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할아버지를 기리며 (4) 우리 할아버지 권이정 씨
(3) 할아버지를 기리며
‘버스 정거장과 작은 점포, 자전거포, 방앗간이 있던 곳이 사거리, 우리 집은 거기서 남쪽 도로 따라 삼백 미터쯤 위. 도로 옆의 긴 논이 시작되는 곳.’
큰오빠의 설명이다. 뱅골 집은 마을 한가운데 있었지만 호젓했다. 사람들 통행이 거의 없었다. 동네 사람이 지나가는 것 외에는. 반면 사거리는 오십 년 전 그때가 지금보다 더 번화했다. 밤에도 불빛이 휘황할 정도였다. 심지어 할아버지가 가끔 약주를 드시러 다니시던 가게도 있었다. 약주를 드시고 살짝 취해 돌아오시는 할아버지를 향해 할머니가 눈을 뾰족하게 뜨시던 모습이 지금도 생각난다. 비봉 초등학교 주변이나 비봉 중·고등학교가 있던 읍내 이상으로 북적거렸다.
가장 좋았던 건 방 안에서 내다보이던 풍경이었다. 넓은 논밭에는 사계절의 변화가 뚜렷했다. 무엇보다 보기 좋았던 건 할아버지가 지내시던 방에서 마주 보이는 구포리 산이었다. 그 방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면 계절마다 특별한 풍경이 우리 눈앞에 펼쳐졌다. 특히 단풍 든 산은 색들의 향연이었다! 그 풍경에 대한 기억은 우리들의 추억 상자에 하나씩 담겼다. 그리고 가끔 고향을 그리워할 때 꺼내보는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의 젊은 시절에 대해 잘 모른다. 엄마에게 들은 단편적인 이야기들 뿐이다. 할아버지 이야기는 큰오빠가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다.
‘할아버님은 서당도 거의 다니시지 못한 걸로 알아. 어려서 홀로 되신 큰어머님 양자가 되셨어. 열 살도 되기 전에 친부이신 우리 생 증조부님은 충청도 어딘가에 따로 살림을 차려 나가셨대. 그래서 우리 할아버지가 동생과 함께 가장 노릇을 하셨대. 그 생부님이 할아버님 열다섯 즈음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아우님과 함께 마차로 증조부님 신체를 모셔왔대.‘
큰오빠의 이 기억은 우리에게 할아버지의 청소년 시절을 짐작하게 한다. 할아버지는 어린 나이에 아들이 없는 큰집으로 양자를 가셨다. 큰집은 아들만 없는 게 아니었다. 재산도 없었다. 장손의 의무만 잔뜩 짐 져야 하는 곳이었다. 우리 집에 그렇게 많은 제사가 있었던 이유가 이해된다. 서당을 다닐 형편도 되지 못했다. 100년도 더 전의 일이었으니 당연할 수도 있다. 거기다 친아버지마저 딴살림을 차려 가족을 내팽개치셨다. 요즘 말로 하면 무책임의 극치인 아버지였다. 그러나 우리 할아버지는 소년 가장으로 양모(소년 과부가 되셨다고 전해진다.)에 친모와 동생까지 돌보셨다. 겨우 열 살이나 될까 하는 무렵부터 가족 부양의 책임을 몽땅 지셨다는 뜻이다.
할아버지 입장을 생각해 보니 안타까운 한숨이 먼저 나왔다. 솔직히 이게 무슨 짜증 나는 소리야? 싶을 정도다. 강단도 보통 아니셨다. 지금 중2밖에 안 되는 나이에 충청도 진천에서 마차로 동생과 함께 아버지 시신을 비봉 구포리로 모셔왔단다. 더 어이가 없다. 지금 중2들은 자신이 가장 소중해 다른 사람을 살필 여력이 없다. 오죽하면 중2병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왜 아버지의 의무도 걷어찬 분의 시신을 직접 모셔왔지? 그 먼 길을? 그것도 요즘처럼 차도 없던 시절 소가 끄는 달구지로? 딴살림 차린 곳에서는 자식의 의무를 다할 사람이 없어 장례도 못 치렀다는 건가? 결국 우리 할아버지에게 책임을 미뤘다는 뜻이다. 그것도 양자를 간 우리 할아버지에게. 듣기만 해도 요즘 중학생 말로 빡 친다는 생각이 든다. 겨우 열다섯 살이신데. 진천에서 비봉까지 시신을 모시고 오는 길이 얼마나 두려우셨을까? 그게 강단만으로 되는 일일까 싶다.
하지만 내 이런 비판도 사실 의미가 없다. 그냥 우리 할아버지는 성정이 다른 사람들이 따라가기 힘들 정도로 올곧은 분이셨다는 거다. 성정이 올곧다고 해서 옳다고 생각한 일을 모두 행동으로 옮기기는 힘들다. 그래도 내가 들은 할아버지 이야기는 거의 전설 수준이다.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많이 이해하고 존경한 사람은 아들인 아버지보다 엄마가 더하셨다.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할아버지는 과묵한 편이셨다. 큰 며느리인 엄마를 아끼셨어도 뱅골 시절 기억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밥상이 마당으로 내던져진 일이었다. 무슨 일로 화가 나셨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할아버지 목소리가 뱅골을 쩌렁쩌렁 울렸다는 건 확실하다. 할아버지는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셨다. 그게 작렬하면 기싸움의 달인인 잔소리꾼 할머니도 감당이 안 되어 그냥 입을 다무셨던 것 같다. 아녀자에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게 아니다. 너무 옳은 말과 행동만 하셔서 누구라도 할 말이 없게 만드셨다는 거다. 구포리는 안동 권 씨와 전주 이 씨가 모여 살던 집성촌이었다. 왕족이라는 자존감을 업은 전주 이 씨들도 할아버지에게 감히 함부로 대거리를 하지 못했다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친척들 중에 꽤 많은 분이 그런 이야기를 하셨다.
‘할아버님은 배우지 못했어도 정말 총명하셨어. 뱅골 큰 사랑에 심 선생님이란 학자가 아마 한 두 해 정도 식객으로 있었는데 그분이 서도 창인 관산융마를 잘하셨어. 그걸 배우셔서 여유가 생기시면 그 관산융마를 부르셨지. 엄청 긴 노래야. 신광수란 분이 과거 시험에서 지은 시인데. 그리고 나이 드신 뒤엔 골패라는 놀이를 하셨어. 숫자 맞추기 놀이 같은 것인데 상아로 만든 귀한 걸로 기억해.’
모두 큰 오빠의 기억이다. 난 할아버지가 창을 부르시는 걸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서도창인 ‘관산융마’도 뭔가 하고 인터넷을 뒤져봤다. 국문과 졸업에 평생 국어선생을 했지만 솔직히 처음 듣는 단어(?)였다. 두보가 악양루에 올라 고국의 전란을 탄식한 ‘등악양루’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그걸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의 주제로 출제했단다. 그 과거에서 2등을 한 시인데 아주 유명하다는 설명이었다. 더구나 그 주제가 나라에 대한 사랑이다.
이걸 즐겨 부르시던 분이라면 사거리 안마당 울안에 가득 심겨 있던 무궁화도 설명이 된다. 할아버지는 일본의 압제를 고스란히 겪은 분이시다. 6.25 이후까지 우리나라 격동의 시절을 살아 내셨다. 할아버지에게 안마당에 왜 무궁화만 잔뜩 심으셨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속마음은 과일나무나 좀 많이 심으시지 했던 생각으로 물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하셨다. 왜놈 때는 순사들이 무궁화도 마음대로 심을 수 없게 했다고. 해방 뒤에 무궁화를 마음대로 심을 수 있으니 세월이 얼마나 좋아졌느냐고. 우리는 사거리 집에서 할아버지가 돌보시던 무궁화를 보고 자랐다. 할아버지 나름의 나라 사랑의 모습을 말이다.
큰오빠는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오산 비행장 건설에 동원되셨어. 강제 노역이지. 채권을 받았대. 일본어로 된 그 휘황찬란한 채권은 제기동 살 때까지 가지고 계셨어. 결국 휴지 조각이 되긴 했지만. -
할아버지가 오산 비행장 노역에 동원되셨다는 건 나도 잘 모르는 이야기였다. 뭐 일제강점기에 피해를 입지 않은 가족이 있었을까? 꼬장꼬장하신 성격에 부당한 대우를 참아내셔야 했을 젊은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무궁화를 심으신 이유가 더 확실히 이해된다.
게다가 우리 집이 만석꾼도 아니고 대대로 내려온 벼슬아치 집도 아닌데 사랑에 식객까지? 모셨단다. 할아버지 본인은 배우지 못하셨어도 배움에 대한 갈망은 숨기실 수 없으셨나 보다. 그래서 그 시절 드물게 아들을 대학까지 보내신 게 아닐까? 손주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그렇게 흐뭇하게 생각하셨을 것 같다.
제기동 살 때다. 할아버지는 아침이면 문간방 앞 쪽마루에 앉아 계셨다. 학교 가는 우리들을 보기 위해서였던 게 아닐까? 나를 보시면서는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다.
‘지게꾼이라도 불러야 할 것 같다’고.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은 사물함도 급식시설도 전혀 없었다. 책가방, 도시락, 체육복, 신주머니까지 잔뜩 들고 지고 학교를 가야 했다. 체격이 작은 내가 그걸 끌고 버스까지 타고 학교를 다니는 게 안타까워서 하신 말씀이셨을 것이다. 난 단언할 수 있다. 손녀에게 여자가 학교는 다녀서 뭘 하느냐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으셨을 거라고.
할아버지 하면 떠오르는 나무 종류가 하나 더 있다. 바로 포플러다. 사거리로 이사하신 다음 할아버지는 신작로 양쪽에 포플러를 심으셨다. 심지어 왕재골을 가로질러 흐르는 개울 둑에도 양쪽으로 나란히 심으셨다. 나무는 말 그대로 쑥쑥 자랐다. 얼마 안 돼 아름드리나무로 자랐다. 아직 어려서 학교에 다니지 않았던 막내의 기억이다.
‘누나랑 형이 학교에 가고 나면 나는 신작로에서 나무 실패로 만든 탱크를 굴리며 놀았어(지금 생각해 봐도 엄청 짠하다. 엄마 떨어진 다섯 살의 모습이라서 더 그럴까?). 옆집에도 내 또래 애가 있어 서로 오가며 같이 놀기도 했는데. 그 애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할까? 신작로 옆 포플러 나무가 줄 지어 서 있었는데. 그 나무들은 할아버지가 심었다고 하더라고. 나는 그 나무 아래 돗자리를 펴고 누워 나무 위에 구름이 걸려 있는지 확인하기도 했어. 어느 여름날 포플러 나무 근처 수풀 속에서 개똥참외가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신기해했던 기억도 있는데. 지금 차량과 매연으로 가득한 39번 국도를 생각하면 같은 길이라고 생각하기도 힘들 거야.’
할아버지가 심으신 나무는 한두 그루가 아니었다. 지금 정거장으로 따져도 2개 정거장에 걸쳐져 있었다. 그 나무들은 할아버지의 성품대로 일직선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겼다. 저녁이면 하늘을 향해 쭉쭉 자란 나무들은 바람결에 서로의 잎을 비비며 나무의 노래를 불렀다. 부모를 떨어져 한참 외로움을 타던 나는 그 길을 걸으며 노래도 하고 갖가지 공상도 했다. 학교 공부를 등한히 해 성적은 직선으로 내리 떨어졌어도 상상력은 날이 갈수록 자란 시간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얼마 뒤 그 나무들이 몽땅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됐다. 나무의 숫자만 해도 엄청난 양이었을 것이다. 그것들이 지금 남아 있다면 멋진 포플러 가로수길일 텐데. 우리들의 소중한 추억도 함께 사라진 것 같아 오래오래 아쉬웠다.
(4) 우리 할아버지 권이정 씨
할아버지는 손재주가 아주 좋으셨다. 반듯하신 성품대로 도구에 대한 관리도 철저하셨다. 엄마가 할아버지에게 혼나는 일이 생긴다면 대부분 물건들에 대한 관리 부실이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겨울이 되면 우리를 위해 썰매와 방패연을 만들어 주셨다. 얼레에도 실을 넉넉히 감아주셨다. 얼레에 실이 넉넉하면 연을 높이 멀리 날릴 수 있다. 지금도 할아버지가 방패연에 손으로 그려주신 태극 문양이 선명하게 기억난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극명한 차이점이 있다. 도구를 이용해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과 관리 수준이다. 할아버지는 추수를 마치고 여유 있는 시간이 되면 우리를 위해 썰매를 만드셨다. 사거리 문 앞 양지바른 곳에서 썰매를 만드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햇살이 그런 할아버지의 밝은 얼굴에 쏟아져 더 환하게 빛이 났다.
할아버지는 뭐든 5개를 만드셨다. 우리들의 썰매는 나이에 맞게 제작되었다. 태극무늬가 들어간 방패연만이 아니라 꼬리가 긴 가오리 연도 만들어주셨다. 우리는 반질반질하게 다듬어진 썰매와 방패연 세트를 나이나 남녀 차별 없이 받았다. 대지에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우리는 썰매를 만드시는 할아버지 옆을 서성거리며 겨울을 기다렸다. 방패연에 그려주셨던 정교한 태극무늬와 대나무를 정확하게 쪼개 붙이시던 섬세한 손길엔 할아버지의 사랑이 부족함 없이 담겨 있었다.
남편은 구포리 산으로 낙향하신 아버지 일을 도와야 할 때마다 아버지의 도구 관리에 대해 자주 툴툴거렸다. 연장들을 너무 함부로 취급하신다는 불만이었다. 사용한 도구는 깔끔하게 손을 보고 보관되어야 한다. 그런데 아무 데나 방치해서 비를 맞히신다고 했다. 연장들이 쉽게 망가져 쓸 수 없게 만들어 버리신다고. 심지어 아버지 농대 출신 맞냐고 까지? 나는 내 잘못도 아닌데 왜 나한테 불평이냐며 가끔 말다툼을 했다. 아버지는 그 면에서 할아버지의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을 따라가지 못하신 것 같다. 어쩌면 아버지는 공부에 꼼꼼함과 치밀함을 다 써버리신 게 아닐까? 대패나 망치, 톱 등이 가지런히 챙겨져 있던 할아버지의 연장통을 생각하면 그 차이가 더 선명하다.
얼음이 얼기 시작하면 우리는 왕재골이나 구포동 고개 근처 뱅골 논에서 즐겁게 썰매를 탔다. 드넓은 벌판에서는 방패연을 날리며 겨울 한나절을 보냈다. 오빠나 동생들은 할아버지가 깎아주신 팽이나 자치기 용 막대 등도 받았다. 우리 동네에도 그런 놀잇감을 할아버지에게 받는 애들은 거의 없었다. 남편도 팽이는 스스로 깎아 놀았다고 한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직접 만드신 걸 받았다고 하자 솔직히 좀 부러워하는 느낌이었다.
‘넓은 마당 한 구석에 뒷간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거기서 두엄을 퍼서 텃밭에 뿌리시던 기억이 나. 그리고 어느 여름날 아마도 장마 끝 무렵이었을 거야. 텃밭 앞단에 토마토가 있었어. 비가 그칠 무렵 거기서 토마토를 따먹었는데. 그 맛과 향기가 아직도 입에 각인이 되었는지. 나는 지금도 토마토를 먹을 때마다 그때의 맛과 향이 같은 지를 되새기곤 해. 확실히 대형 매장에서 파는 토마토와는 맛이 다르다는 느낌이었어.’
사거리 기억이 더 생생한 막내의 말이다. 나도 밭에서 직접 기른 토마토를 따서 먹던 기억이 생생하다. 뱅골 텃밭에도 토마토를 길렀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상당히 출출했다. 가방을 마루에 팽개치고 밭으로 달려갔다. 빨갛게 익은 토마토를 골라 따 옷에다 쓱쓱 문질렀다. 물에 씻어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반을 쪼개면 속살에 뽀얀 분가루가 있었다. 지금은 토마토를 사 반을 쪼개어 봐도 분가루를 찾기 어렵다. 입으로 한입 베어 물면 시금시금하면서도 달큼한 느낌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향수를 부르는 맛?!
사거리 시절만 해도 할아버지는 밭에다 이것저것 기르셨다. 뒤란 우물가에 붙은 텃밭에는 다양한 채소와 과일이 자랐다. 제기시장에 수원 상회를 열고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들은 매우 바쁘셨다. 겨우 명절에나 하루 내려와 제사를 지내고 서둘러 올라가셔야 했다. 그러니 농사일은 나이 드신 할머니 할아버지가 주도적으로 하실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그래도 감자, 호박, 참깨, 들깨, 콩, 토마토, 참외 등이 밭에서 무럭무럭 자랐다.
‘할아버님은 정직의 화신, 마음이 정말 꿋꿋하셨어. 어떤 시련에도 좌절을 모르셨던 거 같아. 전에 환갑 사진이 있었는데. 그전에 너무 과로하셔서 결핵에 걸리셨어. 내가 어린 시절 대야에 피를 토하시던 걸 봤어. 아버님이 군대에서 외국 치료약을 구해 와 고치셨지만 당시 불치병이던 결핵을 이기고 팔십 가까이 사신 것은 그만큼 강단이 있으셨기 때문이라 생각해.’
큰오빠의 말이다. 할아버지가 남다르게 총명하셨다는 건 나도 안다. 요즘 말로 뇌섹남이셨다. 나는 제기동 할아버지 방에서 가끔 오목을 두었다. 많이 봐주시는 데도 할아버지를 이겨 본 적이 없다.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정직하게 가산을 일구셨다. 그 배경에 남다른 총명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엄마는 가끔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학비와 생활비 마련을 위해 실려 나가던 쌀가마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가 국립대를 다니셨는데도 쌀을 실은 마차가 몇 대였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일구신 가산은 우리가 서울로 이주하는 시점에서 절반은 사라졌다. 할아버지가 일구신 재산을 되찾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쩌나 하시던 엄마의 걱정은 할아버지에게 가지신 나름의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게 이해가 된다.
더구나 할아버지 말년은 평생 일구시던 땅과 터전을 남에게 넘겨주고 서울로 올라오실 수밖에 없었다. 다 늙어서 고향을 떠나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들었을지 우리는 잘 몰랐다. 사실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도 없다. 사거리를 떠나 서울 제기동 집에서 우리 가족이 다시 모여 산 기간은 10년이 채 안 된다. 할아버지는 고향을 떠나시면서 충격을 받으셔서인지 정신이 많이 흐려지신 상태였다. 70대 초반이실 때 치매 증상이 나타나셨다.
우리가 제기동에 정착한 70년대는 지금처럼 동네가 복잡하지 않았다. 차량 통행도 적었다. 할아버지는 제기 시장과 집을 오가는 일이 유일한 나들이셨다. 다른 곳은 갈 생각도 못하셨다. 그런데도 종종 집을 찾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정신이 흐려지신 할아버지에게 도시는 뱅골과 다른 미로처럼 느껴지셨을 것이다.
아버지 이야기에서 더 자세하게 쓰겠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우직한 정직함이 아버지의 목숨을 구했을 거라 추측한다. 아버지가 대학에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6.25가 터졌다. 당시는 4월 입학이었다. 아버지는 야목에서 수인선을 타고 학교를 다니셨다고 하셨다. 당시는 대학생도 교모를 쓰고 망토가 있는 교복을 입고 다녔다. 서울대 교복을 입고 다니시는 아버지를 근처 중·고등학생들은 몹시 부러워했다. 전쟁이 터지자마자 인민군들이 들이닥쳤다. 피난은 생각도 못한 채 갑자기 당한 일이었다. 아버지 말에 의하면 수인선을 함께 타고 다니던 학생들이 아버지를 지목해 청년위원장을 맡게 만들었다고 하셨다.
할아버지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에게 자유를 주셨다. 장남인 아버지에게 집안일은 걱정 말라며 주신 자유였다. 서울로 가 고학을 해서라도 학업을 계속해 보라고 허락하신 것이다. 아버지가 고학을 하며 어렵게 대학에 입학할 시기 할아버지의 건강은 심각하게 나빠지셨다. 결핵으로 피를 토하는 지경이 되신 것이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걸 포기하셔야 했다. 공대를 포기하고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농대로 진학하신 이유다. 농사일을 도우며 학교에 다니는 중에 6.25가 일어났다. 개인의 잘못이 아님에도 이 일은 두 분의 삶에 엄청난 시련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십 대 초반 성실하게 노력만 하면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위치셨다. 그러나 전쟁은 치열한 노력으로 일군 아버지의 빛나는 미래를 모두 앗아가 버렸다. 경기도에서도 드문 서울대생이니 공산당들이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을 거라 생각된다. 피난을 가지 못한 아버지는 청년위원장이란 감투를 원하든 원치 않든 써야 하는 처지가 되셨단다.
엄마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는 각종 전쟁 물자 공출 업무에 동원되었다. 그렇게 강제로 빼앗은 물건을 누가 보상해 주었을까? 할아버지셨다. 밤이면 아버지를 앞세우고 빼앗은 물건에 해당하는 보상을 하러 다니셨다고 하셨다. 보상이 어려울 때는 사죄라도 하러 다니셨단다.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할아버지의 정직한 성품에 대한 보상은 인민군들이 물러간 다음 돌아왔다. 친척인 판사의 도움도 있었지만 수원교도소에 갇힌 아버지를 살리는데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이다. 그때 연루되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태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도망쳤거나 교도소에서 사망한데 비해서 말이다.
나는 만들고 제작하는 능력이 거의 없다. 심지어 어떤 작은 기계라도 분해하고 다시 조립할 때 그 무능력은 남들까지 당황하게 만든다. 기계 조작 능력에 탁월한 남편과 살다 보니 그런 문제로 약점을 잡힌 적이 많다. 자주 그런 일로 말다툼을 했으니 하는 말이다. 다행히 나는 책을 좋아했다. 감성적인 성격은 많은 부분 엄마에게 교육받았다고 생각한다. 국어 교사로서 이런 기질과 특성은 큰 도움이 되었다. 교사생활 후반기 독서와 토론 논술교사로 나름 인지도를 얻게 된 배경에도 그 영향이 컸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나는 할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거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특히 만들기 능력은 작은 오빠나 셋째가 거의 몰빵 했다고 부러워했다. 하지만 나의 삶을 돌아보니 닮은 점도 있는 것 같다. 카리스마 작렬의 성격 일부를 닮지 않았으면 중학생을 가르치는 교단에서 34년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중학교는 사춘기 학생들이 모인 곳이다. 당연히 매일 문제가 일어난다. 나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해 옳지 않다고 판단되면 쉽게 포기하거나 절대 굴복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고집스러운 성격이 어디서 왔나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겉으로는 순해 보이는 데 의외로 고집과 강단이 있다는 말도 자주 들어서다. 아마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의 성품에 대한 이야기를 동화처럼 듣고 자라 서가 아닐까?
우리 오 남매의 삶도 돌아보면 할아버지의 근면함과 올곧은 정직함을 바탕으로 한 판단력을 모두 얼마간 닮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할아버지가 행동과 가르침으로 직접 보여주신 깊고 넓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고비가 없는 인생은 없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우리에게 퍼부어 주신 사랑은 얼마나 큰가? 인생에 닥치는 어려운 고비를 너끈히 뛰어넘어가며 살아갈 원동력 그 이상이다. 우리는 그렇게 훌륭한 분의 손자·녀로 태어나 정말 운이 좋았다. 그리고 늦었지만 이렇게라도 할아버지를 기릴 수 있어 얼마나 행복한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