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거리 시절의 이야기 1

(1) 이야기를 시작하며 (2) 할아버지 외전

by 권영순

(1) 이야기를 시작하며


이제 오십 년 전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봉인된 기억을 해제하는 느낌이 바로 이런 걸까? 엄마가 돌아가신 2019년 4월 이후. 한동안 뭘 하는지 모르고 지냈다. 나 자신에게도 치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엄마의 삼우 제날. 천안 공원묘원에서 오 남매 모임이 있었다. 그날 큰오빠가 가족 이야기를 써서 책을 내 보자고 제안했다. 기억나는 이야기를 각자 써 보자고 한 것이다. 하다 보니 나만 쓰고 있었다. 다행히 가족 단톡방에 내가 쓴 이야기를 올리면 조카들까지 가세해 이런저런 추억들을 꺼내 서로 주고받게 되었다. 가족 이야기를 쓰면서 내가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나 싶었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겪은 이야기를 쓰며 많이 웃었다. 이렇게 웃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돌아보면 뱅골 시절은 우리 형제들의 요람기였다. 대가족이 모여 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가던 시기였다. 좋은 추억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오 남매가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던 배경은 그 시절이 바탕이었다. 우리들 중 누구도 그걸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염려했던 것보다 글쓰기에 속도가 났다. 당뇨 수치를 낮추기 위해 매일 걷기를 한 것도 도움이 됐다. 집에서 나가 건널목만 건너면 올림픽공원이다. 매일 공원 산책을 하다 보면 쓰려고 하던 이야기가 갈수록 늘었다. 의식 아래 가라앉아 있던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라 나를 미소 짓게 했다.


하지만! 사거리 시절 이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왜 눈물부터 그렁그렁해지는지. 처음에는 좀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정말 놀랐다. 내가 그 시절 할머니의 나이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살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한 적이 없다. 의식 아래로 꾹꾹 눌러 놓았다. 너무 마음이 힘든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많은 것들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런데, 이제야 그때를 마주하니 꿈에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할머니의 감정선이 선명하게 읽혔다. 나도 이런 경험이 처음이다. 과거 어느 시점을 돌아보며 이런 감정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에 할말을 잊을 정도였다. 두 분은 이미 40년 전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1976년에 할머니는 1979년에. 오랜 시간을 돌고 돌았지만 우리는 아직 두 분을 추억한다.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제라도 말할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조부모님 두 분에게 고맙고 감사하다고! 죄송했다고! 그리고 아직도 정말 사랑한다고! 두 분의 존재가 우리에게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늦었지만 이렇게 추억할 수 있어서 너무나 소중하고 행복하다고.

할아버지 환갑 사진.jpg 할아버지 환갑 때 사진. 병풍 앞에 갓을 쓰신 분이 할아버지시다

조부모님들이 사거리로 언제 이사를 나가셨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두 분이 뱅골 집을 나가셔서 따로 살기 시작하셨다. 큰오빠 말에 의하면 그 집은 할아버지가 작은 아버지에게 물려주기 위해 지으신 집이라고 했다. 뱅골 집은 큰아들인 우리 아버지에게 물려주시고. 엄마는 대청마루를 사이에 둔 건넛방에서 안방으로 이사 오셨다. 뱅골의 안주인이 그렇게 바뀐 것이다.


‘사거리 집은 방 둘에 가운데 창고 같은 공간이 있었어. 할머니 계시던 북쪽 방엔 부엌이 딸려 있었어. 남쪽 큰방에 할아버님이 계시고. 처음 한동안은 어머님이 끼니때마다 음식을 해 날랐어. 간혹 나와 둘째가 나르기도 하고. 엄청 귀찮았지. 나중에 출입문 근처에 조그만 행랑채를 만들고 유조 아저씨가 거기를 빌려 이발소를 했지.’


큰오빠의 이 설명이 사거리 집에 대한 내 기억과 일치한다. 방은 2개지만 집 안에 창고 같은 공간이 강당처럼 제법 넓었다. 그 공간을 우리는 강당이라고 불렀었다. 마당과 우물, 집 뒤에 딸린 텃밭과 바깥마당 주변에도 우리 밭이 있었다. 두 분은 그곳에 각종 야채와 토마토나 참외 등을 기르셨다. 뱅골 집보다 집의 규모는 작았다. 뱅골 집은 근방에 3개밖에 없는 미음자형 구조를 가졌다. 다만 마을 한가운데 있어 탁 트인 전망은 부족하다. 그러나 사거리 집은 신작로옆에 있어 그 너머 왕재골 들판이 넓게 펼쳐져 있어 제법 훤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옆집 외에는 인가도 좀 떨어져 있었다.


할아버지가 연화동에서 뱅골로 이사하신 이야기는 이전에 한 적이 있다. 연화동의 위치를 보니 내가 궁금해하던 비밀이 하나 풀렸다. 연화동이 어디인지 알게 된 것이다. 구포리 산으로 진입하는 입구에 있던 연화 회관의 이름도 이해되었다. 집은 뱅골에 있는데 우리 집 논밭 대부분은 왕재골 근처였다. 난 그걸 가끔 이상하게 생각했다. 과거 왕재골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을 연화동이라 불렀던 모양이다. 지금은 구포리로 통합되어 거의 사라진 지명이다. 연화 회관이라는 상호도 그냥 주인 마음대로 지은 게 아니었다. 원래 그곳의 지명이었다. 결국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떠났던 연화동 근처로 나이 들어 회귀하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우리가 살던 사거리 주변이 온통 LH공사판으로 엉망이다. 구포리 산도 지형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사거리 집은 구포리나 야목에서 비봉 읍내, 더 멀리는 남양과 서신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반대쪽으로는 인천이나 서울로 가는 제법 큰 신작로였다. 지금의 39번 국도다. 사람들의 통행도 적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사거리 그 집에 친척인 유조 아저씨가 이발소를 열었다는 게 이해된다. 게다가 신작로에 바로 붙어 있어 가끔 지나가는 버스나 트럭 등도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다. 조부모님이 그곳으로 이사했을 당시는 차를 구경하기 힘들었다. 차가 지나가면 뿌연 황토 먼지를 일으켜도 반가웠다. 큰오빠 말대로 한 동안 뱅골에서 엄마가 삼시 세끼 밥을 해 나르셨다. 오빠들도 가끔 두 분의 식사를 날랐단다. 어려서인지 나에게 그 심부름을 시키신 기억은 없다.


나에겐 조금 다른 기억이 있다. 집 짓기를 마치고 아마 부엌도 완성되었는지 더 이상 밥을 해다 드리지 않게 된 어느 날이었다. 할머니에게 들렀다 뱅골 집으로 돌아갈 때였다. 할머니는 마당 가운데서 한동안 이마에 손을 올리시고 집으로 돌아가는 나를 오랫동안 바라보고 계셨다. 야트막한 오르막길을 다 올라 되돌아보니 그때까지도 손을 내리지 않고 보고 계셨다. 하염없이!

어린 마음에도 밥을 먹고 가라는 할머니를 마다하고 집으로 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돌아가는 내내 할머니의 잔상이 남은 탓인지 지금도 가끔 그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할머니는 체구가 자그마하셨다. 천수가 다해 돌아가실 때까지 매일 머리를 깔끔하게 빗고 단정한 차림으로 계셨다. 작은 경대를 끌어다 놓고 긴 머리를 빗어 쪽을 져 비녀를 꼽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다.


제기동 살 때 집에 놀러 온 외사촌 재영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할머니는 그 연세에도 곱고 단정하시다고. 80이 넘어서도 그런 단정함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나이가 들어갈수록 할머니의 단정한 자기 관리를 인정하게 된다. 비교적 정신없이 살았던 제기동 시절에도 우리 할머니는 전주 이 씨 집안 분이라 품행이 남다르신가 보다고 생각했었다.


부모님은 우리를 모두 출가시키고 다시 구포리 산으로 이주하셨다. 조부모님과 어린 삼남매가 살았던 사거리 집 주변을 자주 지나다녔다. 그럴 때면 마당에서 한 동안 나를 지켜보시던 할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집은 오래전 헐려 흔적도 없다. 그 잔상이 오래 남는 이유는 뭘까? 아마 미안해서일 것이다.


나는 심적으로 할머니보다 엄마 편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에게 시집살이를 많이 시키셨다고 생각해서인지 할머니에게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할머니의 손주들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거리 시절 할머니는 갑자기 떠안은 손주 셋에게 별일 아닌 것으로 나무라거나 학대하신 적이 없다. 오히려 우리 셋에게 엄청 시달리셨다. 왜 이제야 이런 기억들이 떠오를까? 그동안은 과거를 돌아볼 여유가 없이 바쁘게 살아와서겠지.


중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 두 오빠를 처음에는 작은 아버지가 맡으셨다. 문제는 작은 아버지 내외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거나, 마음 씀씀이라도 넉넉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거다. 나는 우리 부모님이 서울로 올라가시면서 어떤 과정을 거쳐 제기시장에 수원 상회를 열었는지 전혀 모른다. 어린 나에게는 아는 것도 기억나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수원 상회도 처음에는 과자 같은 무슨 수입품을 팔았던 것 같다. 큰오빠 말은 이렇다.

“작은 아버님이 방산 시장에서 과자 도매상 지배인을 하셨어. 아버지는 비봉 물건을 사다가 청량리 시장에 파는 도매상 비슷한 걸 하시다 제기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하셨어.”

다만 시작 단계에서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에게 그것을 경영할 능력이 부족했던 건 맞는 것 같다. 자꾸 땅을 팔아가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에게 엄마가 위기감을 느끼신 것도 당연한 일이라 생각된다.

엄마는 결단을 내리셨다. 조부모님에게 초등학교 3학년인 나.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셋째, 그리고 겨우 다섯 살인 막내를 맡기셨다. 엄마가 직접 장사에 뛰어들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신 것이다. 이상한 건 내 왜곡된 기억이다. 나는 오랫동안 막내는 부모님이 너무 어려서 데리고 갔다고 생각했다. 그걸 막내가 바꿔주니 기억의 빈자리가 채워지는 이변이 일어났다. 예를 들면 제기동에서 내려야 할 버스를 미아리에서 잘못 내린 적이 있다. 분명 나와 셋째 이외에 누군가 함께 걸어온 기억이 희미하게 났기 때문이다. 그 누군가가 막내였다.


우리가 조부모님과 지낸 기간은 3년 정도의 시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가을 학기에 서울로 전학을 왔던 기억이 나니 맞을 것이다. 조부모님 곁에 남은 우리 셋은 정서적으로 대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열 살, 여덟 살, 다섯 살의 아이들이 가정 형편을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더구나 부모님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걸 감당할 수 있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우리에게 사거리 시절은 부모님이 우리를 데려가지 않을까 봐 매일이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걸 분리불안이라고 한다는 건 나중에 상담심리학을 배우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철이 들어가면서 내 행동으로 제일 마음에 걸려했던 분은 엄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돌아보면 엄마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엄청난 시련이었을 것이다. 나도 내가 엄마에게 저지른 철없는 행동 중 여러 가지를 기억하고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2) 할아버지 외전


우리 할아버지의 성함은 권자이자정자이시다. 체경 종조부의 9대 손으로 태어나셨다. 그런 우리 할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을까? 이미 40년 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손녀로서 평가해 보면 누구보다 성공적인 삶을 사셨다. 나는 그렇게 평가한다. 오남매 모두 당연하다고 인정할 것이다.


지금도 나는 자녀들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존경을 받는 부모들을 부러워한다. 그게 가장 행복하고 만족한 삶이라고 생각해서다. 자녀들이 인정하는 부모는 명성이나 부의 유무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한 적이 많다. 다수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고 부모로서도 성공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세상적으로 성공했다 하더라도 오히려 자녀들의 원망을 받는 경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목격한다. 사실 너무 흔하다.


부모가 자신의 삶을 이끌며 자신은 그걸 지표로 주저 없이 따라간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존경을 우리 할아버지는 받으셨다. 할아버지는 화성 구포리 뱅골에서 이름 없는 촌부로 사셨지만 우리 오 남매는 지금도 서슴없이 할아버지를 기리게 된다.


아들인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늘 이렇게 부르셨다. ‘우리 아버님은~’ 이 말속에 다 담겨 있다. 장손인 큰오빠는 할아버지를 ‘성실과 정직의 화신!’ 이 말로 대신한다. 맏아들과 장손에게 이런 평을 받았다면 누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낙인을 찍겠는가?


할아버지의 삶 자체가 후손들에게는 그냥 모범이셨다. 특별히 온유하고 친근한 이미지도 아니셨다. 강직한 데다 꼬장꼬장하셔서 주변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많이 어려워했다. 뱅골을 쩌렁쩌렁 울리는 큰 소리가 나면 다들 자신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아닌가 찔끔할 정도였다.


뱅골은 원래 전주 이 씨 집성촌이다. 그 마을 한가운데 미음자형의 커다란 집을 짓고 들어와 사람들과 어울려 사셨다. 그냥 떠중이가 아니셨다. 본래 과묵한 성품이신 데다 칼같이 분명한 자기 관리를 해 오신 터라 사람들의 입길에 오르는 일이 거의 없으셨다. 오히려 은근한 존경의 대상이었다.


맏며느리인 우리 엄마는 할아버지에게 시아버지 그 이상의 존경심을 품고 사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할아버지가 일구신 재산을 일부라도 되찾지 못해 얼마나 송구하게 생각했는지 내가 잘 안다. 할아버지를 만나면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다며 속마음을 나에게 자주 꺼내보이셨다. 그게 결코 엄마 탓이 아닌데. 구포리 산에 사실 때 과거 우리 논이었던 왕재골 논들을 바라보며 그런 이야기를 하셨기에 나는 엄마 마음의 안타까움과 쓰라림을 잘 안다.


나는 큰오빠에 비해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많이 부족하다. 직접적인 가정교육은 거의 부모님에게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빠는 곱씹을수록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살아나는 모양이다.

- 내가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 중 기억나는 건 오성과 한음의 배움 이야기야. 둘은 병서를 함께 배웠대. 스승님이 천 독을 하라고 하셨대. 오성은 천 독, 한음은 오백 독을 했대. 둘 다 능숙하게 병서를 다 암기했다나 봐. 둘 다 천재로 소문났으니 당연하겠지.

임진왜란 때 명나라에 군대를 요청하는 국서를 그 사령관인 이여송에게 보내게 됐나 봐. 오백 독을 한 한음은 어떤 말로 설득할지 몰랐대. 오성은 그 편지에 역대 전쟁과 그 전쟁의 명장 이름을 쭉 나열하고 마지막 임진왜란의 명장을 이여송이라고 썼대. 그 편지를 보고 이여송이 참전을 결심했대. -


아버지가 유별나게 학습에서 암기와 복습을 중요하게 여기게 되신 이유는 이런 할아버지의 가르침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할아버지는 배움에서 가장 중요한 자세를 노력으로 보신 거다. 아버지는 그걸 철저히 따른 분이시고.

할아버지는 무학이시다. 늘 배움에 목말라 환갑 즈음에 심 선생이라는 식객을 들여 그 갈증을 풀 정도였다는 이야기를 큰오빠에게 여러 번 들었다.


샛골 훈장님을 찾아가 우리 형제들의 이름을 받아오실 정도로 배운 사람들에 대해 깊은 존경심도 가지고 계셨다. 백 호랑이 다섯 마리 꿈을 예지몽으로 받으신 분이다. 오 남매에 대한 기대도 남다르셨음을 상기하면 우리들의 작명에도 엄청 신경을 쓰셨음에 틀림없다.


배움의 기회는 없었으나 영민하셨던 건 분명하다. 어떤 이야기라도 한 번 들었다 하시면 오래 기억하셨다. 덕분에 큰오빠는 할아버지가 알고 계시던 이야기들을 자주 듣는 기회가 생겼을 것이다. 특히 장손인 큰오빠에게 가르치거나 부탁하고 싶으신 게 많으셨을 테니.


오성과 한음은 어린 시절부터 우리 집안에서 많이 회자된 분들이었다. 영리한 장난꾸러기들로 말이다. 두 분은 양반가 자제답지 않은 각종 장난과 사고를 치고 다녔다. 그러나 중요한 건 난세 인재로서 중요한 덕목들을 모두 가진 분들이었다는 이야기였다.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만이 아니라 힘껏 도우려는 자세 등은 우리가 그분들의 이야기를 통해 배운 것들이다. 오성은 선조 때 명신인 백사 이항복이고 한음은 이덕형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권율과 오성의 이야기도 자주 들었다. 오성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집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그 가지에 열린 감을 권율 집에서 차지하자, 오성은 권율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 주먹이오?” 하고 물었다. 권율이 “네 주먹이지 누구 주먹이겠느냐.”라고 말하자 감을 가로챈 일을 추궁했다는 이야기다.

다른 이야기 속에는 권율이 아니라 그 아버지인 권철이란 분이었다고도 한다. 우리가 유별나게 오성과 한음의 야사를 자주 듣게 된 이유는 뭘까? 아마 오성인 백사 이항복이 권가네와 인연이 깊어서였을 것이다. 위에 말한 감나무 사건을 계기로 오성은 권가네 사위가 된다.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눈에 들어 손녀사위로 낙점되었다는 것이다.

권율과 이항복은 사위와 장인 사이였다. 또한 임진왜란이란 난세에서 그걸 극복하는데 앞장선 최고의 명장이며 명신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이항복은 장난으로 권율의 체면을 종종 구기게 만들었다. 심지어 한 여름 무더위에 힘들어하는 장인에게 속옷을 입지 말고 관복만 입고 출근하도록 부추 킨다. 그리고는 왕인 선조 앞에서 무더우니 모두 관복을 벗고 있자고 제안해 권율을 개망신당하게 만든다. 권가들은 아무리 대범하게 굴어도 기본적으로 내성적인 편이다. 대외적인 명장으로 누구보다 체면을 중시하던 권율에게 있어 그 일은 쉽게 용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사 이항복이 권율에게 이런 지나친 장난을 친 이유는 뭘까? 그걸 생각해 봤다.


권율의 딸과 혼담이 오갈 때 이야기가 있다. 그때도 신붓감에게 장난을 친다. 친구들에게 몽둥이를 들고 쫓아오라고 한 다음 도망간 답시고 신붓감의 치마를 들추고 들어가 숨는다. 그때 그 야무진 처녀는 항복을 향해 이렇게 꾸짖는다. ‘겉만 보시면 되지 이렇게 꼭 속까지 들추고 확인해 보셔야겠습니까?라고.’


난 여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항복은 대외적으로는 대단한 책사에 당대에 드민 명신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장난을 어릴 때만 치지는 않았을 거라는 의미다. 그걸 잘 알고 다잡은 사람이 누구였을까? 똘똘하고 야무진 권가 그 할머니였을 것이다. 만만치 않게 남편 단도리를 했다고나 할까? 더구나 한음 이덕형의 아내에게 장난을 치다 그 입은 똥을 먹어도 된다는 욕을 할 정도였다. 정조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던 조선 양반가 아낙에게 자기와 정을 통했다고 한음에게 장난을 쳤으니 당해도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아마 이런저런 연유로 안사람인 권가 할머니에게 혼나는 일을 애먼 장인인 권율 장군에게 풀지 않았을까 하는 게 내 추측이다. 너무 나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누군가 그 장난의 말고삐를 잡지 않으면 실수가 쌓이고 그 실수의 업보는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걸 막아준 분이 권가 그 할머니가 아니었을까?


큰오빠는 우리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도 대단하셨다고 증언했다. 엄청 애처가셨다고 말이다. 우리 엄마가 논밭 농사에 관심이 적은 일은 아마 그게 집안 내력이 되어서였던 게 아니었나 싶다. 가산이 많으니 밖에서 할 일이 많은 건 당연하다. 여자들이 논밭의 일을 남자와 함께 하는 게 일상적인 시대였다. 여자가 논밭 일을 하는 건 흉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집안일 이외에는 논밭에 나와 일을 거들지 못하게 하셨단다. 심지어 일꾼이나 머슴들과 대화하는 것도 언짢아하실 정도였다는 말까지 있다.


갈수록 논밭이 늘어나니 당연히 할 일도 쌓여 있었을 것은 분명하다. 중농 이상의 지주로 매일이 중노동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중노동은 당연히 몸에 무리가 생긴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환갑 즈음에 결핵에 걸리셨던 게 아닌가 싶다. 대야에 각혈을 하실 정도로 심각한 상황까지 가 많이 위중하셨다고 한다. 그걸 아버지가 조치원에 있던 통합 병원에서 카츄사로 근무하며 미국 약을 구해 할아버지를 치료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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