 진 아저씨와 아직 따끈한 가래떡을 손에 들고 뜯어먹으며 지금 윤경 빌라 올라가는 길을 걷던 기억이 난다. 그 길에는 상엿집이 있었다. 평소 비 오는 날이면 내가 가기를 꺼리던 길이었는데. 상황에 따라 그 길에 대한 추억도 다르게 기억되는 모양이다.


제법 굳어진 가래떡을 써는 엄마 옆에서 화톳불에 구운 가래떡에 조청을 찍어 먹던 일. 커다란 가마솥 뚜껑을 뒤집어 놓고 맷돌에 간 녹두에 김치 등을 올려 부치던 녹두전. 가마솥에 만들던 손 두부. 명절 즈음이면 어디선가 나타나 귀를 막아야 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튀기던 뻥튀기 아저씨. 명절이면 동네 아저씨들이 모여 소를 잡아 그 부산물로 끓여 먹던 소고깃국. 선지나 지금 곱창이라 부르는 소의 내장은 마을에서 소를 잡을 때만 먹을 수 있는 별식이었다. 색동옷을 입고 동네 어른에게 세배를 가면 주시던 용돈이나 맛난 음식들.


명절의 추억뿐이겠는가? 돌아보면 뱅골 시절은 내게 고향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오래 되씹게 하는 일들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찹쌀을 쪄 커다란 돌절구(뱅골 집을 팔고 이사 올 때 그 돌절구를 이웃집에 주시면서 엄마가 우시는 걸 봤다는 큰오빠의 증언이 있다)에 넣고 메로 쳐서 콩고물을 묻혀 먹던 인절미의 고소한 풍미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는. 한적했던 마을이 떠들썩한 웃음과 기대로 흥성흥성 소란스러워지면 아직 어린 우리들 마음도 만국기가 달린 가을 운동회처럼 붕 떠올랐다. 집집마다 달달한 음식들을 만들며 풍기던 그 여유와 화목함이 그래서 명절 즈음이면 더 그리워지는 게 아닐까.


명절만큼 우리가 기다리는 행사가 있었다. 소풍과 가을 운동회였다. 소풍은 우리들만 가는 게 아니었다. 전 학년이 같은 장소로 소풍을 갔기 때문이다. 온갖 먹 거리를 보자기에 싸서 머리에 이고 엄마들이 함께 소풍을 따라나섰다. 어떤 경우는 할머니까지 우리를 따라오셨다. 동네 어르신들은 소풍을 원족 가는 날이라고 하셨다. 그날은 고된 농사일을 하루 쉬고 자녀들이 하는 각종 오락을 구경하며 먹고 즐기는 동네 잔칫날이었다. 지금도 긴 행렬을 이루며 태행산 자락 어딘가를 향해 논길을 걸어가던 모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운동회 (2).jpg

가을 운동회 역시 인근 마을 모두가 함께 하는 날이었다. 보통은 추석 다음 날 가을 운동회를 열었다. 명절의 풍성함이 바로 연결되어 마을 잔치나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비봉 초등학교 운동장에 나부끼던 만국기와 청군 백군으로 나누어 응원 함성을 외치던 모습이 생생하다. 기마전, 청백 계주, 학년별 매스게임이나 부채춤, 콩 주머니를 던져 박 터트리기. 다양한 행사가 하루 종일 열리던 그 공간은 어린 시절 추억의 갈피를 꺼냈을 때 가장 행복하고 즐거운 장면이다.

운동장가에 있는 큰 나무 그늘 아래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엄마가 마련해 오신 도시락을 함께 먹던 시절. 그 즐거운 함성과 웃음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마을 잔치처럼 어른들을 위한 프로그램도 함께 운영하던 학교. 당시 학교는 지역의 중심에서 활발한 소통과 교류의 역할을 감당하던 장소였다. 그런 시절이 아득히 멀게 느껴진다.


아득히 멀어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도 있다. 화성 지역 안동 권 씨 집안에 만석꾼 부자가 있었다. 그 집 딸이 시집갈 때 일이란다. 그 딸이 군포에서 목재소를 하는 집안으로 신행길을 떠나기 전날 밤. 밤새 싸락눈이 내렸다. 온 산야가 하얗게 되었는데 신부가 가야 하는 신행길에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족제비 발자국이 찍혀 있었더란다. 발자국이 얼마나 어지럽게 많았는지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발자국을 따라가 볼 정도였다고 했다. 그 딸이 시집을 가고 난 뒤 그 집안이 거덜 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우리 할아버지는 어려서 청상이 되신 큰집으로 양자를 오셨다. 덕분에 양모와 친모 두 분을 모시고 사셔야 했다. 할아버지가 힘들게 산다고 땅을 열 마지기 주시겠다던 큰댁 당숙모님이 바로 만석꾼 며느리라는 이야기는 나도 가끔 들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배움의 끈은 짧아도 성정이 칼같이 분명하고 공정하며 무엇보다 공짜로 얻는 것을 꺼려하셨다. 당연히 그분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셨단다. 할머니는 그 일로 할아버지에게 엄청 바가지를 긁으셨다고 하셨다. 겨울에 남의 산에서 땔감을 가져왔다고 머슴을 혼내는 할아버지니 말해 무엇하랴?


그 권씨네 딸과 결혼한 분은 원래 군포에서 목재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어린 남동생 대신 가산 관리를 맡은 그분은 남편과 함께 나중에 대림건설을 설립했다. 지금의 대림산업 초대 회장이라는 이야기를 어른들에게 여러 번 들었다. 대림 건설의 바탕이 된 것이 만석꾼 권가네의 가산이었음은 분명하다. 안타깝게도 어린 남동생은 누나에게 가산을 돌려받지 못했다. 아버지 이야기에 의하면 그걸 비관해서 자살했다고 하셨다. 안타까운 이야기였다. 재물이 많은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닌 모양이다.


산에 까마귀가 떼로 몰려와 짖어대면 동네 아버지 친구들이 모여 삽과 곡괭이를 들고 그곳을 찾아가셨다. 힘을 쓸 만한 동네 분들이 그곳을 찾아가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까마귀는 썩은 고기를 먹는다. 6.25 이후의 혼란이 아직도 여기저기 흔적을 드러내던 시절이었다. 까마귀가 몰려든 곳에는 갖가지 연유로 무연고 사망자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어른들은 이야기하셨다. 동네 어른들은 무연고 사망자가 된 그분들이 까마귀밥이 되지 않도록 묻어 주는 건 암묵적인 예의라고 생각하셨나 보다. 대부분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예의를 다해 시신을 묻어주고 돌아오셨다. 인근 산에 까마귀 떼가 몰려들면 어른들의 표정이 어두워지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 들었던 상여 소리를 간간히 떠올린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주변 지인들의 애도가 과거에는 한 마을의 행사로 치러졌다. 그 인생이 꽃길은 아니었을망정 마지막 길을 꽃상여로 꾸며 예를 다해 보내는 장례의 형식. 슬프지만 아름다운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생면부지인 사람이라 꽃상여는 못 태우지만 적어도 날짐승의 밥이 되지 않게 하셨던 동네 어른들의 마음 씀씀이 역시 아름답게 느낀다. 고단했던 몸을 자연의 품인 땅속에라도 반듯하게 누이고 애도라도 받도록 하신 과거 우리 동네 어른들. 이미 모두 고인이 되셨지만 그분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우리 집 머슴 아저씨 중 기억나는 분이 있다. 사시였는지 눈을 뜨는 모습이 약간 이상했던 기억이 난다. 이름이 장걸이었다. 그분은 우리 집에서 혼인을 하셨다. 정식으로 혼례식도 치르셨다. 어이없는 일은 면사무소에 혼인 신고를 하러 가서 생겼다. 동성동본이라 혼인 신고를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결국 두 분은 헤어지셨다. 그 당시는 동성동본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합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남자 어른이 아내를 떠나보내고 혼자 울며 돌아오셨다.

동성동본 문제는 꽤 오래 문제를 일으켰다. 나도 안동 권 씨만이 아니라 안동 김 씨와 장 씨와도 혼인을 할 수 없다는 소리를 어렸을 때부터 들었다. 고려 왕건 때 형제였기 때문이라는 소리에 좀 웃긴다고 생각했다. 권 씨 조상은 왕건의 스승이다. 왕사였다. 그분이 동성동본 결혼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아닐 텐데. 다행히 유림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지금은 법을 고친 건 잘한 일이다.


우리 옆집에 일순이라는 아이가 살았다. 나보다 두 살 어리니 셋째 동갑이다. 우물을 사이에 두고 가장 가까운 이웃이라 자주 왕래했다. 문제는 일순이가 아주 어릴 때 시름시름 앓던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거다.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그 애 아버지가 수원에서 후처를 데려왔다. 나는 <콩쥐팥쥐> 이야기를 <흥부전>처럼 구전으로 알고 있었다. 콩쥐를 죽이는 계모 이야기가 너무 소름끼친다고 생각했다.

현실은 그보다 더 심했다. 그 계모에게 손에 잡히는 건 모두 몽둥이였다. 악을 써 가며 딸 둘을 학대하는 모습을 우리 가족은 자주 목격해야 했다. 나는 그 집에서 악을 쓰는 소리만 들려도 공포에 질렸다. 그건 계모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아니었다. 일순이의 언니(이름이 향순이였던 것 같다)를 때리는 데 닥치는 대로였다. 결국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언니 향순이는 서울로 가출했다. 문제는 대여섯 살의 어린 일순이만 남아 계모의 모진 학대를 견뎌야 했다는 거다. 지금도 비 오는 날 계모에게 맞고 울어대는 일순이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다. 아파 누워 계시던 친엄마 주위를 기어 다니던 모습과 함께.

어느 날은 그 계모가 새벽부터 우리 집에 찾아와 훔쳐 간 닭을 내놓으라고 소리소리 지른 적도 있다. 우리가 뭐가 부족해서 남의 닭을 훔치냐고 나중에는 말싸움까지 하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몇 번 일순이 아버지에게 학대 이야기를 꺼낸 것 같은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종처럼 성질대로 부리던 큰딸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서울로 가출해 버렸다. 아무리 때려도 어린 일순이가 가사를 도맡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옆집이 조용하다 했더니 계모가 다시 수원으로 도망을 쳤단다. 일순이 아버지가 찾아가서 돌아오라고 했지만 오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고 안심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딸을 그렇게 학대하는 사람과 같이 살려고 애썼던 그분의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일은 우리에게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는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우리가 서울로 이사 오고 난 뒤 그 애도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애 언니는 서울 동대문 어딘가에서 여공으로 일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동생이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데려갔다. 후일 일순이는 좋은 남자와 결혼하고 강남에 에이스 침대 매장을 운영하며 잘 지낸다는 소리를 들었다. 엄마가 다행이라며 가끔 이야기하셨다. 그렇게 독립한 딸들은 명절에도 고향의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그 아저씨는 돌보는 사람 없이 외롭게 돌아가셨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죄과를 그렇게 받은 모양이다.


(2) 소소하게 남은 이야기들


내가 뱅골에 살았던 기간은 10년 남짓이다. 그 시간에 대한 기억을 이렇게 자세히 떠올릴 수 있는 이유가 뭘까? 나는 휴전이 되고 5년 뒤에 태어났다. 전쟁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해 모두가 힘들어했을 시기였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 한 마을에서 나름 질서를 유지하며 살았다. 그런 사람들이 갑자기 이념으로 인해 싸우고 할퀴고 심지어 죽고 죽이는 일도 있었다고 들었다. 이념이 뭔지도 모르던 사람들이었는데. 우리 마을에도 사연이 없는 집이 없을 정도다. 사람들은 그 상처와 아픔을 어떻게 극복했을까?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대보름날의 풍경이다. 그날은 동네 남자 어른들이 흰색 두루마기까지 차려입고 마을 한가운데 있던 야산으로 모여들었다. 대보름의 이 행사는 마을의 오랜 전통이었다. 달이 떠오르는 동쪽을 향해 절을 하던 어른들의 모습은 경건 그 자체였다. 자연을 경배하며 살아가는 소박한 사람들이었기에 사람들 사이에 불필요한 적대감이나 피해의식으로 다투는 일도 적었다. 공동체의 도덕률로 판단해서 그것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할 때만 문제를 제기했다. 그리고 모두가 협력하여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애썼다. 누군가에게 생긴 어려움에 너와 내가 따로 없었다는 의미다.


내 친구였던 남복이 엄마가 아기를 잃는 일이 생겼다. 남복이 동생이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은 것이다. 우리는 집 앞에 서서 남복이 아버지를 비롯한 동네 어른들이 멍석으로 둘둘 만 무언가를 지게에 지고 산으로 올라가는 걸 지켜보았다.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평토장을 한다는 건 그때 알았다. 천하에 둘도 없는 불효라 생각해서 무덤에 봉분을 만들지 않아 평토장이라고 한다는 것도. 둥근 봉분 표시가 없으니 나중에는 어디에 자식을 묻었는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큰오빠는 구포동 고개 넘어가는 솔숲에 ‘애청’이라고 불리던 곳이 있다고 했다. 어쩐지 그 고개를 나는 상당히 무서워했던 기억이다. 거기서 밤이면 여우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부모보다 먼저 죽은 자식은 가슴에 묻는다.’

이 의미는 물론 나이가 들어서야 제대로 이해했다. 하지만 나는 어린 나이에도 남복이네 일을 통해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는 의미를 희미하게나마 깨달았다고 생각한다.


후일 제기동에 살 때 시내로 나가는 버스 정류장은 고려대학교 공과대학 근처에 있었다. 그 주변이 원래는 산이었는데 사람들은 그곳을 애기능이라고 불렀다. 그 의미를 알게 된 것은 더 나이 들고서였다. 일찍 죽은 왕손들을 묻은 장소라 그렇게 불렀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고급스러운 주택들이 꽤 많이 들어선 편이었는데 그런 안타까운 역사가 있던 곳이라니.


더 안타까운 사고가 일어날 때도 있었다. 우리 옆 동네 아이가 우물에 빠져 죽는 일이 생긴 것이다. 부모가 농사일을 하러 간 사이 혼자 있던 아이들에게 가끔 그런 일이 생긴다며 어른들은 안타까워하셨다. 한동안 그 우물은 폐쇄되었다. 식수를 뜨러 멀리 다녀야 해도 몇 년 동안 사용을 금지했다. 아무도 먹을 수 없게 볏짚을 잘게 썰어 우물에 잔뜩 넣어두었다. 심지어 뚜껑까지 덮어 수년 동안 열지 못하게 했다.


나는 전염병을 막기 위한 위생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사람의 편리함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 무엇인지. 죽은 아이에 대한 예의와 사고를 겪은 부모에 대한 배려다. 거기에 이런 사고를 또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도 있었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우리는 편리함보다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함을 그런 사건을 통해 저절로 배웠다.


대부분의 나날은 평범하디 평범한 일상의 연속이었다. 봄이면 너른 들과 밭에 씨를 뿌리고 여름 비바람에 곡식들을 길러 가을에 거둬들였다. 그렇다고 모두가 편안한 건 아니었다. 가정 경제를 짊어져야 할 어른들을 일찍 잃은 집의 가난은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지금도 우리 텃밭 끝 아랫집에 살던 그 가족을 기억한다. 아이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엄마가 남의 집 일을 해 주며 근근이 살아가던 탓에 그 집 아이들은 속옷을 입을 수 없었다. 평소에는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할 가난이었다. 그것이 여자 아이들의 고무줄놀이에서 불거졌다. 펄럭거리는 치마 사이로 맨살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철없는 아이들의 놀림에 울고 집으로 가던 그 집 딸은 나보다 두 살 어렸다. 가난은 그 애의 미래도 갉아먹었다. 농사지을 남자 어른이 없어 머슴으로 들인 30대 초반의 남자와 아이를 낳고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고1 여름방학 때였다. 옛 절친 남복이를 보러 뱅골에 갔다 그 애를 우연히 마주쳤다. 누군지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학교를 다닌다면 중학교 2학년이어야 하는 데. 도저히 14살이라고 볼 수 없는 아줌마가 있었다. 돌이나 됐을까 싶은 애까지 업고 있었다. 처음에는 저 아줌마가 왜 피하나 했다. 나중에야 누군지 알고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모른다. 동네에 남아 있는 친구의 말은 더 경악스러웠다. 그 애 엄마가 떠밀어서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아동 청소년법에 걸릴 일이다. 가족을 위한 희생이란 명분이 그런 식으로 이용되다니. 지금도 안타깝기만 하다.


그렇다고 뱅골 마을 사람들이 남의 어려움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덕분에 우리들은 요람기 시절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었다. 그곳에서는 인생을 관통하는 사람의 도리와 예의. 정의나 양심 같은 것들에 대한 기본교육이 이루어졌다. 물론 각종 놀이를 겸한 체력단련과 협동심 기르기도 있었다. 나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널뛰기, 고무줄놀이를 줄기차게 했다. 주변 자연을 활용한 소꿉놀이나 공기놀이도 했다. 까마중이나 뱀딸기같이 먹어도 문제가 없는 것들은 소꿉놀이 재료로 자연스럽게 배웠다.


아무리 여러 번 알려줘도 진달래와 철쭉을 구별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산과 들에서 나오는 먹 거리에 대해 서울에서 나고 자란 친구들보다 아는 게 더 있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 그 이상이 마을이라는 공동체에서 자연스러우면서도 나름 체계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나에게 뱅골이 소중한 추억의 장소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 논은 대부분 왕재골에 있었다. 왕재골은 세종의 큰형이었던 양녕대군이 내려와 살았기에 붙여진 지명이다. 근방에 전주 이 씨가 많이 사는 데 모두 그 후손이라고 한다. 우리 집 왕재골 논은 규모가 제법 컸다. 버스 정류장으로 두 개 정도에 걸쳐 있었다. 가을이면 셋째와 막내랑 그곳으로 새를 쫓으러 종종 다녔다. 돌아올 때 동네 어른들을 만나 인사를 하면 ‘새가 너희를 쫓겠다.’며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나는 농촌에서 자랐지만 거의 농사일을 배우거나 거들지 않았다. 농사일 거들기로 기억나는 건 이거 하나다. 아버지는 당시 드물게 하우스 농사를 지으셨다. 일본어로 된 책을 보시고 시험 삼아 하신 것 같다. 사거리 근처에 있던 밭에 비닐하우스를 만들어 오이를 심으셨다. 구포리 산 주변이다. 그걸 수확할 때 오이 나르는 걸 돕는 정도가 농사일 거들기였다. 언젠가 내가 비닐하우스가 있던 밭을 가리키며 거기서 기른 오이를 날랐다고 하자 남편이 코웃음을 쳤다. 그게 무슨 농사일 돕기냐고. 겨우 오이 몇 개 날랐을 텐데!


그러나 나보다 다섯 살 많은 큰오빠는 아버지가 농사일을 제법 시키셨다고 말했다.

- 난 초등학교 6학년 때 겨울 둘째와 함께 언 논에 객토도 해 봤어. 산에서 리어카에 흙을 날라 논가에서 거적에 담아 퍼 나르는 일이야. 오이 따기는 수도 없이 해 보고. 인천으로 팔러 가는 것도. 야목까지 리어카를 끌고 가 기차에 싣고. -

그 말을 듣고 보니 정신없이 바쁜 농사철에 나는 오히려 걸림돌이었던 기억이 났다. 왕재골 논은 뱅골 집에서 거리가 제법 있다. 그 논으로 새참을 나르던 엄마를 따라다녔다. 유치원이 없었기에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도 엄마의 뒤를 그냥 따라가는 게 아니었다. 울퉁불퉁한 논둑길은 엄마의 뒤를 따라 걷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 길을 엄마 치마를 잡고 앞서 걷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한 번은 마음이 바쁜 엄마가 울며 고집을 부리는 나를 논둑 어디에다 떼 놓고 가셨다. 나는 어른들이 새참을 다 드시고 그릇들을 챙겨 되돌아올 때까지 혼자 악을 쓰며 울고 있었다.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나도 참 어지간했구나 싶다.

들밥을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왕재골 논으로 내가는 엄마와 나의 모습

왕재골 논 근처에는 제법 수량이 풍부한 시내가 있었다. 태행산 자락이라 수량이 많았던 것 같다. 장마가 지면 그 시냇가에 가끔 그물을 들고 동생들과 고기를 잡으러 갔다. 고기라야 겨우 손가락만 한 버들치나 드물게 미꾸라지 같은 것들이 전부였다.

그날도 우리는 고기가 숨어 있을 만한 수초들을 골라 발로 더듬었다. 드디어 제법 큼직한 물고기가 걸렸는지 그물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셋째가 뱀장어라며 날렵하게 그물을 잡아 올렸다. 뱀장어 치고 제법 무게감이 있었다. 하지만 뱀장어가 맞는지 자세히 들여다보다 혀를 날름거리는 걸 보고 뱀이라는 걸 알아챘다. 식겁한 우리는 그물까지 내던지고 시내를 뛰쳐나와 긴 둑을 따라 도망쳤다. 그것도 어디서 들은 게 있어 개울둑을 지그재그로 내달렸다. 뱀은 목표물이 가는 방향대로 곧바로 따라간다는 소리가 기억나서였다. 겁이 나서 다시는 그 시내를 들어가지 못했다. 그물을 찾으러 가야 하나 며칠 동안 고민만 했다. 사실은 뱀이 우리보다 더 놀랐을 텐데.


봄 오는 소리 가득한 들에서 냉이와 달래를 캐고 쑥을 뜯으러 다니던 봄날. 친구들과 진달래를 꺾으러 왕재봉 주변을 휘젓고 다니던 일. 왕재봉 꼭대기 바위 위에 앉아 저 멀리 수인선 야목역을 향해 구불구불한 철로를 따라 기차가 오길 기다리던 날들. 어쩌다 칙칙폭폭 하는 소리와 긴 꼬리가 달린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꼬마 기차를 보게 되면 우리도 모르게 함성을 지르던 일. 안 뱅골 과수원 길에 풍기던 아카시아 꽃향기와 복숭아의 달달한 단내, 모내기할 무렵이면 밤마다 온 마을을 채우던 개구리울음 소리. 장마가 지면 양동이를 들고 물고기를 잡으러 뛰어가던 냇가(지금도 비 온 뒤에는 냇가로 달려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일종의 습관일까? 추억의 반추일까?) 반짝이는 햇살 아래 시냇물에서 친구들과 종일 물놀이를 하며 보내던 여름 방학. 원두막에서 먹던 수박이나 참외의 시원하고 달콤한 맛. 반딧불이 반짝거리는 해거름까지 이웃집 밀 수확을 돕고 얻어먹었던 고소하고 달달한 밀 빵. 울안 장독대 옆 꽃밭에 철 따라 피어나던 채송화. 맨드라미. 과꽃, 나팔꽃, 달리아.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이고 내내 기다리던 첫눈.


책이라고는 오빠가 서울에서 가져온 <계백장군> 한 권이었지만 그걸 읽고 또 읽던 어느 해 겨울 방학. 그 시절 생긴 백제에 대한 관심 덕분에 지금까지 한성 백제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은 곳에서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집 앞 텃밭을 가로질러 끝자락 집에 한겨울 밤 눈밭을 동동거리며 놀러 가던 일, 따뜻한 아랫목에 발을 넣고 듣던 어른들의 옛이야기. 화롯불에 넣어 둔 군밤이 익어가며 풍기던 고소한 단내. 겨울 눈밭을 뛰어다니던 토끼 사냥. 학교에서 돌아오면 언 손을 이끌어 장작불 앞에 앉히시던 엄마의 손길과 장작불을 헤집어 슬그머니 꺼내 주시던 따끈한 군고구마나 감자의 달큼한 맛. 윷놀이하던 어른들의 우렁찬 소리.


시간이 데려간 추억들이지만 하나하나 돌아보면 정겹고 행복한 나날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런 평범한 일상이 우리를 성장시키고 변화시켜 현재를 만드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가끔 뱅골 시절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에 젖어드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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