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들 2

(3)생일날 가출 사건 (4)봄날과 병아리 (5)빨래터에서 생긴 일

by 권영순

(3) 생일날 가출 사건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오 남매는 둥글게 모여 앉아 수수팥떡을 먹고 있었다. 내 기억에 사랑방이었다. 엄마는 우리들이 10살 이전에는 생일 떡으로 수수팥떡을 해 주셨다. 오래 살라는 의미를 담아 내려오는 전통을 지키신 것이다. 엄마는 부엌에서 커다란 가마솥에 물을 펄펄 끓여 채반에 미리 빚어 놓은 수수경단을 넣고 익히셨다. 잘 익힌 수수경단에 팥고물을 묻혀 우리에게 내어 주시던 장면이 지금도 선명하다.

수수팥떡을 먹고 어느 정도 배가 찰 즈음이었다. 갑자기 작은 오빠가 사실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주장했다. 내가 이 집 딸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생일 떡을 먹다 날벼락을 맞은 나는 조금 울먹이며 아니라고 한 것 같다. 하지만 모두 맞다는 얼굴로 날 바라봤다. 큰오빠도 거들었다. 나는 그럼 어느 다리에서 주워왔냐고 물었다. 내가 아는 다리라고는 야목으로 가는 길에 있던 게 유일했다. 작은 오빠는 야목에 있는 다리라고 콕 집어 말했다. 거기 가면 너를 낳은 진짜 부모님이 거지로 살고 있다며.

하필 생일날 그런 말을 들은 나는 상당히 동요했다. 무엇보다 생일날에 거짓말을 할 리는 없다고 굳게 믿은 것이다.


결국 안방 서랍에서 작은 보자기를 꺼내 옷가지 몇 개를 싸들고 집을 나섰다. 처음에는 마을 주변을 돌다 버스를 타고 야목 다리에 산다는 친부모를 찾으러 사거리 방향으로 갔다. 사거리 신작로에 서서 두어 시간에 한 대 오는 버스를 기다렸다. 그리고 어른들처럼 손을 들어 버스를 세우려고 했다. 당시는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도 사람들이 손을 들면 버스가 섰었다. 운전사는 어린애 장난으로 여겼는지 버스를 세우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렸다.


해질 무렵이 되었다. 갈 곳이 없던 나는 집안으로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서성거렸다. 창고 옆 돼지우리에 있는 돼지들도 나보다는 신세가 나아 보였다. 적어도 이 집 돼지라는 사실은 분명하니까. 샛문 밖을 서성이다 창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고는 각종 곡식 보관용으로 아버지가 지은 본채의 부속건물이었다. 가을걷이가 끝난 뒤라 커다란 창고 가득 곡식 가마니가 쟁여져 있었다. 창고는 규모가 상당히 커 당시 내 걸음으로 제법 걸어야 했다. 가마니를 기어 올라갔다. 쌀가마에 꼭대기에 올라가 몸을 뉘었다. 찍찍거리는 쥐 소리가 잠을 불러왔다. 피곤해선지 금방 잠이 들었다.


완전히 어두워져도 돌아오지 않는 나 때문에 집안이 제법 시끄러워졌던 것 같다. 식구들이 불을 환히 켜고 웅성거리며 나를 찾는 소리가 창고 문틈으로 들렸다. 눈을 떠보니 캄캄한 어둠에 덜컥 겁이 났다. 그때부터 소리 내 울기 시작했다. 내 울음소리를 따라 창고 문을 열고 들어온 가족들은 가마니 틈에서 나를 끌어냈다. 부모님께 야단을 맞은 것 같지는 않다. 생일날 어린 동생을 속여 가출하게 만든 오빠들이 어떤 벌을 받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 생각해봐도 나도 참 이것저것 만만치 않게 말썽을 부렸구나 싶다. 오죽하면 엄마가 아들 넷보다 딸 하나가 훨씬 손이 많이 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을까?


(4) 봄날과 병아리


어느 봄날이었다. 햇살이 뱅골 집 건넛방 툇마루에 명랑하게 내려앉아 거의 졸음 반 가수면 상태였다. 춥고 긴 겨울을 보낸 뒤 햇살이라 더 따뜻하게 느껴져 그걸 즐긴 것 같다. 엄마가 부엌에서 조심스러운 손짓으로 날 부르셨다. 부엌 뒤켠에 제법 폭이 넓은 통로가 있었다. 본채와 창고 사이에 있는 공간이었다. 엄마를 따라가 보니 본채 담벼락에 큼직한 뭔가가 담요에 덮여 있었다. 엄마가 살며시 담요를 들추셨다. 삐약거리는 귀여운 병아리들이 사각형 철제 그물망 안에 가득 들어 있었다. 병아리들이 깜장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았다. 엄마가 내 손에 올려준 병아리가 어찌나 귀엽던지. 나도 모르게 뺨에 대고 비벼댔다. 아주 조심스럽게. 여러 색깔 병아리들의 귀여운 모습과 보드라운 털에서 풍기던 온기가 아직도 생생하다.


원래 봄날 갓 부화한 병아리는 최상급 대우를 받았다. 안방 아랫목 가장 따뜻한 곳은 병아리들 차지였다. 닭을 기르는 집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병아리가 아랫목 대신 왜 그곳에 가 있을까? 엄마가 나만 몰래 불러내 병아리를 보여주신 이유가 있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작은 오빠가 일으킨 "삐아리 사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직 찬 기운이 가시지 않은 이른 봄날. 안방 아랫목에는 병아리가 있는 풍경이 자연스러웠다. 아랫목에서 갓 태어난 병아리들이 모이를 먹으며 매일매일 자랐다. 병아리들은 이른 봄의 한기를 피하는데 사람보다 나은 대접을 받았다. 병아리들이 울타리 안쪽 닭장으로 가는 건 서서히 털이 빠질 정도로 자랐을 시기다. 이때부터 암탉을 따라 모이를 찾는 훈련을 시작한다. 암탉이 있더라도 작은 병아리들을 매나 솔개가 호시탐탐 노렸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닭의 가장 큰 적은 인간이지만 말이다.


중국 작가 창신강의 <열혈 수탉 분투기>에는 이런 아이러니를 재미있게 풍자하고 있다. 아랫목을 병아리들이 차지했다면 윗목에는 콩나물을 기르는 시루가 있었다. 콩나물은 물을 자주 줘야 잘 자란다. 콩나물이 안방까지 진출한 이유는 적당한 온기가 필요해서였을 것이다. 시루 윗면에는 두 개의 넓적한 나무가 걸쳐졌다. 그 위에 콩을 깐 채반을 놓고 수시로 물을 부어주었다. 콩나물들은 말 그대로 쑥쑥 자랐다. 콩나물처럼 자란다는 말의 의미를 눈앞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작은 오빠는 호기심이 왕성했다. 병아리를 물에 넣으면 어떻게 헤엄을 치는지 무척 궁금했던 모양이다. 결국 일을 저질렀다. 아랫목에서 놀고 있는 병아리를 데려다 물이 가득 담긴 시루에 넣었던 것이다. 그것도 병아리 거의 전부를. 엄마는 “삐아리, 삐아리.”하며 손가락질을 하는 아들을 한 대 쥐어박지도 못하고 망연자실하셨단다. 간신히 부화시켜 애지중지 기르던 병아리들은 안타깝게도 수영을 하지 못했다. 모두 익사하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우리의 여름 보양식이 단번에 사라지는 일이 생기자 몇 년 동안 병아리가 아랫목을 차지하는 일은 금기시되었다. 다시 병아리를 어떻게 부화시키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웃들에게서 병아리를 조달해 키우셨을 것 같다. 그해 여름 복날에 닭고기를 못 먹는 일이 생기지는 않았던 것 같으니 말이다.


60년대 달걀은 고가의 식품이었다. 달걀은 현금을 만지기 쉽지 않은 화성 농가에서 때로 현금 역할을 했다. 지금의 비봉 중·고등학교 교문 앞에 우리들이 자주 다니던 문방구가 있었다. 엄마는 공책이나 연필 등을 산다고 하면 가끔 내게 달걀을 두 개 주셨다. 책보를 메고 그곳까지 달걀을 들고 가는 일은 거의 미션 수준이었다. 평소에는 겅중거리고 뛰며 노래도 하고 다니던 길을 달걀을 들고 얌전히 걸어야 했다. 문구점 주인은 달걀을 받고 공책과 연필로 바꿔 주었다. 달걀을 돈으로 바꾼 이야기는 사거리 시절에 더 자세히 이야기 하겠다.


달걀 하면 연상되는 이야기 중 하나 더 기억나는 게 있다. 어느 해 겨울방학이었다. 오빠들은 서울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방학이라 집에 돌아왔다. 사랑방에서 작은 오빠가 서울에서 배운 마술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우리는 작은 오빠가 보여주는 마술을 구경했다. 달걀이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마술이었다. ‘수리수리 마수리~ 얍!’ 아마 그런 주문까지 외쳤던 것 같다. 사라졌던 달걀이 다시 나타나자 우리 모두는 신기해서 박수까지 치며 환호했다.

신기한 걸 참지 못한 막내가 나섰다.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기도 해 보겠다며 형에게 달걀을 달라고 했다. 주문과 동작도 똑같이 했는데 달걀은 바닥으로 떨어져 순식간에 깨졌다. 당시 달걀 가격을 생각해 보라. 모두 놀라 움찔하는 사이 막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자기는 마술이 왜 안 되냐면서. 작은 오빠는 마술이 아니라 약간의 트릭이라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려줬다. 주문으로 우리들의 정신을 빼놓고 달걀을 시보리가 있는 소매 속에 감추었다 꺼낸 사실을 말이다. 비밀을 알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막내는 가끔 나와 셋째를 불러 그 마술을 시연했다. 이미 한물간 마술이었지만 무슨 생떼를 부릴지 몰라 한동안 그냥 봐줘야 했다. 다행히 달걀을 깨는 사태가 더 일어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사람들이 자주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감성이 소녀 같다는 말이다. 특히 내 글과 말에서 그런 느낌이 강하다고 했다. 가끔 내 소녀 감성이 어디서 왔는지 추측해 볼 때가 있다. 당연히 그 감성은 엄마에게서 받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유전이 아니라 교육되었다고 생각한다. 유전적인 요인이 없지는 않겠지만. 병아리를 몰래 보여주시던 것처럼 주변 자연물 하나도 그냥 보아 넘기지 않고 나에게 자주 일러주려고 애쓰셨기 때문이다.


안양에 살 때다. 그때 나는 초임 교사였다.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원을 수학하던 시절이라 몹시 바쁜 나날이었다. 어느 날 밤 엄마와 안양천을 산책하러 나갔다. 그때만 해도 안양천변에 있던 대한전선 공장 주변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마침 콩밭 주변을 지나가다 엄마가 내게 말씀하셨다. ‘콩잎도 밤에는 잠을 잔다.’고. 과연 콩잎들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해가 지면 탄소동화 작용을 하지 않아도 되니 콩잎들이 축 처져있다고 설명할 수도 있다. 과학적으로 말이다. 그러나 지금도 나는 콩잎들도 밤이면 잠을 잔다고 믿고 있다. 똑같은 자연현상도 바라보는 관점이 어떻게 다르냐에 따라 감수성 게이지가 오르내릴 수 있다. 나에게 엄마는 작은 현상도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감수성의 원천 제공자였음이 분명하다.


(5) 빨래터에서 생긴 일


농촌 배경 드라마에 보면 어느 마을이나 비슷한 장면이 있다. 빨래터에서 각종 소문이 오가고 그 소문은 또 발 없는 말이 되어 번개보다 빠르게 퍼져나가는 장면이다. 딸이기 때문인지 할머니나 엄마는 어디든 나를 데리고 다니셨다. 심지어 가을 추수가 끝나면 배꽂지 무당집에도 데려가셨다. 배꽂지(지금의 화성시 삼화리)는 왕재골 벌판 너머에 있었다. 공물로 쓸 쌀을 머리에 이고 가시는 두 분을 따라 걷던 개울 둑이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진다. 사실 나는 무당집을 좋아하지 않았다.


큰오빠는 배꽂이 무당이 자기 수양 엄마였다고 털어놨다.

-어려서 젖이 부족해 기력이 많이 약했어. 심지어 몽유병 증세까지 있었어. 큰 대문 앞에서 깬 적도 몇 번이나 있어. 꿈에 수많은 동그라미를 보고 엄마에게 울며 달려간 일도 있어서 그분을 수양 엄마로 삼은 거 같아. -


장손이니 그럴 수 있었겠다며 우리는 모두 한참 웃었다. 문제는 큰오빠도 그 무당집을 무서워했다는 게 함정이다. 붉은색 계통의 채색이 요란한 무시무시한 신장들이 잔뜩 그려진 방에 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 방 한가운데 굵은 촛대가 놓여 있었다. 촛대에 꽂힌 양초에 불을 붙이면 어둑한 방 가운데서 무슨 장군 신상 그림이 나타났다. 바람이 일렁거리면 촛불에 긴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방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아주 음울한 분위기를 풍겼다. 뭐라고 빌어대는 무당의 주문까지 더해지면 나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아직 어린 내게 무당집은 솔직히 겁이 나는 장소였다, 갈 때마다 방 한 구석에서 졸아 있었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나는 시냇가나 웅덩이 주변으로 빨래를 하러 가시는 엄마도 자주 따라나섰다. 내가 엄마의 껌딱지였음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퍼내 빨래를 하기에는 대식구의 빨래가 만만치 않았다.

그날도 나는 빨랫감이 든 함지박을 머리에 인 엄마를 따라나섰다. 엄마는 동네 아줌마들과 논에서 웅덩이로 물이 흐르는 곳에서 만나셨다. 그곳은 우리 집 텃밭을 지나 동쪽으로 향한 벌판에 있었다. 당시는 논에 농약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사철 맑은 물이 흘렀다. 한 발짝만 떼도 개구리들이 사방으로 흩어질 정도로 많았다. 우리 남매들이 닭 모이로 쓰기 위해 개구리를 잡으러 다니던 곳이기도 했다.

사람이 건너 다닐 수 있게 징검다리 사이 시멘트까지 발라져 있어 빨래하기 좋았다. 세탁물을 방망이로 두드려 때를 빼기에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문제는 시멘트가 발라졌어도 물이 계속 흐르다 보니 그 위로 물이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는 거다. 제법 길게 자란 물이끼는 아주 미끄러웠다. 발을 조금만 잘못 디뎌도 미끄러져 넘어지기 일쑤였다.

나는 빨래를 하는 엄마 옆에서 찰박거리며 물장난을 쳤다. 그러다 물이끼를 밟고 웅덩이로 미끄러졌다. 웅덩이는 어린 내가 혼자 빠져나오기에 제법 깊었다. 수렁으로 몸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허우적대던 그 순간 누가 물에 뛰어들어 나를 구했을까? 당연히 엄마였다. 엄마는 순식간에 물에 뛰어드셨다. 건져낸 나를 안고 거꾸로 들어 삼킨 물을 뱉어 내도록 등을 두드리셨다. 물에서 나를 건져내던 엄마의 순발력은 장난 아니었다.


지금도 나는 물을 무서워한다. 수영을 배워도 영 실력이 늘지 않는다. 아마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내가 스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하는 이유도 있다. 한 동안 그 순간의 공포가 쉽게 잊히지 않고 꿈속에서도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수십 년이 지난 후. 하루는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남양 현대자동차 연구소로 들어가는 장덕리 입구에 수영장이 생겼단다. 엄마가 다니시던 노인대학에서 경로우대 차원으로 그곳을 저렴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며 수영을 다니고 싶다고 하셨다. 내게 주신 숙제는 엄마의 수영복 구하기였다. 가사와 직장 생활에 논술활동까지 다니던 터라 정신이 없던 때였다. 엄마에게 맞는 수영복 사이즈를 찾아야 하는 미션이 더 문제였다. 인터넷으로 주문하기도 애매해 근처 롯데백화점으로 수영복을 사러 갔다. 그전에 합창대회에 나가신다고 흰색 블라우스와 검정 치마를 구해달라고 하셨기에 대충 사이즈를 알아 다행이었다.


합창대회에 입고 나갈 옷을 구할 때도 생각나는 일이 있었다. 나는 인형 옷을 만드는 옷감으로 엄마가 직접 만들어주신 치마를 입어 본 적이 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였다. 하루는 수원을 다녀오신 엄마가 보따리에서 금색 은색 실이 잔뜩 들어간 화려한 옷감을 꺼내셨다. 수원에는 인형 옷을 만들어 납품하던 사촌 이모가 계셨다. 그분이 주신 인형 옷 자투리들이었다. 엄마도 나처럼 고명딸이라 우리에게 친 이모는 없다. 대신 엄마는 사촌 이모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계셨다.

엄마가 가져오신 옷감은 햇빛에 나가면 말 그대로 색색의 광채가 찬란했다. 그 인형 옷 자투리를 이리저리 오려 붙이시더니 재봉틀로 박음질하여 내 치마를 만들어 주셨다. 추석이나 설날에 우리들의 때때옷을 만들어 주시던 솜씨가 어디 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는 한동안 그 치마만 입고 학교를 갔다. 너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가 혼인하실 당시에는 신부들이 신혼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직접 만드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엄마도 필요한 물품들에 각종 수를 놓아 가지고 오셨다. 그게 당시 풍습이자 유행이었다. 뱅골 집 건넛방에 엄마가 시집오실 때 만들어 오셨다는 이불 덮개나 베갯잇, 양복을 보관하는 덮개 등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재봉일은 아버지가 한 수 위시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야간 고등학교를 다니셨다. 독학을 하신 것이다. 자취를 하시면서 학비를 벌기 위해서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알바로 재봉 일을 하셨다는 거다. 그때 배운 기술로 두 분 옷을 고쳐 입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구포리 산에 사실 때도 집에 가 보면 어디서 얻어 온 각종 옷감으로 보자기나 스카프 등을 만들어 판매하실 정도였다. 문제는 그걸 사는 사람이 별로 없어 환금성이 거의 없었다는 거지만. 한동안 아버지는 그 뭉치와 직접 기르신 농산물까지 들고 남양 읍내로 팔러 다니셨다. 우리는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돈을 버는 게 목적이 아님을 알고 있어서였다. 오래간만에 사람들을 만나고 시간을 보내는 의미가 더 컸기 때문이다.


엄마의 수영복을 고르다 문득 그 옛날 빨래터 웅덩이에 빠진 나를 구해주시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자식의 안위를 먼저 챙기시던 엄마가 생각난 것이다. 짜증스럽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심지어 죄스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낳고 길러주신 것만이 아니라 목숨도 구해주셨는데. 이 정도 하는 게 뭐 대수라고. 살기 바쁜데 심부름까지 시킨다고 짜증을 낼 일이 아니었다. 제일 좋은 수영복을 사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에 필요한 물품까지 함께 구입해 화성에 가져다 드렸다. 수영복은 다행히 잘 맞으셨나 보다. 엄마 친구 분들이 수영복을 어디서 샀냐며 예쁘다고들 하셨다니. 듣는 내 기분이 더 좋아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생각났다.


가끔 내리사랑이 참 힘들구나 싶을 때가 있다. 줘도 줘도 부족한 게 부모의 자식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 세대는 먹이고 입히고 교육시키기 위해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던 부모님들을 선명히 기억한다. 당연히 부채 의식도 상당히 가지고 있다. 그게 나쁜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부모님에게 내가 하던 태도를 생각하면 어떤가? 자식으로 가는 내리사랑이 바빠 부모님 살피기를 이리저리 피해왔었음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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