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조각들

(1) 기억의 조각들 - 하나 (2) 기억의 조각들 - 둘

by 권영순

(1) 기억의 조각들 - 하나


그 일이 일어난 건 늦가을이었다. 그날 우리 가족들은 평소처럼 대청마루에 모여 저녁 식사 중이었다. 대가족이었기에 교자상만 몇 개가 펼쳐져 있었다. 많은 식구가 함께 식사를 해도 시끄러운 소리가 나는 일은 없었다. 식사 예절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집안 어른들은 밥을 먹으면서 말을 하면 복이 달아난다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어린 우리들도 조용히 밥을 먹었다.


거의 저녁 식사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새로 이엉을 얹은 행랑채 지붕이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반짝거렸다. 훈훈한 느낌까지 들며 집안 분위기가 환하고 깔끔했다는 기억이 난다. 안마당 너머 외양간에 앉은 황소가 볏짚을 뭉텅이로 베어 물던 장면도 어렴풋하게 떠오르고. 여유로운 저녁상이었다.

그때였다. 누군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불이야∼~~!”

그때까지도 식구들은 서두르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집은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더 컸을 것이다. 다만 행랑채에 사시던 머슴 아저씨 한 분이 밥숟가락을 던지듯이 놓고 허둥거리며 뛰쳐나가시는 걸 보고 의아했다. 그 순간 그게 남의 일이 아닐 수도 있음을 가족들이 느꼈다고나 할까.

불이 난 곳은 바로 우리 집 행랑채였다. 멀리서 누군가 우리 집 굴뚝 주변에서 나오는 불꽃이 심상치 않아 뛰어오시며 소리를 치신 모양이었다. 식구들이 우르르 달려 나가 보니 굴뚝 주변으로 치솟은 불이 행랑채 지붕으로 옮겨 붙고 있었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행랑채도 잘 말린 볏짚으로 지붕을 올렸다. 잘못하면 집 전체가 화마에 덮일 수도 있었다.


“몇 살 때인지는 기억 안 나. 늦가을에 일하던 분이 행랑채에 불을 땠는데 그게 굴뚝에서 불이 붙었어. 내가 놀다가 본 건지 누가 본 건지 바로 알아서 크게 번지기 전에 껐어.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한 삼 십분 만에 다 껐어. 다음 날 돼지 잡아서 불 꺼 준 사람들 대접하는 잔치 했고. 며칠 뒤에 지붕 다시 올렸어.”

큰오빠의 기억이다. 내 기억에 그 일은 저녁상을 물리기 직전이었다. 늦가을이었다는 건 일치한다. 머슴 아저씨는 늦가을이라 방구들에 찬기를 좀 없애려고 불을 때셨던 모양이었다. 여름에서 가을까지 불을 때지 않아 굴뚝이 막혔던 건 잘 모르셨을 것이다. 장작을 지펴 행랑채 아궁이에 불을 피우시다 밥 먹으라는 소리에 그냥 두고 오신 게 아닐까? 행랑채 아궁이는 바깥마당 주변에 있었다.


잘 마른 볏짚으로 새로 지붕을 한 상태라 바람이 조금만 더 세게 불었거나 발견이 늦었다면 우리 가족은 어떻게 되었을까? 길바닥에 나 앉지는 않았더라도 심각한 상황에 처했을 것이다. 집을 다시 지으려면 돈도 돈이지만 대식구가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았을 게 분명하다.

그날 ‘불이야!’ 소리에 저녁 식사 중이던 마을 사람들은 모두 뛰쳐나왔다. 너나없이 불을 끄기 위해 뛰어다니셨다. 나는 아직도 그분들 손에 들렸던 양동이와 함지박이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물을 담을 수 있는 거라면 뭐라도 들고 뛰어오신 것이다. 다행히 우리 집에는 우물이 있었다. 물의 조달이 쉬웠기 때문에 불길을 잡기도 어렵지 않았나 보다.


바깥마당은 타작을 하거나 각종 곡식을 널어 말리는 제법 넓은 공간이었다. 머슴 아저씨들이 안마당만큼 쓸고 닦지는 않아도 아침에 일어나면 그곳도 항상 쓰레질을 하셨다. 그 바깥마당에 동네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함께 불을 껐다. 불은 쉽게 진화되었다. 동네 사람들이 한꺼번에 모여들어 불을 끈 덕분이었다.

겨우내 두엄을 쌓아 두었다 이듬해 봄이 오면 논밭으로 퍼 나르는 두엄 더미는 마당가 감나무 아래 있었다. 아직 어린 우리들은 그 자리에 올라서서 발을 동동 구르며 어르신들의 진화 작업을 지켜보았다. 넘실거리는 화마가 행여 안채와 사랑채를 덮칠까 봐 조마조마해하면서. 진화 작업을 방해할까 봐 한쪽으로 물러서 있었던 것이다.


큰오빠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았으니 기억이 더 정확할 것이다.

“불난 곳은 행랑채 중에서 작은 사랑이라 부르던 곳이었어. 할아버지 거주하시던 큰 사랑 남쪽 큰 대문 안쪽과 바깥쪽에 걸쳐 있었어. 방 한 칸과 작은 사랑마루가 있던 곳이야. 그곳 아궁이는 주로 소죽을 쑤던 큰 사랑 아궁이와 마주하고 있었는데 큰 대문 안쪽이고 그 옆에 외양간이 있었어. 큰 사랑 아궁이는 쇠죽 때문에 불을 자주 땠는데. 작은 사랑은 그날 오랜만에 때다가 불이 난 거야.”


뱅골 집은 할아버지가 가산을 일으키신 다음에 공들여 지으신 집이었다. 안채 사랑채 행랑채에 창고 외양간 등이 비교적 넓은 터에 들어차 있었다. 마을 가운데였지만 지대가 조금 높아 저 멀리 구포동 고갯마루까지 훤히 보였다. 뱅골 다른 집들보다 뷰가 남다른 곳이었다. 할아버지가 지관까지 동원해 세심하게 고르신 집터였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날의 기억이 유달리 선명한 이유가 뭘까? 우리 집 마당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걸 처음 보아서였을 수도 있다. 한편 불이 무서워서였다는 이유도 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뱅골 어른들이 너나없이 주저하지 않고 보여주신 헌신적인 행동 때문 아니었을까.

행랑채.jpg 뱅골 집 행랑채 마당이다. 추수할 때면 도리깨질을 한 낟알들을 털어 창고로 거둬들였다

정월 대보름이면 뱅골 아이들이 하는 놀이가 있다. 쥐불놀이다. 구멍을 여기저기 낸 깡통에 담긴 숯불을 빙글빙글 돌리며 하는 놀이였다. 쥐불놀이는 마을 안에서 절대 하지 않았다. 구포동 고개 주변 냇가에서 하는 아이들 행사였다. 그곳은 마을에서 뚝 떨어져 있었다. 무엇보다 근처에 인가가 없었다. 행여 불이 나더라도 인가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을 장소였던 것이다. 시냇가이니 마른 풀이나 잔디 어디에 불이 붙어도 염려가 없었다. 당시 우리들은 어리고 철이 없어 조심성이 부족한 아이들이었다. 그런데도 어른들은 쥐불놀이를 말리지 않으셨다. 다만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놀이를 하게 하셨다. 행여나 생길 수 있는 사고는 미리 예방하는 교육을 하신 것이다. 지금 돌아보니 뱅골 어른들은 불에 대한 예방 교육도 나름 철저히 하셨구나 싶다.


집안 어른들은 그날의 일을 가끔 이야기하셨다. 더불어 불난 집터가 아주 좋다는 덕담을 곁들이셨다. 불같이 가문의 기운이 일어날 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나는 집이 홀랑 타 버릴 수도 있는 걸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봤기에 그 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좀 어리둥절했다. 사실과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으셨다고 생각했다. 분명 그 일은 불운이었다. 엄청난 후폭풍을 우리 집에 몰고 올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새옹지마로 해석하는 어른들의 지혜를 당시 어린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더 나이가 들어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화마에 모든 것을 날려도 희망까지 날리지 말라는 어른들의 지혜가 담긴 해석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지붕에 새로 이엉을 해서 얹는 것도 당시는 동네 행사였다. 지붕을 올리는 건 타작이 끝나고 창고에 각종 곡식과 쌀가마니를 쟁여 놓은 다음이다.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지붕에 이엉을 올리고 기나긴 겨울을 준비했다. 말끔하게 지붕을 얹고 나면 동네가 다 훤했다.


이어서 집집마다 김장을 했다. 텃밭에서 뽑아 들인 배추와 무 등으로 갖가지 김치를 했다. 겨우내 가족들이 먹을 김치는 뒤 울안 김장독 속에 차곡차곡 쟁였다. 땅을 파고 김장독까지 묻고 나면 긴긴 겨울 준비가 어느 정도 마무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모든 일은 품앗이였다. 네 일 내 일이 따로 없었다. 당시 뱅골에 사는 사람들은 남의 일을 돕는 걸 특별히 미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가끔 뱅골 시절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가 잊고 사는 게 무엇인지 문득 깨닫게 된다. 마음이 나도 모르게 그 시절로 달려간다.



(2) 기억의 조각들 - 둘


나는 가끔 뱅골 우리 집 주변에는 왜 과일나무를 심지 않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었다. 남편은 지금도 살구나무를 보면 울산 매곡리 산골 골짜기에 있던 집에서 살구를 털던 이야기를 한다. 보릿짚을 살구나무 아래 깔고 나무에 올라가 흔들기만 해도 양은 대야를 채울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열렸다며 살구꽃만 봐도 추억에 잠기는 것이다.

“우물가에 큰 측백나무가 있었고 두엄 옆에는 무슨 나문지 기억 안 나. 감나무는 없었어. 옆집 창순네 언덕 쪽에 감나무가 있어서 감꽃 필 때 주웠던 기억이 있지.”

우리는 감꽃이 떨어질 무렵이면 큰오빠의 기억대로 옆집에 출장을 가야 했다. 간식으로 틈틈이 먹기 위해서였다. 물론 눈치를 보지는 않았다. 떨어진 감꽃을 줍는 건 애들이나 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줄기가 긴 풀을 뽑아 감꽃 목걸이를 만들었다. 그걸 목에 매달고 다니며 수시로 먹었다.

뱅골 시절 우리는 먹을 수 있는 꽃이나 식물에 대해 잘 알았다. 그게 우리들의 간식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내가 국어 선생님이 되면서 단어 중에 ‘참’이라는 접두사가 붙으면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 가르친 적이 있다. 그러면서 ‘참’이 들어간 말을 찾아보라고 했다. 그러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참이슬’이다. 어느 반이나 빠짐없이 그 단어가 나왔다. 그건 소주 이름이라며 웃어넘기고 다른 말을 잘 생각해 보라고 해야 했다. 그러면서 꽃 중에 참꽃이 있는데 그게 진달래라고 알려줬다. 다만 진달래와 거의 비슷하게 생긴 철쭉은 독성이 있어 절대 먹으면 안 된다는 주의도 주면서 말이다.


진달래를 참꽃이라고 말한 이유는 알 것 같다. 봄날 여자 어른들은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 진달래로 화전을 부쳐 먹으며 놀았다. 진달래 화전은 쌀가루 부침에 진달래 꽃잎을 붙여 만든다. 흰 바탕에 분홍색 색감이 확 살아나 봄의 분위기를 살릴 수 있는 떡이다. 진달래는 우리가 다니던 학교 주변 왕재봉에도 잔뜩 피어있었다. 하교할 때 우리들은 진달래 꽃잎을 따 허기진 배를 채웠다. 물론 배가 부르지는 않았다. 그냥 봄이 와서 좋고 꽃도 구경하는 재미였다.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는 미국산 옥수수가 구호물자로 학교에 배부되었다. 소사라고 불리던 아저씨는 그것으로 빵을 만드셨다. 우리들은 급식으로 그 빵을 받았다. 늘 배가 고팠던 우리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 먹어버렸다. 학교에서 받은 옥수수 빵을 집에 있는 동생들과 같이 먹으려고 아끼는 친구들도 있었다. 심지어 그걸 가져다 온 가족이 산이나 들에서 캐 온 나물을 함께 넣고 끓여 한 끼를 때우는 집들도 있다고 했다. 뱅골에도 삼시세끼 챙기기 어려운 집들이 꽤 있었다.


그러니 감꽃을 간식으로 먹는다고 부끄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우리들은 꽃이 필 무렵이면 감꽃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연갈색 꽃잎이 흐드러지게 떨어진 감나무 아래서 그걸 주워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다 간식으로 먹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은 자녀들이 감꽃을 주워 먹는다면 부모들이 난리 칠 일이다. 하지만 나는 뱅골 시절에 감꽃을 많이 먹어 탈이 났다는 아이를 본 적이 없다.

봄날 찔레 순을 따서 껍질을 벗겨먹으면 오이 맛이 나는 간식처럼 말이다. 지금도 이른 봄이면 올망졸망 솟아오르는 찔레 순은 내게 추억의 간식으로 보인다. 거의 아이 손가락 굵기의 찔레 순을 발견하면 하루가 즐거웠다. 요즘 말로 대박! 이라며 산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행복해했다. 찔레 순은 감꽃의 살짝 떫은 맛도 없다. 상큼한 오이맛이 나 먹기가 더 좋았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내게 찔레순은 먹거리로 보인다. 그것을 먹지 않고 봄을 보내면 딱히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미련이 생긴다고나 할까.


이른 봄 칡뿌리를 캐 껍질을 벗기고 씹으면 은단을 먹는 것처럼 화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다. 그 맛에 뱅골 소년들은 지난가을 미리 점찍어둔 칡뿌리를 캐기 위해 삽까지 들고 마을 주변 산을 드나들었다.

남편도 칡뿌리 이야기를 자주 한다. 채취의 달인답다. 하긴 아들들을 데리고 산에 가서 소나무 가지를 꺾어 껍질을 벗기고 속껍질을 까주며 먹으라던 사람이니 말해 무엇하랴. 자기는 이 맛을 잊을 수 없다고. 아들들이 거부하자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며 직접 먹는 시범까지 보였었다.

그런 남편 말에 의하면 칡뿌리는 늦가을 무렵부터 먹을 수 있단다. 겨울을 지내기 위해 뿌리에 영양분을 가득 저장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른 봄 칡뿌리를 캐러 산에 가면 아직 땅이 녹지 않아 캐기가 어려웠다면서. 남편은 어린 시절 만만치 않게 울산 매곡리 인근 산을 드나들며 온갖 채취에 열을 올리던 사람이었다. 산에서 나는 각종 열매와 먹거리에 잡학사전 수준이 된 건 당연한 결과다.


봄이 되면 뱅골 아이들은 신체 활동량이 늘어 항상 허기져 있었다. 뭘 먹어도 금방 배가 꺼져 버렸다. 날이 좋아지니 산으로 들로 다니며 먹을 수 있는 것을 자체 조달하는 데 열성적으로 굴 수밖에 없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에서도 먹거리 찾는 데 다들 선수 수준이었다.


나중에 전학을 와 보니 서울 아이들은 학교 앞에서 풀빵 같은 간식을 사 먹었다. 뱅골 아이들은 그럴 여유가 없으니 산과 들에 널린 자연물 채취로 눈을 돌렸다.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온 산과 들에 널린 게 다 먹거리였다. 산과 들로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먹을 수 있는 자연물을 구분하는 방법을 배웠다. 산과 들 자체가 삶의 교과서나 마찬가지였다.

“두엄에서 미나리꽝 건너 밭두둑 따라 나무들이 있었는데 무슨 나무들인지 기억 안 나.”

큰오빠와 달리 나는 그 나무들을 밤나무라 기억한다.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알밤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새벽에 나가 그 밤을 주워야 했다. 아니면 그 아랫집에 살던 애들이 죄다 주워가기 때문이었다. 우리 밤나무라 해도 어른들은 그걸 문제 삼지 않으셨다. 형편이 어려운 집이라는 걸 알아서였다. 다만 욕심이 많은 내가 일찍 일어나 밤을 주워본 적이 여러 번이라 큰오빠보다 더 정확히 기억하는 모양이다.

장독대 옆 뒤란에 나무들이 있었어. 그중 하나는 호두나무 같아. 안방 동쪽 문 두 개 중 북쪽의 큰 문 옆으로.”

“남쪽 중문 밖에 창고와 돼지우리 간 사이에 있던 큰 화장실은 남자와 일군들이 사용했어. 애들이 사용하기엔 깊고 커서 좀 위험했어. 잿간을 겸한 넓은 장소야. 큰 사랑 옆에 조그만 소변 화장실은 노출된 형태로 손님들이 주로 썼어. 우리는 주로 큰 창고 동쪽 우물로 나가는 문 안쪽 작은 화장실을 썼어. 거기 봄·가을 냄새를 잡아주는 치자나무가 화분에 담겨 놓여 있었어. 꽃이 피면 그 향기가 대단했지. 겨울에는 그 치자 화분을 방안에 들여놓고 살았어. 붉고 긴 열매는 식용이었던 듯해.”

나는 큰오빠와 달리 호두나무가 기억나지 않는다. 만약 호두나무가 있었다면 호두를 턴 기억이 날 텐데. 대신 큰오빠의 말을 들으니 나도 그 치자나무가 기억났다. 하얀색 꽃에서 나는 향기가 얼마나 진하고 향기로웠는지도.


엄마는 큰 양은 대야에 물을 받아 치자 열매를 쪼개 넣으셨다. 치자의 노란색이 물에 풀리며 실처럼 퍼져나갔다. 그게 모두 풀리면 어여쁜 노란색 물이 만들어졌다. 그 물로 옷감을 물들여 우리들의 때때옷을 만들어 주기도 하셨다. 그 치자 열매는 녹두 빈대떡에도 사용되었다. 맷돌에 간 녹두에 치자를 섞으면 먹음직한 노란색 녹두 빈대떡을 만들 수 있었다. 설 명절 음식 중 수정과가 있다. 거기에 계피를 넣으면 그 색감도 곱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치자의 노란색 색감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나는 어디서라도 치자꽃을 금방 알아본다.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친숙해서였음을 이제야 깨닫다니.

우리 집이 과실나무를 즐겨 심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그래도 다른 집을 별로 부러워하지 않은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 연유를 내가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도 봄이면 마음을 환하게 만들어주는 연분홍 살구꽃이나 하얀 매화꽃이 마당에 흩날리는 추억이 없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살구꽃 핀 마을 / 이호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 지고

뉘 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 없는 밤을 꽃그늘에 달이 오면

술 익는 초당(草堂)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

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분이네 살구나무 / 정완영

동네서

젤 작은 집

분이네 오막살이

동네서

젤 큰 나무

분이네 살구나무

밤사이

활짝 펴올라

대궐보다 덩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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