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연가 1

(1) 이수이 여사님 우리 할머니 (2)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해도

by 권영순

(1) 이수이 여사님 우리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이 자수자이자를 쓰시는 이수이 여사님이시다. 체경 할아버지의 9대손인 우리 할아버지와 몇 살에 혼인을 하셨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쓰던 나도 기억나는 게 없으니 물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아마 10대 중반에 우리 할아버지와 혼인하셨을 것이다. 화성 지역에서는 전주 이 씨와 안동 권 씨의 혼맥이 자연스러웠다. 고모 두 분이 남양 홍 씨와 혼인하셨던 것처럼 할머니도 일종의 세혼이었다. 양반 가문임을 보증하는 두 집안이니 당연했을 것이다.


할머니가 우리 할아버지와 혼인하시기 전 사시던 곳은 비봉에 있는 상기리란 곳이었다. 나는 그걸 오랫동안 모르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청요리로 이주하신 다음에야 그곳 지리를 너무 잘 아셔서 그때야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그 지역이 아버지의 원래 외가였으며 청년 시절까지 그곳을 제법 오가셨다는 사실도 그때 알게 되었다. 내 착각의 이유는 단순하다. 뱅골 우리 집 근처 안뱅 골 남국이 오빠네 집이 할머니의 친정이었으니 당연하다. 상기리에서 안뱅골로 할머니의 친정이 이사 왔을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뱅골에서 미음자형의 집을 짓고 사는 집은 모두 세 곳이었다. 전주 이 씨인 원구 오빠네. 중간에 우리 집, 그리고 안뱅 골의 남국이 오빠네 집. 세 집은 가산도 비슷해 친근하게 지낸 편이었다.


나는 마을 이야기에 대해 잘 모른다. 어디 따로 기록된 것이 있을 리 없으니 어쩌다 풍문으로 흘려듣는 것들 외에는 아는 것이 없을 수밖에. 뱅골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라야 별 것도 없었지만 문제는 그런 것들조차 관심을 가지기에는 내가 너무 어렸다는 거다.

매일 각종 놀이에 아버지가 주신 과제를 마칠 시간도 부족한데 무슨 남의 집 일에 관심을 가지겠는가?


- 남국이 형네 집은 아버님 외가. 우리에게는 진외가. 할머님은 일남 삼녀의 둘째 따님. 제일 위가 동대문밖 할머니. 이종찬 대장 집안으로 출가. 다음이 할머니 오빠 분. 할머니 시집오신 뒤에 우리 동네 아랫말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 천상 샌님. 항상 사랑에서 바둑을 두시던 모습만 기억나. 조개를 갈아 만든 하얀 바둑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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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샌님이라고 할아버지는 별로 좋아하진 않으셨어. 내 생각엔 부러운 점도 있으셨던 듯. 우리 할아버지도 환갑 즈음부턴 사랑에 식객도 두시고 창도 배우시고 골패도 하시면서 여유 있게 보내셨어. 폐병에 걸려 힘들어하셨지만 기본적인 성실함이야 그대로 셨지. -


- 그 아드님이 서울 이모님 댁인 동대문밖 할머니 집에서 군복 공장에 근무하셨는데 서울서 혼인한 뒤에 뱅골로 오셨어. 그 부인은 서울서 여학교 나온 인텔리셨는데 세상 착하셨어. 우리 인천고모보다 약간 나이가 아래인데 내 기억에 딸이 한분인가 두 분인가 있고 아래로 쌍둥이 아들이 있었어. 남국이형이 쌍둥이 중 한 명. 나보다 세 살인가 많았어. 용산 중학교 들어갔지. 그 동생은 초등 4학년 즈음에 뇌염으로 죽었어. 착한 사람의 불행한 모습을 보는 것은 힘들어. 그래도 뒤가 있겠지. -


큰오빠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데다 초등학교를 뱅골에서 마쳤다. 당연히 동네에 친구도 많고 사람들의 관계도 저절로 알게 되는 게 있었을 것이다.


어쨌건 나는 할머니의 친가인 남국이 오빠네 집을 가끔 드나들었다. 아마 이것저것 심부름 등을 한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조금 다른 일이다.

서울로 시집간 딸이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다. 첫 딸을 출산하고 후유증이 생겨 몸을 움직이기 곤란한 병을 얻어 돌아온 것이다. 처음에는 병구완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직 젊으니 금방 훌훌 털고 일어날 것이라 믿은 것이다. 그 집에 가면 대청마루 지나 안방에 그 젊은 딸이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남국이 오빠의 어머니인 그 아주머니는 더운 여름이면 부채질을 해주며 딸을 간호하셨다. 서울에서 사위와 손녀가 오는 날이면 제법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 그러다 어느 날 아직 젊은 사위는 재혼을 통보하러 왔다고 했다. 어린 딸을 키우는 것도 어렵지만 아내가 다시는 회복하기 어려운 걸 알아서였을 것이다. 사위를 말리지도 못하고 이혼장을 받아 든 남국이 어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나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딸을 출산한 뒤 생긴 문제의 책임을 왜 친정에서 모두 짐 져야 하는지 좀 의아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뇌염으로 아들을 잃고 딸마저 자리를 털고 일어날 희망이 없어진 남국이네 어머니는 이후 어떤 삶을 사셨을까?


우리가 서울로 이주할 때까지 그 댁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소문을 들은 기억이 없다. 그 딸이 얼마나 더 살았는지도 들은 기억이 없다. 집안 어려움들이 잘 풀렸으면 좋으련만. 더구나 할머니 친정 일인 데다 한 동네서 살다 보니 늘 마음이 더 간 것은 맞다.


우리가 뱅골에 살 당시 서울 4대 공립 중 하나인 용산 중학교 진학은 대단한 일이었다. 비봉초등학교에서 전교 1등을 해도 수원에 있는 중학교조차 가기 힘들었다. 당시에도 도농 간의 학력 격차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용산 중학교를 갔으니 드물게 영재 소리를 들었을 터. 당시 뱅골에서 드문 여고 출신 엄마에 지주 소리를 듣는 집안이었으니 남국이 오빠도 힘 꽤나 받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집안에 불행한 일이 거듭되며 어려움도 많았을 거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우리 할아버지는 어떤 과정을 거쳐 할머니와 혼인을 하셨을까? 할머니는 시집오실 때 종을 데려오실 정도로 어느 정도 가산이 있는 집 규수셨다. 반면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두 분이셨다. 낳아주신 어머니에 양자로 들어가 모셔야 하는 양어머니까지. 요즘이라면 우리 할아버지는 장가갈 꿈도 못 꾸실 악조건이시다. 거기에 가산이라도 넉넉한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번듯한 집안에서 신붓감을 데려오실 수 있는 다른 요인이 있었을 텐데. 그게 무엇이었을까 상상해 봤다.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혼인하던 때는 사람 됨됨이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시어머니가 둘인 층층시하라고 해도 할아버지의 효심과 인품을 아버지 외가에서는 소문으로 들어 잘 아셨을 것이다. 두 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사셔도 할아버지는 자신의 책임을 미루는 사람이 아니셨다. 진천에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모셔다 예를 다해 장례를 치른 일 등이 당시에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을 게 분명하다. 허랑방탕 제멋대로 행동할 수도 있는 가정 형편이었지만 책임감이 남다르셨을 테니 그걸 분명히 알아보신 게 아닐까?


나이 들어서도 할머니는 외모가 곱고 단정하셨다. 당연히 처녀 시절 근동에서도 알아주는 고운 외모 셨을 것이다. 책임만 잔뜩 지고 살던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혼인하시고 그럴 수 없이 애중하셨다는 이야기가 있다. 할아버지는 평생 우리 할머니 외에 다른 여자를 가까이하신 적이 없다. 풍류를 즐기셨으나 선을 넘는 행동을 하신 적이 없었던 것도 분명하다.


할머니를 아녀자라고 낮춰 보시지 않고 나름 존중을 해 주셨을 게 확실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있다. 할머니는 입찬소리를 잘하셨다. 손녀인 내 눈에는 그게 자주 보였다. 특히 뱅골 시절에. 그런 성정은 할아버지의 무한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할아버지가 할머니에게 잡혀 사신 분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큰 소리를 자주 내시는 분도 아니셨다. 할머니의 입찬소리가 경우를 벗어나 분란을 일으킬 조짐이 있을 때만 큰소리를 내셨다. 그럴 때 할머니가 입을 다무시고 나름 수긍하시는 행동을 하시는 걸 나도 여러 번 봤으니 분명하다. 할아버지의 우직할 정도의 성실함과 정직함을 속으로는 존경하셨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고집을 부리신다고 느끼셨어도 할머니의 잔소리가 길지는 않았던 게 기억나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의 결정에 할머니 역시 많이 이해하고 협조하셨기에 가산을 일구는 게 가능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가산을 일구는데 가장 많은 공을 양어머니에게 돌리셨다. 아내인 우리 할머니도 할아버지의 그런 마음을 잘 아셨던 듯하다. 그분에 대한 제사를 정성을 다해 지내시는 걸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본인의 시집살이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걸 난 들어본 적이 없다. 짐작해 본다면 시어머니 두 분은 우리 할머니를 할아버지만큼 곱게 보긴 게 아닐까 싶다. 구박을 받으신 적이 많았다면 분명 나에게도 그 이야기를 하셨을 텐데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전주 이 씨 집안의 둘째로 태어나셔서 우리 할아버지에게 시집와 한평생을 열심히 사셨던 우리 할머니 이수이 여사님. 사거리 시절 우리 할머니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계란형의 단정한 얼굴과 무명 치마허리를 질끈 동여매신 채 우리들의 밥을 짓던 할머니. 할머니!


(2) 삶이 우리를 힘들게 해도


얼마 전 10년 넘게 기르던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갑자기 그 좋아하던 밥을 뚝 끊어버려 병원에 데려갔다. 혈액 검사로 나온 병명은 급성 간 부전. 갑자기 고양이 병시중을 들게 된 나는 걱정과 당혹스러움으로 혼란을 겪어야 했다. 엄마를 보내드린 지 두 달도 안 되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별을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10킬로를 육박하는 고양이를 끌고 동물병원에 다녔다. 개와 달리 고양이는 영리해서 밥과 약을 먹이기 힘들다. 뭘 먹이면 자꾸 토하니 겁이 나서 더 병원을 의지한 것 같다. 약의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세 개에서 나중에는 여섯 개로. 약의 숫자만 늘었지 고양이는 여전히 스스로 먹지 않았다. 상태가 갈수록 나빠졌다. 병원에 가서 강제 급식을 하고 돌아온 날은 더했다. 고양이를 고문했다는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어느 날 고양이에게도 정해진 수명이 있는데 이런 고문을 하는 게 과연 옳은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마 큰아들의 강한 의문 제기도 한몫했을 것이다. 큰아들은 강제로 약과 밥을 먹이는 게 옳은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고 했다. 고양이를 동물병원에 데려가 돈을 줘가며 고문을 하는 건 아닐까? 무슨 치료약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간 영양제가 약이라고 했다. 병원 치료 효과에 의문이 생기자 더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간 부전으로 인한 황달은 갈수록 심해졌다. 마루에 오줌을 싸는 상태까지 왔다. 소변이 털에 닿으면 털이 뭉텅뭉텅 빠졌다. 병원에 데려가 고문을 계속하는 걸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들어도 차라리 집에서 내가 밥과 약을 먹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는 온갖 진상을 부리는 아들을 둘이나 밥을 먹이고 씻기고 달래 가며 키운 사람이다. 그런데 고양이 한 마리 집에서 밥이랑 약을 못 먹일 이유가 없다고 마음을 바꾸었다. 동물병원에 가면 주사에 강제 급식에 기진맥진해서 돌아오는 모습이 너무 안 돼 보여 그런 결심을 굳힌 것 같다. 무지개다리도 집에서 돌보다 보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잘한 일이었다.


작은 아들은 어릴 때 밥 먹기 싫으면 배가 아프다며 갖은 진상을 부렸다. 나는 속으로 ‘도대체 누굴 닮아 저런 진상을 부리지?’ 싶었다. 뭐든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남편을 닮은 건 분명 아닌데 누굴까??? 할머니 이야기를 쓰기 위해 과거를 떠올리다 문득 깨달았다. 작은 아들의 배 아프다는 핑계 유전자가 내게서 나왔음을 말이다.


사거리 시절 할아버지는 다양한 수종의 나무를 가꾸셨다. 할머니는 특별히 무엇을 기르셨을까? 뒤 울안에 양귀비를 키우셨다. 꽃 양귀비가 아니라 진짜 양귀비였다. 중국의 전설적인 최고 미녀의 이름을 딴 꽃인 데다 예뻐서 더 기억에 남아 있다. 붉은색의 화사한 꽃이 피면 아주 예뻤다. 지금은 아편 원료라 함부로 재배하지 못한다. 내가 이 꽃을 기억하는 이유는 딴 데 있다.


나는 지금까지 어릴 때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다고 믿어왔다. 오십 년 전은 먹을 것이 부족한 시절이었다. 살림이 살 만했어도 거기서 거기였다. 삼시세끼 챙기기 힘든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니 밥만 제때 먹을 수 있어도 감지덕지였을 텐데 무슨 반찬 투정? 이렇게 생각해 왔던 것이다. 아니 오랫동안 믿어왔다.


나는 할머니의 하나밖에 없는 손녀였다. 할머니가 이불 바느질을 하실 때면 나는 자주 그 옆에 붙어 앉아 놀았다. 할머니는 일찍 노안이 오셨다. 바느질은 잘하시지만 바늘귀에 실을 꿰는데 어려움이 있으셨다. 나는 어디 가지 않고 그 옆에서 바늘귀를 꿰어드렸다.


어린 시절 나는 배앓이를 자주 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무슨 우환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할머니가 무당을 불러 굿을 했다. 사거리 집에서였다. 알록달록한 복장에 장군들이 쓸법한 어마어마한 칼까지 든 무당이 내게 할머니 옆에 누우라고 했다. 미리 할머니의 부탁을 받았을 터였다. 번쩍거리는 칼에 겁을 먹은 나는 할머니 옆이라도 눕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는 내 배앓이를 낫게 한다며 한사코 옆에 눕도록 하셨다. 밥 먹기 싫을 때마다 내가 대던 핑계는 ‘배 아프다.’였다. 무당의 큰 칼이 내 배 위를 지나칠 때의 공포와 두려움이란? 가끔 그 장면이 꿈에 나왔다면 어떤 기분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배가 아프다고 하면 아버지는 곰쓸개를 물에 타서 내게 먹이셨다. 그 웅담은 막내 외삼촌이 처가에서 구해왔다고 하셨다. 막내 외숙모의 오라버니 되는 분이 왜정 때부터 전라도 어디에서 유명한 사냥꾼이라 구해 주셨단다. 웅담은 먹기 괴로울 정도로 썼다. 작은 소주잔에 물을 담아 손톱보다 더 작은 크기로 자른 웅담을 녹이면 까만색 물이 되었다. 소주잔에 담긴 물이니 먹을 양이 많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걸 먹는 건 보통 참을성으로는 힘들었다. 내 위장에 머물러 소화 불량을 일으켰던 음식물들이 쓴맛에 놀라 당장 소화가 되어 내려갈 정도였다고 할까?


할머니는 양귀비를 먹이셨다. 둘 다 약효는 신기했다. 통증이 순식간에 가라앉았기 때문이다. 어른이 되어서야 양귀비가 재배 금지 식물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자라던 당시는 마약이 아니라 상비약이었는데. 사거리를 떠난 뒤 오래 양귀비를 구경하지 못했다. 지금은 봄마다 올림픽 공원에서 마약 성분을 제거한 꽃 양귀비를 볼 수 있어 아쉬움을 덜고 있다.


가족 이야기를 쓰면서 내가 가장 마음이 아팠던 건 조부모님에 대해 우리의 이해가 너무 부족했다는 거다. 겨우 열 살 안팎에 할머니의 마음을 읽는다는 게 무리였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오십 년이 훨씬 지나 당시 할머니의 처지를 돌아보니 어떤가? 그저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뿐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꿀벌은 슬퍼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 해의 나도 그렇게 바쁘고 정신없었다. 할머니에 대해 제대로 애도하고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졸업 논문에 임용고시 준비에 제정신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나는 할머니의 생년월일을 잘 모른다. 두 분의 혼인이 늦으신 건 아니었다. 다만 장남인 아버지를 꽤 늦게 얻으셨다고 들었다. 사거리로 두 분이 옮기셨을 때 대략 60대 초반 정도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두 분에게 갑자기 손주 셋이 떠 안겨졌다. 열 살 여덟 살 그리고 다섯 살. 어린 셋을 돌보는 일이 쉬웠을까? 그것도 갑자기 부모를 떨어져 정서적으로 힘들어하는 어린 손주들을? 아들 며느리가 언제 자리를 잡아 모두를 데려갈 형편이 될지 어찌 알겠는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런 불확실한 미래는 두 분을 정신적으로도 몹시 힘들게 했을 게 뻔하다.

‘나는 오히려 사거리 기억이 생생해. 겨울에 안방 창밖으로 보였던 우리 산에 눈이 하얗게 쌓이면 나는 앉은뱅이책상에 올라가 창문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차가운 겨울 느낌을 가졌어. 집 뒤편 우물에서 할아버지가 냉수마찰하시는 모습도 여러 번 봤어. 부엌에서 할머니와 있는데 거기는 거적과 같은 물건을 들치면 그렇게 지네(난 노래기라고 기억한다)가 많았어. 명절에는 버스를 타고 엄마 아버지가 문밖 신작로에서 내렸지. 그때 엄마가 몇 살이었을까? 내가 어렸는데도 엄마의 생활력을 느낄 정도였어.’

막내가 기억하는 사거리 시절 이야기다. 막내는 뱅골 보다 사거리 시절 이야기를 더 많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뱅골에 살 때는 너무 어려서 기억이 흐릿하다며. 사거리 기억을 더 많이 하는 이유는 아마도 집에만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는 3학년이라 도시락까지 준비해 학교에 갔을 것이다. 오후 수업도 있었을 테니까. 셋째는 1학년이라 오전 수업만 하고 집에 왔을 것이다. 누나랑 형이 학교에 가고 나면 혼자 남은 막내는 두 분과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을 테고. 추측해 보면 당시 엄마는 30대 후반이었다. 엄마는 명절 전날 밤늦게까지 정신없이 장사를 하셨을 것이다. 그리고 신 새벽에 용산 역으로 가 첫차를 타셨을 것이다. 새벽에야 사거리 집에 오셨을 엄마의 허덕거리던 삶을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명절날 아침에야 돌아오는 며느리에게 할머니가 큰 소리를 내신 기억은 없다. 할머니도 그런 상황을 이해하고 계셨던 것 같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장면을 막내는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 단잠에 빠져 있을 시간. 잠을 자지 않고 부모님을 기다렸을 막내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져 지금도 마음이 짠하게 느껴지는 건 인지상정이겠지.


공원 양귀비.jpg 올림픽 공원 들꽃 마루에 핀 꽃 양귀비를 볼 때마다 할머니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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