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외할아버지의 기일 날 (2) 구포동 고갯길 미아 사건
(1) 외할아버지 기일 날
1960년. 외할아버지의 기일. 엄마는 나를 업은 채 보름달이 환하게 비치는 신작로 길을 타박타박 걷고 계셨다. 머리엔 외할아버지 제사상에 올릴 제물 몇 가지를 이고 등에는 아직 걸음이 서툰 나를 업고. 농사철 농가의 며느리 역할은 장난이 아니었다. 새참 포함 하루 5끼 식사 준비와 각종 농사일 보조에 육아까지. 아마 하루하루 헤쳐 나가기도 버거웠을 것이다. 엄마가 31년생이니 20대 후반. 교자상을 몇 개나 차려야 하는 대식구의 끼니를 모두 마무리 짓고 나서야 겨우 아버지 제사에 나섰을 터였다. 엄마는 평생 시누이였던 인천 고모에게 고마워하셨다. 인천 고모도 청상이 되시면서 아이 셋을 데리고 친정에 의탁해야 하는 어려운 처지셨다. 그런데도 엄마의 시집살이에 물심양면 도움을 주셨단다. 그날도 마음 씀씀이가 고운 인천 고모의 배려로 그 시간이나마 친정으로 향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작로를 가득 채웠던 환한 달빛. 60년이 지났는데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한 이유가 있다. 엄마는 비봉에서 수원 방향의 신작로를 걷고 계셨다. 그때는 차가 지나가면 흙먼지가 날리는 흙길을 신작로라 불렀다. 새로 난 길이라는 뜻이다. 엄마의 등에서 나는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 태양산(우리는 태행산을 그렇게 불렀다) 봉우리 어디쯤에서 ‘우~ 오~ 오~’ 하는 늑대 울음소리가 내내 등 뒤에 따라붙었기 때문이다. 여음이 긴 늑대 울음소리(큰오빠는 늑대가 아니라 여우였을 거라고 한다. 우리 집 근처 남종 네 울안까지 내려와 울었다는 기억이 있다고 했다. 남종이는 내 친구 남복이의 오빠다. 당시 여우나 족제비는 인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이었다.)가 들릴 때마다 나는 엄마의 목을 꼭 끌어안고 등에 착 달라붙었다. 나중에는 포대기 자락을 끌어다 머리에 뒤집어썼다. 가끔 포대기를 들추고 내다보면 요요한 달빛에 엄마의 긴 그림자가 신작로에 어른거렸다. 나는 그날을 오래도록 잊지 못하고 있다. 내 최초의 기억이기도 하지만 등 뒤로 느껴지는 공포가 얼마나 두려운지 깨달은 날이어서 더 그럴 것이다.
아직 6.25 전쟁의 어수선한 흔적이 남았을 시기. 홀로 그 밤에 어린 딸을 업고 아버지 제사를 지내기 위해 길을 나섰던 엄마의 마음은 어떠셨을까? 춥지는 않았으니 겨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해 외할아버지의 제사에 가서 있었던 장면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자세한 우리 집안 사정도 알 수 없다. 다만 그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엄마의 안전을 위해서라도 함께 길을 나서지 않으신 아버지에 대해 가끔 섭섭한 생각이 드는 이유는 뭘까? 딸 입장이 아니라도 엄마는 누구보다 열심히 시부모를 모시고 자녀를 키우셨다.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런 아내에 대한 고마움을 자식들 앞에서 더 많이 표현해주지 않으신 아버지에 대해 아쉬워서 인가?
(2) 구포동 고갯길 미아 사건
나는 그 일을 ‘구포동 고갯길 미아 사건’이라고 불렀다. 내가 가르치던 학생들이 이야기를 조를 때마다 이런 제목을 붙여 재미를 살리려 했다. ‘그때 내가 그 과수원집 청상과부에게 입양되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없을지도 모른다.’고 마무리하면서.
두서너 살 무렵. 바쁜 농사철에 나를 돌봐 주기 위해 순덕이라는 언니를 데려왔다. 막내 고모이신 인천고모가 광택오빠의 학업을 위해 서울로 이사 가신 뒤였을 것이다. 아마 주방 보조도 겸했을 것이다. 당시는 가난한 사람들이 많았던 때였다. 아이 돌보미를 구하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터. 내 기억에 엄마는 순덕 언니에게 나를 맡기고 수원으로 일을 보러 가셨다. 구포동 고개 넘어 신작로에 수원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그날 일이 생겼다. 열너덧 살 정도였을 언니는 동네 또래 친구가 있었다. 마침 그 집 엄마도 우리 엄마와 함께 수원에 가셨다고 기억된다. 그러니 마중을 이유로 구포동 고갯길을 함께 넘어갔을 것이다. 지금은 서해안 고속도로가 뱅골에서 보이는 구포동 고갯길 풍경을 완전히 가로막아 버렸다. 하지만 그때는 우리 집에서 고갯길이 훤히 건너다 보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었다. 아직 어린 나에게 구포동 고개는 전설 속에나 등장할 만큼 먼 곳처럼 느껴졌었다. 밤에 희미한 불빛이라도 어른거리면 도깨비불이라고 겁을 먹을 정도였으니 오죽하랴.
우리 어린 시절은 도깨비가 수시로 나타나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도깨비는 장난이 심했다. 방앗간에서 밀가루를 빻아 머리에 이고 돌아올 때 특히 자주 나타났단다. 머리에 인 함지박을 잡아당겨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일도 자주 있었다. 동네 어느 집 며느리가 그런 일을 당했다는 이야기도 하셨다. 아직 어린 며느리들이 실수하거나 힘에 겨워 귀한 곡식을 바닥에 쏟고는 도깨비 핑계를 대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이 커 보인다. 심지어 화창하고 맑게 갠 날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모래 먼지를 대청마루에 쏟아붓는 장난도 쳤단다. 지금 구포리 노인회관에서 조금 내려오면 있는 집이 그런 일을 당했다고 한다. 그 집은 갈수록 도깨비장난이 심해져 제사를 없애고 온 가족이 교회를 다녔다. 그 덕분인지 도깨비 장난질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누구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또래 남자애는 그 애 누나가 업고 있었다. 그 애와 나는 사소한 이유로 등에 업힌 상태에서 계속 다투었다. 두 언니들은 콩밭 근처 길 가에 우리를 내려놓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나를 때리려는 남자애를 피해 제법 키가 큰 콩밭으로 도망쳤다. 겁에 질려 밭고랑 속에 쪼그리고 있다 아마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깨어나 보니 전혀 모르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엄마를 찾으며 울던 나를 발견한 사람은 젊은 아낙이었다. 나는 샘물가에 있었다. 조롱박 바가지도 기억난다. 기억이 선명한 그 샘물은 풀 더미 사이에서 맑은 물을 뿜어내는 곳이었다.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러 왔던 아낙은 울어 엉망이 된 나를 집으로 데려갔다. 제법 규모가 있는 복숭아 과수원집이었다. 그분은 우는 나를 달래 씻기고 잘 익은 복숭아 즙을 수저로 떠 먹여주셨다. 아직도 그 향긋하고 달달한 복숭아 과즙이 기억날 정도로 맛이 특별했다. 지금도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복숭아인 이유는 그 때문일까? 자라서 어른이 되면 복숭아 과수원집으로 시집가는 게 꿈이었던 시절도 있었으니.
깜빡이는 호롱불 밑에서 복숭아 과즙을 받아먹고 있을 때 이웃에서 할머니 한 분이 놀러 오셨다. 그분은 긴 담뱃대에 연초를 말아 피우셨다. 그러더니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셨다. 젊은 아낙은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나를 양녀 삼아 기르겠다는 말을 하신 것 같다. 할머니는 뱅골 권가네서 딸을 잃어버려 난리가 났다며 애를 일단 데려가 보라고 하셨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낙은 나를 둘러업으셨다. 구포동 고개에서 뱅골로 향하는 고개 마루쯤이었다. 맞은편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다가왔다. 우리가 어린 시절. 마을에서 일어나는 아이들 사고는 우물이나 수렁 같은 웅덩이에 잘못 들어갔다 익사하는 경우였다. 부모님은 나를 봐주던 언니가 겁이 나서 도망간 사실을 알고 동네 사람들까지 동원해 사방팔방 찾은 모양이었다. 마을 주변의 우물과 연못 그리고 수렁들까지 샅샅이 뒤지고 다니셨다고 하셨다. 까마득히 오래전 기억이지만 긴 장대와 솔가지로 만든 횃불을 든 사람들이 웅성거리던 모습이 지금도 어렴풋 생각난다. 아낙의 등에 업힌 나를 본 엄마는 울음을 터트리셨다. 사색이 되었던 아버지의 안도하시던 한숨도 함께. 두 분이 아낙에게 뭐라고 인사하셨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서바이벌한 하루를 보냈으니 정신없이 피곤했을 것이다. 그냥 엄마의 등에 업혀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의 편안한 등의 느낌이 아직도 기억나는 걸 보면.
나중에 들으니 그 아낙은 시집온 지 얼마 안 돼 전쟁이 일어나 군대에 징집된 남편이 전사해 청상과부가 되셨단다. 아이도 없이 노부모를 모시며 살아간다고 했다. 그런 연유로 샘물가에서 우연히 주운 나를 양녀로 삼으려 하셨다는 것이다. 그때 나를 잃어버렸던 언니는 어떻게 되었을까? 인천 어딘가로 도망갔다던 언니는 훗날 부모님이 장사하시던 제기시장 수원 상회로 찾아와 사과하셨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